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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6년 요한계시록 특공대 13강 ( 계시록 13장)2017-03-14 08: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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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13강

13장은 12장의 연속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막지 못하고 교회의 성장과 활약을 막지 못하는 용은 가장 강력한 히든카드를 내 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짐승(beast)입니다.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장은 두 짐승이 교회를 탄압하는 내용입니다. 

I. 첫 번째 짐승(1-10절). 
1절. 요한이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그는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고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습니다. 뿔은 권세요 머리는 지혜이며 왕관은 영광을 상징합니다.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라고 12:3에서 묘사한 용과 거의 똑같습니다. 용에 버금가는 힘과 지혜가 있습니다. 열 왕관이 있어서 일곱 왕관을 가진 용보다도 어떤 점에서는 더 우월해보이기도 합니다. 5장에서 예수님을 일곱 뿔을 가지신 것으로 묘사를 했는데 얼마나 더 큰 권세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12:1에서 한 여자에게 열두 별의 관이 씌워져 있었는데 그에겐 열 왕관이 씌워져 있으니 매우 비슷합니다. 모든 것이 비슷합니다. 뒤에서 나올 두 번째 짐승도 주님의 권세와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슷하나 가짜요 거짓된 영광으로 위장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보석 중에 큐빅은 다이아몬드와 똑같이 생겼지만 인조다이아이지 진짜 다이아몬드가 아닙니다. 큐빅은 일캐럿에 10만원 정도이지만 진짜는 천만원도 넘습니다. 어떤 아내는 자기가 끼고 있는 결혼반지가 진짜 다이아인 것으로 평생을 착각하며 살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권세와 영광을 언뜻 바라볼 때 짐승이 용의 하수인인지 주님인지 혼동이 될 수 있습니다. 짐승을 주님으로 착각하며 섬기며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은 용이 부리는 하수인이며 참 권세자가 아닙니다.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고 말합니다. 그의 첫 번째 사명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대적하여 그의 이름을 땅에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2절. 그 짐승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다고 합니다. 이는 단7:4-7에 나오는 짐승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거기서 사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상징하며 곰과 표범은 느부갓네살을 이어 왕위에 오르는 왕, 혹은 바벨론 제국 후에 세워질 바사나 알렉산더 제국 등을 상징했습니다. 그 제국의 왕들은 호전적이고 탐욕스러웠는데 그런 면에서 사자나 곰과 표범과 일치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그 짐승은 매우 호전적이고 탐욕스런 성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할 것을 암시합니다. 이런 짐승에게 용은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었습니다. 이제 짐승은 용의 하수인으로서 용을 대신하여 그의 권세와 능력으로 용이 하던 일을 이어 받아 할 것입니다. 

3절. 그 짐승에게 한 기적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그에게 일곱 개의 머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상하게 죽게 된 것 같았는데 그 상처가 낫고 살아난 것입니다. 언뜻 부활의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거의 죽게 되었다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짐승은 부활의 능력을 갖고 있다거나 생사여탈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린 양 예수님이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이나 두 증인이 죽었다가 삼일 반 후에 살아난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기적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도 짐승이 벌이는 작은 기적에는 환호를 하며 따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면서 용과 짐승에게 경배합니다. 천사장 미가엘의 이름의 뜻이 ‘누가 하나님과 같으랴’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비교될 존재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인용하여 사람들은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고 말함으로서 신성모독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저버리고 짐승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사람들 같습니다. 

