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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여름방학특강 1강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복 (에베소서 1:1-19)2017-08-08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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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강 메시지

말씀: 에베소서 1:1-19

요절: 에베소서 1:3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복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3년간 개척한 곳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에베소의 역사의 특징은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들을 양성한 것이었습니다. 

이 역사로 인하여 에베소서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행 19:9).

사도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에 에베소에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같이 예배를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1강은 에베소의 서론입니다. 

내용은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복 (1-14) 

둘째로 바울의 기도입니다. (15-23)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이 무엇인가 알고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 신령한 복 (1-14)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다른 서신에서와 같이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을 심령 가운데 새롭게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서신의 시작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확신하는 글로 그 서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도 편지를 쓸 때마다 또 매일 아침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선교사요 또 예수님의 종이요 캠퍼스의 목자로 부르심을 받은 데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에베소 서신을 기록할 당시 사도 바울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에베소서 3: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에베소서 6:20a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사도 바울은 쇠사슬 가운데 매여 로마 옥중에서 갖은 옥고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 후 온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세계 선교 역사를 섬겼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로마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수의 몸으로 안 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땅에서 매우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는 동역자나 자녀들도 없었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과 같이 결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세상적인 상은 무엇입니까?

 

그 손에는 무거운 쇠고랑이 들려 있고 발도 쇠고랑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그 당시의 옥고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감옥은 굴 속에 있었습니다. 죄수들의 상황은 아주 열악했습니다. 죄수들은 매일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 중 70%가 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런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피해의식과 절망 가운데 빠져 불평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3절에서 대뜸 “찬송하리로다” 는 말로서 그의 서신의 본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한 3절에서 14절을 원어성경을 보면 긴 한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로서는 한번 찬송이 터지자 계속 솟아 오르는 찬송 때문에 도저히 마침표를 찍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또 어떤분은 이 부분을 찬송의 눈덩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처음에 조그맣게 시작된 찬송은 눈덩어리처럼 커지고 그 눈덩어리 속에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의 아픔과 슬픔을 모두 묻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 찬송의 눈덩어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근래에 와서 많은 크리스쳔들이 잘못된 축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기복신앙이 심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신앙의 목적을 내세 구원관과 더불어 현세에서 물질적인 축복과 육체적인 건강에 두고 있으며 하나님을 통한 축복의 간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경향이 에베소에서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4-6). 5절을 보십시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전에 마치 죄를 짓고 괴로워 하는 가인과 같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창기와 더불어 추하게 살다가 후회하는 탕자와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평화와 만족이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용서하시며 의롭다 말씀해 주시고 그의 품에 다시 품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룩하고 흠없는 인생을 살도록 보살펴 주십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맛보는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고 흠없이 살도록 나를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또 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생명의 근원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둘째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7-10). 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지옥불에 들어가야 마땅할 자가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곰곰히 생각해 볼수록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추구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2:1,3).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는 가장 큰 근본적인 은혜입니다. 한국의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씨는 위암이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자기 주치의에게 10억 유로를 줄 터이니 자기 생명을 3년만 연장해 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돈으로도 생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현세는 유한하며 물질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축복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엄중한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심판 때에 구원을 하십니다. 자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죽음과 질병과 눈물이 없는 (계 21:4) 구원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육체적인 고난과 물질적인 빈곤에서도 하늘 나라의 참된 복을 소망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셋째로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 (11,14).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여기서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또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해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그의 일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a. 하나님의 나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b. 영생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c. 축복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d. 약속들 (히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라” 

e. 새 예루살렘의 복락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f. 몸의 구속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몸의 구속이란 고전 15장 41-46절에서와 같이 육체가 가장 강하고 아름답고 영화로운 상태로 영원히 유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령한 복이란 뜻은 영적인 축복으로서 세상적, 인간적 축복과 구별하여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3-14절을 깊이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신령한 복이라는 말을 쓸 때는 두가지 뜻에서 쓰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복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적인 방법과 꾀로 얻을 수 있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구원의 축복은 인간적으로 아무리 잘나도 얻을 수 없고 또 세상을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 없는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하늘에 속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축복은 확실하고 영원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축복은 언젠간 사라집니다 (벧전 1:24).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한번 얻으면 없어지지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완전하고 신령한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토록 신령한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강조 하고 있

 

그런데 8,9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얻었을 때 우리는 하나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 비밀이란 10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통일이란 본래 목적을 위해 돌려놓거나 모으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질서와 조화가운데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질서와 조화는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환란이 그치지 않습니다. 또 사람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분열되고 미움과 시기로 가득한 지옥이 되고 말았습니다.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이 통일되고 본래의 목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구속의 경륜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륜에 따라 때가 되매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베푸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이 없이는 분명한 통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통치아래 모든 것이 통일되고 창세의 질서를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재림을 통해 만유의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그 경륜을 이루시기를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하나님의 뜻과 경륜과 예정하심은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을 얻는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얻은 자만이 목자의 심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계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죄사함을 받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게 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 일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경륜과 그 뜻의 비밀에 동참하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완전한 복이라는 

세번째 근거는 성령의 보증때문입니다. (14) 편지를 쓰는 것과 도장을 찍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과 인치심을 받는 것은 다릅니다. 인간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표현이 인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할 때 이는 믿음을 가진 자와 그리스도가 서로 연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곧 그리스도가 성도와 인격적인 관계로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자신의 기업 곧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또 구원의 복음을 통하여 이방인을 기업으로 삼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약속하신 성령으로 인을 치셨습니다. (13). 

