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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6년 요한계시록 특공대 14강 (계시록 14장)2017-03-1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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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14강

14장은 일곱 대접 재앙 직전, 나팔재앙과 대접재앙 사이의 이야기 중 마지막 부분입니다. 12,13장에서 사탄과 교회의 전투가 매우 극렬했습니다. 표를 받느냐 거부하느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극적 긴장이 이어지는데 144,000이 다시 등장합니다. 144,000은 7장에서 나왔었습니다. 여섯 인 재앙과 일곱째 인 재앙 사이에서 등장했었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주도로 재앙이 세상에 내려지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들은 절대적인 보호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7장에서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그럼 14장은 어떤 내용일까요?

1절. 요한이 보니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습니다. 용과 두 짐승이 세상을 주관하고 생명을 해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눈을 들어 보니 시온산에는 어린 양 예수님과 144,000이 서 있는 것입니다. 12,13장과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재앙과 환난 속에서도 구별되고 보호되는 그들의 모습이 7장에서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7장에서는 땅에서 구별되는 144,000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시온산에서 어린 양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시온산은 구약에서는 예루살렘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교회,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히12:22).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7:3에서 144,000이 그 이마에 인을 맞았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13장을 통해서는 짐승의 이름을 이마에 맞는 사람들이 있고 14장에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이마에 맞는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의 이름을 이마에 맞을 것인가 우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바알선지자 450인과 싸우던 엘리야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몰려든 백성들을 향해서 소리쳤습니다. “너희는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거든 그를 택하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택할지니라” 누구의 이름을 이마에 맞고 싶으십니까? 누구의 영원한 보호를 받고 싶으십니까? 짐승입니까, 어린 양입니까? 

2절. 하늘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는데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우렛소리도 같고 거문고를 타는 소리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천사들의 노랫소리와 하늘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천상의 소리입니다. 3절을 보면 그 소리에 반주를 맞춰 144,000이 새 노래를 부릅니다. 새 노래는 5장에서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뗄 때 생물들과 이십 사 장로들이 부른 것이 처음이었습니다(5:9). 말씀드렸지만 새 노래는 홍해를 건넌 후 모세와 백성들이 구원을 찬양하며 부른 노래의 새 버전입니다. 이제 죄와 사망의 바다를 건너고 구원을 받았으니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노래는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144,000밖에는 능히 배울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가령 모세가 홍해 앞에서 구원을 찬양하며 부르는 노래를 홍해에 빠져 죽어가는 애굽 군사들이 배울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구원받은 자들만 부르는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배우고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날마다 새 노래를 주님께 불러드리기를 기도합니다. 

4,5절은 144,000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다 미혼이라는 말도 아니고 숫총각, 숫처녀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는 영적으로 음행하지 않은 사람들, 곧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그 마음을 지킨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가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삶의 방향과 기준은 어린 양입니다. 144,000은 내가 가는 길을 주님이 동행해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그 어떤 길이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은 처음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라 함은 ‘첫 수확물’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지기에 합당한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들인 것입니다.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어린 양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 입술의 고백이 진실하며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강력한 짐승의 통치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장면이 좀 바뀝니다. 6-20절은 짐승에게 표를 받은 사람과 예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줍니다. 6절.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만민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이란 뜻입니다. 짐승을 경배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144,000과 같은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임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7절. 그는 큰 음성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만물을 만드신 그를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심판의 그 날은 무섭고 두려운 날이지만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나니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며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니 경배를 드려야 하는 날입니다. 

8절. 이번엔 또 다른 둘째 천사가 그 뒤를 따라 가며 말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바벨론의 무너짐은 18장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천사에 의한 전주곡입니다. 바벨론은 구약에 등장하는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전에 이라크 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이 내 건 캣치프레이드가 ‘바벨론 영광의 재건을 위하여’였습니다. 그만큼 바벨론은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했던 나라로서 대표되고 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성도들이 생각하기에 바벨론은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세계의 모든 길은 다 로마로 통하고 그 가는 길은 요즘 왕복 6차선 도로처럼 돌로 매우 단단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의 크기는 지금의 월드컵 경기장만하고 그 위용에 있어서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음행은 성적인 타락보다도 영적인 간음, 곧 우상숭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마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자신을 대신하는 금신상에게 절하도록 한 것처럼 황제를 향해 경배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잡신을 인정하고 그 신들을 위한 신전과 제사 문화를 허용했습니다. ‘진노의 포도주’란 마실수록 진노를 쌓는 포도주란 말입니다. 황제 숭배와 다신교 신앙에 빠져들수록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로마의 멸망의 원인을 여러 지정학적인 요인에서 찾지만 성경은 그들의 영적 음행에서 찾습니다. 