5절. 짐승의 활동이 어떠합니까? 그는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과장되는 말을 하는 입을 받았다는 것은 교만하게 떠벌이는 말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서운 줄 모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합니다. “신은 죽었다. 죽지 않았다면 무능력한 신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겐 그런 신은 필요 없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지껄입니다. 매우 말을 잘 해서 사람들을 혼동시키고 신앙을 회의하게 만듭니다. 마흔두 달 동안 이런 일을 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매우 큰 권세임이 분명하지만 마흔두 달입니다. 삼년 반입니다. 이는 종말로 충만한 특정한 때요 교회가 시련을 당하는 고난의 때를 가리킨다고 앞에서도 말했습니다. 그에게 권세가 있지만 제한된 시기 속에서 그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도 권세를 임시로 받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6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합니다. 하늘에 사는 자들은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그들을 비난합니다. 죤 밀턴의 실낙원에 보면 사탄 루시퍼가 천사장 미가엘을 조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처럼 영원히 여호와의 종으로 사느니 난 지옥에서 영원히 왕으로 살겠노라” 짐승이 하는 첫 번째 일은 이처럼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 다른 신을 대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하는 두 번째 일은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7절. 그는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깁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민족을 통치하는 권세자가 됩니다. 성도들은 짐승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좋겠지만 오히려 그 밑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지만 짐승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아닙니다. 8절을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합니다. 경배하는 자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이 땅에서의 삶만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짐승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어야 합니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입니다. 많은 땅의 사람들이 짐승에게 경배하지만 이름이 그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경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공포의 통치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갑니다. 그러면 사로잡히기도 하고 칼에 죽기도 합니다. 평안과 유익만 얻는 게 아닙니다. 손해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II. 두 번째 짐승(11-18)
11절.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옵니다. 그 모습이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고 말합니다. 계시록에서 땅과 하늘은 대조적인 개념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무저갱이 열리고 땅에서 올라오고 하는 땅과 관련된 표현들은 하늘과 관련된 표현과 대조되어 그들의 정체성이 지속적으로 하늘을 대적하는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 뿔을 가진 짐승은 단8:3에 나옵니다. 거기서는 두 뿔을 가진 염소로 나오는데 당시 바벨론을 제치고 중동지역 패권을 차지할 메데와 바사 제국을 의미하였습니다. 본문의 짐승도 세상 패권을 차지할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처럼 두 뿔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어린 양을 생각나게 하는 모습인 것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열 뿔을 가진 용과 첫 번째 짐승에 비해서 뿔이 두 개만 있으니 좀 아래에 있는 종속적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용처럼 말을 한다는 것은 용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생각하고 결정하는 능력이 있으며 하나님을 비방하는 말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2절. 그는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따라 행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땅과 땅에 사는 자들로 하여금 첫 번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는 일입니다. 앞에서도 여러 번 나왔지만 짐승에게의 경배는 땅에 사는 자들이 하는 것이지 하늘에 사는 자들, 곧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용이 경배 받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권세자는 용이고 그가 자기를 비롯한 두 짐승을 관할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하는데 아마도 이 점이 사탄이 세상을 미혹하는 그만의 놀라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용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가 전면에 경배 받을 대상으로 등장하면 오히려 거부반응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치 대통령이 이미지 때문에 자기를 대신해서 또 다른 실세를 세우는 것처럼 그런 일을 합니다. 경배 받을 첫 번째 짐승을 묘사하면서 앞에 나왔던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라는 말을 또 합니다. 그 한 가지 능력에 모든 사람들이 집중하게 만들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을 그 두 번째 짐승은 합니다. 굉장히 정치적인 짐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의 이미지가 안 좋을 때 한 가지 업적에 대해서 선전을 하고 거기에 정신을 팔리게 해서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선전 선동 효과를 그는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3절을 보면 큰 이적을 행합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합니다. 이는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을 모방하는 일입니다. 14절에서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라는 말은 ‘첫 번째 짐승을 대신하여 이적을 행하므로’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 미혹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거하는 자들이 미혹을 당합니다. 그 짐승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을 우상 숭배하도록 독촉합니다. 

다시 조금 떨어져서 본문의 그림을 바라봅시다. 용이 지금까지 온갖 핍박과 박해로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제 그가 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교회와 전면전을 자신이 직접 치르기보다 우상을 숭배하도록 짐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끔 만듭니다. 