 

당시 사람들은 가축이 자기 소유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엉덩이 같은 곳에 화인을 찍어 표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우리가 그의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성령으로 인을 치신 것입니다. 


II. 사도 바울의 기도 (15-19)

 

하나님의 신령한 복에 대한 찬미를 끝낸 바울은 에베소서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에베소서 성도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요.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은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의 에베소서 성도들을 향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를 더잘 알도록 기도했습니다. (17) 그들이 마음 문을 밝히기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예수님을 더 잘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niv 성경에서는 "that you may know him better"  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를 더 잘 알고자 기도 하며 영적인 투쟁을 해야 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날마다 드리는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둘째로 마음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기도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게서 에베소 성도들의 한사람 한사람에게 어떤 소망을 두고 부르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게서 나에게도 어떤 소망을 두고 부르셨는가를 알아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소망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기업의 영광이란 얼마나 영광스러우며 풍성한가를 볼 수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의 내용은 하나님나라, 영생, 축복, 성경에기록된 축복의 언약 몸의 구속,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영광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의 영광에 소망을 두고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바울의 기도제목은 우리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덛입기를 기도했습니다(19).19절을 보십시요. “그의 힘이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사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안다(know)의 의미는 지식적으로 안다는 의미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소유하기를 기도 했읍니다 부르심이 과거를 보는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미래를 보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현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힘입니까? 

 

먼저는 강력한 힘 입니다. 이것은 특히 정복하는 힘 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역사하는 힘 입니다. 역사하는 힘이란 효과적인 힘 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생명을 살립니다. 복음역사는 인간적인 능력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복음 역사는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를 개척할때에는 바울 뿐만  아니라 에베소의 동역자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경공부할때에 감동적인능력이 있었고 기도의 능력 병고치는 능력으로 에베소교회의 개척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과 로마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곳 동역자들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마음의 눈을 밝힐 수 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으려면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의거해서 회개할 때 받을 수 있습니다. 지혜와 계신의 영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일용할 양식의 말씀을 매일 공부하고 그 말씀에 의거해서 회개하고 그리하여 지혜의 영과 계신의 영을 받아야 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잘 알수있는 영적인 소원이 있어야 겠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심히 힘든 로마감옥에서도 감사가 넘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까? 


첫째 그는 하나님의 종이요 사도로써 부르심을 매일 새롭게 하고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1절)


둘째 그는 예수님의 피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매일 새롭게 하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7절)


셋째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가 받게 될 기업에 대한 산 소망을 바라보고 매일 새롭게 했기 때문입니다(11,14절) 


우리는 처음 예수님에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덧입고 뜨거운 감사와 주님에 대한 헌신을 하고자 하는 열정이 100도 정도로 펄펄 끓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교사요 목자로써 10년 20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열정이 100도에서 70도로 떨어지고 50도 30도 0도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떨어져갑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덧입고 바로 이방선교사로써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세월이 10년 30년 50년이 흘러도 주님에 대한 감사와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이 왜 더 뜨거워졌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그에 전 서신서를 보면 항상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영접하고 뜨거운 감사를 하며 주님의 이방인 사도로써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하고 하늘나라에 기업의 산 소망을 항상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추운 겨울에 초등학교 교실에서 남방을 위해 장작으로 난로를 피웠습니다. 그러나 한번 장작을 놓고 난로를 피우다가 그 장작이 다 타버리면 저녁에는 교실에 온도가 낮아지고 영하까지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주님에 구원의 은혜와 주님께 헌신하고자하는 열정의 온도가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해서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장작 땔감을 통한 난로와 같이 장작불이 다 타면은 점차적으로 식어져 갑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뜨거운 구원의 은혜와 주님께 대해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의 온도를 계속 사도바울과 같이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한국에 초등학교 교실에서와 같이 도시가스를 이용한 자동보일러 시스템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온도가 20도 미만으로 내려가면 자동senser가 있어서 보일러가 가동되어 온도를 20도 이상으로 유지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매일 현대 보일러 시스템과 같이 예수님의 피를 통한 구원의 은혜와 선교사로써 부르심에 은혜를 매일 새롭게 영접하고 확신을 가짐으로써 주님에 구원의 은혜와 사명에 대한 열정에 온도를 꾸준하게 유지시켰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에서 사도 바울은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찬미했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또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왕자요 공주로 삼으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영생, 축복, 새 예루살렘의 복락을 그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를 주님의 선교사요 목자로 부르시고 이제까지 귀하게 쓰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데 복 주시되”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