9절. 세 번째 천사가 그 뒤를 따라가며 큰 음성으로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짐승을 경배하고 표를 받으면 그 순간에는 유익이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진노의 포도주’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여기서 ‘진노’는 다른 곳에서 나오는 ‘진노’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주체할 수 없이 자제력을 상실하고 극도의 흥분한 상태에서 나오는 진노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두렵다고 말할 때에 사용하는 ‘진노’입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영적 음행을 행하며 짐승을 경배하는 것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10절.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데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고 말합니다. 희석하지 않은 원액 그대로의 포도주란 말로서 보드카처럼 아주 강하여 조금만 마셔도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간혹 성경을 자유주의적으로 해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영원히 진노하겠느냐고 말하며 영원한 고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경멸하고 발로 밟는다면 그 대가를 본인이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큰 만큼 진노도 큰 것입니다. 

11절 하반절에서 다시 한 번 얘기합니다.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짐승을 따르기로 결정한 순간 그는 그의 종이 됩니다. 그는 자기의 종을 마음껏 끌고 다니며 유린합니다. 영혼에 쉼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적 유익에 사탄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는데 이번엔 기록하라고 말합니다. 10:4에서는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알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나 영원히 몰라도 되는 것들은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것은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두 눈을 부릅뜨고 두 귀를 쫑긋 세우며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지금은 종말의 때입니다. 종말의 때에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죽음은 슬픈 일이며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주 안에서, 곧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고 죽는 자들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고 성령께서 재차 말하십니다. 수고를 그치고 쉴 것입니다. 이는 짐승에게 표를 받은 자들이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이는 그들이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행한 그 일이 복과 쉼을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또 하늘을 봅니다. 14-16절은 최종적으로 벌어지는 구원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이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습니다. 아마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그때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서 그를 향하여 외치기를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요4장에서 구원을 얻기로 예정된 영혼들을 향해 익어 추수하게 된 곡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곡식들은 세찬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인내로서 마지막 결실 때까지 온 곡식들입니다.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휘두르매 그 곡식들이 거두어졌습니다. 

17-20절은 최종적으로 벌어지는 심판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판타지 애니메이션 같은 것을 보면 죽음의 사자가 큰 낫을 갖고 등장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낫이 바로 계시록에서 나오는 낫입니다. 그때 제단으로부터 한 다른 천사가 나와서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포도송이는 심판받기에 충분히 죄악이 찬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원도 구원받기에 충분히 때가 찬 것이고 심판도 심판받기에 충분히 때가 찬 것입니다. 그가 낫을 휘둘러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는데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고 말합니다. 말굴레라 함은 말의 얼굴에 단 가죽끈 같은 것으로 고삐를 연결시키는 장식입니다. 말굴레에까지 닿았다는 것은 보통 말이 포도주 틀을 밟는데 포도가 많고 말이 거칠게 밟을 때 말의 얼굴에까지 포도즙이 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심판의 틀에서 처절하게 밟히는 자들의 피가 매우 많다는 의미입니다. 일 스다디온은 약 192미터이니 천육백 스다디온은 약 300킬로입니다. 이는 그만큼 길게 피가 흘러갔다는 것으로서 마지막 날에 흘려질 피의 양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원도 양구에 가면 21사단이 있고 거기에 ‘피의 능선’이란 곳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그 고지를 빼앗고자 남북 양측이 수많은 사상자를 배출하며 싸웠는데 일주일이 넘게 핏물이 계곡물처럼 계속 흘러서 ‘피의 능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30년 전에 가본 그곳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제 주님이 추수하실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누구는 예수님의 낫에 추수되어 알곡 창고에 들어갈 것이고 누구는 천사의 낫에 거두어져 진노의 틀에서 밟힐 것입니다. 영광을 자랑하던 바벨론도 무너질 것이고 밤낮 쉬지 못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고 모든 수고를 마치고 쉬는 사람도 생길 것입니다. 우리의 이마에는 짐승의 이름이 있나요 어린 양의 이름이 있나요? 영적 음행을 멀리하고 순결한 144,000으로 어린 양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