15절. 그가 권세를 위임받아 우상에게 생기를 주었고 그 짐승의 우상에게 말을 하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우상은 금, 은, 동, 목석이며 사람이 만든 것이며 말하거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생기가 들어가 살아나 말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우상이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살아서 관계하는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 명이든지 다 죽이게 하였습니다. 마치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 풀무불에 집어던져 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막강한 권세와 위협 앞에서 누가 짐승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확실하게 공포정치의 틀을 세워 놓고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제재 조치를 발표합니다. 16절.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지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였습니다. 삼십년 전에 쓰던 회수권이 기억나십니까? 그 표가 없으면 버스를 탈 수 없었습니다. 돈 갖고 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시절 집집마다 ‘딸론’이란 것을 배부했습니다. 이는 배급표인데 저도 유학시절에 이것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거기엔 우유 한통, 소시지 열 개, 치즈 100그람 등등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돈이 있다고 식료품을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과 이 배급표를 갖고 가야 살 수 있었습니다. 돈이 떨어져도 못 사지만 이 배급표가 떨어져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배급표가 암암리에 매매되곤 했습니다. 식료품을 마음대로 살 수 없었을 때의 그 갑갑함과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많은 돈을 지불하고 외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고급 시장에 가서 살 수도 있었기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제제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생존에 위협을 받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도 좋지만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앞서 들 것입니다. 북한이 엄격한 통제사회에서도 서민들이 그나마 살 수 있는 것은 물건을 매매할 수 있는 장마당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마저 없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자도 소용이 없고 자유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크고 능력이 출중한 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표를 오른 손이나 이마에 받게 한다고 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이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표를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7장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마에 인을 맞았습니다. 표도 공동번역으로 보면 ‘낙인’입니다. 같은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낙인이냐 짐승이 주는 낙인이냐가 다른 것입니다. 이마에 찍는다는 것이 찍는 사람의 소유물이라는 표시라고 배웠습니다. 이 표를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게 한다는 것은 표를 찍어주는 짐승에게 속한 것이고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함을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 경제활동을 하고 생존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2장에 나왔던 버가모와 두아디라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니골라와 이세벨을 용납했던 것 이면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현실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령 길드라는 조합형식으로 경제 시스템이 움직이는데 한 조합이 한 우상을 섬기는데 그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는 그 조합에 들어올 수 없고 그러면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에 출교를 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이는 사형선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일제 강점기 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교회를 존속시킬 수 없었던 그 현실에 많은 교역자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이 표를 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회사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물어본다고 합니다. 술을 잘 마시는지, 술을 마시지 않을 거면 이 회사에 들어오지 말라고, 접대가 많은데 할 것이냐고 피할 거면 다른 회사 알아보라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곳도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신앙양심을 잠시 팔 것인지 신앙양심을 위해 생존조차 포기할 것인지 우리는 숱한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이 보았던 당시 시대 상황이었고 지금도 여전한 종말의 현상입니다. 

17절을 보면 짐승에게 머리를 숙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 표 없이는 매매를 못하는데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말합니다. 이는 표가 단순한 배급표가 아니라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숫자를 나타내는 표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8절을 보면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며 그것은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수라는 것은 하나님의 수에 근접하지만 하나님께 다다를 수 없는 가장 불안전한 수라는 얘기입니다. 777에 가장 근접하지만 결코 777이 되지 않는 수입니다. 

당시 이름은 숫자로 표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a=1, b=2 이런 식으로 히브리 알파벳마다 고유의 숫자가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이런 식으로 제 이름을 계산한다면 s=19, p=16, u=21, r=18, g=7, e=5, o=15, n=14 이고 도합 115입니다. 엉터리 조합이지만 예를 들면 제 수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당시 네로 황제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을 해서 숫자로 치환을 하면 666이 나온다고 합니다. 곧 이는 네로의 출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가장 황제숭배를 강요했던 네로와 같은 인물로 천하가 움직여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황제 숭배를 하지 않으면 경제활동, 사회활동에 제약이 따랐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는 다신론의 사회였습니다. 로마제국이 다스리는 많은 나라에서 그 나라의 신을 섬기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허용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어떠한 신도 인정하지를 않았습니다. 황제를 숭배하면 신앙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 기독교는 결코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이루어놓은 훌륭한 법과 질서 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제숭배 때문에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이 시대는 어떠합니까? 황제숭배는 없습니다. 그러나 황제숭배와 버금가는 맘몬이 있습니다. 물질을 숭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갑니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 회사는 연봉이 얼마예요? 노후자금은 얼마나 모아 두셨어요? 자녀학비는 어떻게 해결하세요? 그 일 한다고 돈이 나오나요 떡이 나오나요? 돈으로 가치를 매기고 돈이 선악과 행불행의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돈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회에서 출교를 당하는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를 거슬러야 하겠습니다. 우리 앞에 짐승이 세워둔 맘몬 신상을 부셔야 하겠습니다. 그 배후에는 용이 세상을 삼키고자 새로운 지혜와 전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간파하고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경배하지 않으면 죽음이 온다 해도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믿고 하나님만 경배하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