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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3월 22일 국민대 BIble Cafe 제 3 강2017-03-24 20: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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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학기 캠퍼스 바이블 카페 제 3 강


자유를 주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4:16-21


우리 선배들은 입학 시즌부터 많은 새내기들을 만나서 초청을 했습니다. “한번 성경을 공부해보세요” 호기심이나 소원이 있어서 응답을 한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거절을 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 나의 대학생활을 뭔가로 부터 속박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희가 볼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속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무릇 생명을 가진 생명체들은 자유가 필요조건인 것 같습니다. 작은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이 발작을 일으키거나 죽는 경우가 많아 뉴스에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드넓은 대양을 헤엄쳐야 하는 돌고래에게 작은 수족관에서 평생을 보내라고 하고, 광활한 초원을 달려야 하는 사자에게 사방으로 갇힌 울타리 안에서 사육사가 던져주는 고기 한 점으로 만족하라고 한다면 이는 극심한 고문일 것입니다. 정치가나 기업인이 구속되어 유치장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감방이 너무 호화스럽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사생활이 통제당하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 것만으로도 고통입니다. 군대를 가면 가장 힘든 원인이 훈련이 강해서도 아니고 잘 못 먹어서도 아닙니다. 24시간이 국방부에서 짜 준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든 점입니다. 이는 생명체는 특히, 인간은 자유를 누려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패트릭 헨리라는 미국의 정치인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대학은 진리의 요람인 동시에 자유의 요람이기도 합니다. 길게는 12년 동안 공교육과 사교육의 굴레에 매여서 나답게 살아보지 못한 새내기들이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애완견이 거리를 휘젓고 다니듯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이리고 가보고 싶고 저리도 가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고 가장 국민적인 국민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얼마나 자유를 누리시나요?

예수님이 회당에서 이사야 성경을 펼쳐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아서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예수님이 하실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의 글입니다. 예수님은 이 글을 읽으심으로 자신의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포로 된 자들은 자유를 얻고, 눈 먼 자들은 다시 보게 될 것이고 눌린 자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 말들은 전부 자유를 누리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포로 된 자들이라고 하니 IS같은 과격 이슬람 단체에 의해서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주신다는 것으로 생각하여 난 포로가 된 적이 없으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눈 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될 것인데 난 눈 먼 적이 없으니 이 역시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가위에 눌린 적도 없으니 눌림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도 나하고는 역시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남의 나라에 종이 된 적이 없는데 무슨 자유가 필요하냐고 역설하였습니다. 김정은 정권 치하에 숨을 죽이며 살아가는 북한 동포들에겐 해당이 될지라도 우리에게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압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지만 자유가 없고 자유에 몹시 목말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떤 분이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10대 때엔 입시공부에 매이고 20대 땐 취업에 매이고, 30대엔 직장에, 40대가 되면 자녀교육에, 50대엔 퇴직 후에 카페를 열지 호프집을 열지 노후에 매이고, 60대엔 자녀결혼과 소외감에 매이고 70대가 되면 요양원에 갇힌다” 도대체 어디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포로 된 적도 없고 눌린 적도 없는 것 같지만 실은 현실에 매여 포로가 되었고 현실의 막중한 책임감에 눌려 자유를 잃었습니다. 저도 대학에만 들어가면 자유와 낭만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환호와 감격은 아마 일주일을 채 못간 것 같습니다. 곧 현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만만치 않은 학과공부, 입학 초부터 쏟아지는 과제의 양, 거기에 군대는 언제 갈지, 취업공부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에 관한 걱정으로 마음이 눌리기 시작했습니다. 대입보다 열 배는 더 힘든 취업, 취업을 못해 도서관과 열람실에 아예 자취방을 꾸려놓은 듯한 10년 선배들의 짐들을 볼 때 나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마음 한편은 씁쓸함을 지울 수 없어 이 일 저 일 해보지만 고독감과 불안감이 내 목을 조여 옵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까?

사실 이런 현실보다도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죄라는 요소입니다. 대학에서 배우는 어떤 교과목도 인간 안에 있는 ‘죄’라는 것에 주목하도록 돕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난 어쩔 수 없는 죄인이야”라고 말하면 옆에 있는 친구들은 그런 심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 술이나 한잔 쭉 들이키고 다 잊어버리고 새 출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중학교 때 자신을 왕따시킨 친구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정신질환이 들려버렸습니다. 매일 악몽을 꾸고 꿈에서 만나 복수를 하였습니다. 그 친구들은 다 잊어버린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그에겐 매일 직면하는 고통스런 현실이었습니다. 또 한 분은 매우 명석한 두뇌로 일류대에 들어갔지만 계속된 고시의 실패로 PC 게임의 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울적한 마음을 게임으로 달래다보니 자기가 게임을 하는지 게임이 자기를 갖고 노는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버렸답니다. 한 번은 2박3일을 자지도 못하고 울면서 게임을 하는 자신으로 인해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누구는 음란물에 중독이 되어 끊지를 못하고 스트레스만 받으면 음란물에 접속하여 오랜 시간을 눈이 벌걸 정도로 보다가 과제도 못하고 수업도 빼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도비만인데 여전히 맛있는 음식 앞에서 사족을 못 씁니다. 좋아하는 꼬치구이 집 앞을 지나가면서 자신은 눈을 감고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저만치 가서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 손에 꼬치가 두 개 들려있었다고 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난하고 이기적으로 구는 내 자신이 한심해보이기도 합니다. 20살이 됐음에도 여전히 규모있게 생활하지 못하고 게으르고 무질서한 자신을 보면 화가 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까?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할 것을 하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선한 것은 무한히 추구하고 악한 것은 발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는 현실에 지배당하지 않고 현실을 극복하고 새역사를 창조해나갈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는 개나리가 마음껏 노란 꽃잎을 내고 새가 창공을 비상하는 것처럼 나다움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내가 하고 싶고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는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진리에만 매여서 갈 수 있는 게 자유입니다. 자유는 나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으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돈이 부족하고 인간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권력을 쥐지 못해도 누리는 것입니다. 학문이 짧고 건강하지 못하고 잘 움직이지 못해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유를 주러 오셨습니다. 현실과 죄에 포로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죄와 인생의 짐에 눌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은 말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눈은 감겨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계는 잘 파악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는 인식을 못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영과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는 까막눈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이 있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많은 공부를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을 방황하며 허비합니다. 나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 먼 자들을 다시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십니다.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하십니다. 앞이 안 보일 땐 불안하지만 이젠 보이기에 자유롭고 활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21절을 보면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는 이 말씀을 읽는 이 시간부터 너희에게 자유롭게 될 새 시대가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을 통해 자유롭게 됩니다. 신앙은 속박이 아닙니다. 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를 얻는 것이고, 나를 찾는 것이고 노예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신앙이 성숙하신 분들은 뭔가에 눌려있지 않고 매우 가볍고 기쁘고 작은 일에도 감동을 받으며 감사하는 삶을 사십니다. 여러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 한 잔 한다고 이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입시에서도 해방이 되었고 부모님의 간섭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났고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을 듣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며 내가 원하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유를 만끽하지만 얼마나 마음이 자유롭고 평안하며 즐거운지 말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현실, 대학의 실상, 장래에 대한 염려, 마음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 등이 나를 점차 억누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계속되는 카페 말씀과 성경공부를 통해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를 받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