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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호세아 특공대 3강 (호세아 6:4-14)2017-03-14 08: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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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호세아 특공대 3강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말씀 / 호세아 6:4-14
요절 /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처럼 생활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아는 것처럼 생각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잘 몰랐고 뻔뻔했고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파멸을 자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떤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까?  

4절을 보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로 시작합니다. 이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들과 관계를 회복시킬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려도 봤고 얼러도 봤고 그 길을 막기도 해봤고 속전을 주며 데려와서 타이르기도 했지만 어떤 방법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아침 구름처럼, 이슬처럼 잠깐만 있다가 없어졌습니다. 허니문을 다녀 온 다음에 금방 갱년기에 들어간 것처럼 남편 되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 심판의 말로 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제사와 번제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외적 종교생활은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반찬도 해주고 와이셔츠도 다려놓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다리를 걸치는 생활을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해 하는 짓이었습니다. 인간 남편은 그런 아내의 마음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르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인애가 빠져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마음이 빠지면 상대방이 눈치를 채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받기 원하시는 것은 인애,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뭐가 부족하다고 제물을 원하시겠으며 뭐가 고프시다고 번제를 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하나님의 백성이 인애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마9:1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12:7)” 인애가 빠진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을 알고 섬겨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섬기는 것은 오히려 분노를 부를 수 있습니다. 모른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며 안다는 것이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더 마음을 드리고 그를 집중해서 바라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들은 그것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삶입니까? 

7-11절을 보십시오. 아담처럼 언약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살아가는 길르앗 지역은 서로간의 싸움으로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세겜은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자자들이 용서를 받는 곳인데 여기서 일하는 제사장들이 인애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대하기보다 오히려 살인을 하고 강도짓을 행하였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애의 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7:1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능하면 그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고자하셨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하려고 매스를 들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의사가 치료하고자 할 때 자신이 알던 것보다 상태가 더 심각한 것과 같습니다. 상처가 나서 소독약을 바르고 거즈를 붙이려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은 수 십 바늘로도 꿰맬 수 없고 상처와 염증이 너무 깊어 잘라내야 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치료하려고 들여다보니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납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서 온갖 악이 다 튀어나오는 것처럼 그들에게서 온갖 악들이 다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문제가 없는 것처럼 거짓되게 행했고 뒤로는 떼 지어 노략질하는 도둑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악을 다 아셨습니다. 마음의 중심과 폐부를 시험하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아시든지 모르시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고 그들의 악이 그들을 에워쌀 정도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이 뻔뻔하게 굴었습니다. 마치 고멜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서도 호세아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아니 알아도 뭘 어떻게 하랴 하는 마음으로 다른 남자를 집에 들이며 남편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4절을 보면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이 행하는 그들은 간음자들입니다. 본문은 그들을 ‘달궈진 화덕’으로 비유합니다. 화덕은 과자를 구워내야 하기에 늘 불을 지피고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반죽이 발효되는 기간에만 불이 훨훨 타오르지 않을 뿐이지 나머지 시간에는 계속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는 음란함으로 온 몸이 계속 뜨거워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불이 타오르지 않을 때도 더 잘 타오르고자 워밍업을 하는 기간이지 결코 타오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화덕을 겉으로 볼 때는 불을 때우나 안 때우나, 뜨거운지 안 뜨거운지 잘 표시가 안 납니다. 그러나 반죽을 집어넣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적당한 대상만 만나면 그 달궈진 화덕으로서의 역할을 해냅니다. 그들은 달궈진 화덕으로서 왕들과 지도자들과 재판장들을 다 삼켰습니다. 그 음란함으로 모든 나라가 죄악의 과자만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음란과 우상숭배로 20년간 6명의 왕이 등극하고 4명의 왕들이 암살을 당하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시기를 묘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두들 달궈진 화덕으로서 나라가 자멸을 하는데도 그들 중에는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7절에서 말씀합니다. 음란한 죄악도 문제이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고통하면서도 하나님에게 부르짖지 않는 교만함이 더 문제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그들은 뒤집지 않은 전병과도 같다고 또 다른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면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 혼합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민을 가서 흩어져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방민족들과 종교, 사상, 가치관, 문화 등을 뒤섞어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그들이 섬기는 우상,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상대주의자, 다원주의자가 되어 산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잘 생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교만한 삶이요 뒤집지 않은 전병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십니다. 전병은 수시로 뒤집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는 설익고 아래는 타버려서 먹지 못하는 쓰레기가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위를 보며 괜찮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위가 아직 익을 생각을 안 하니 아래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아래는 다 익고 바짝 마르고 마침내 눌러 붙어서 타는 상태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릅니다. 여전히 나라는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는 9절처럼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힘을 삼켰습니다. 마치 격투기 선수가 상대방에게 암바를 걸어 관절을 꺾어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태로 만든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소생할 수 없을 것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백발이 무성하여 내일이나 모레 죽을 터인데도 자기가 아직도 10여년은 더 살 것처럼 으스대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참으로 교만하다고 말합니다. 10절에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다고 하십니다.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어서 버려질 것인데도 하나님께 돌아오거나 구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만하면서도 어리석은데 그것이 비둘기 같다고 하십니다.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멍청한 새의 대표입니다. 비둘기는 천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장소에 또 날아가고 거기에 또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 길은 피해야 하는데 안 피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멍청한 새입니까? 이스라엘이 그와 같습니다.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날아가고 앗수르로 날아갑니다. 그 두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이며 도와줄 것처럼 하다가 이용만 한 나라들입니다. 그들을 의지하는 것은 화약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짓을 합니다. 그들이 그리로 갈 때에 하나님이 쳐 놓으신 그물에 걸릴 것입니다. 그 그물이 그들을 떨어뜨리고 징계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상하셨습니다. 13절 하반절을 보면 그들을 건져 주려 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거슬러 거짓을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괜찮다며 다른 사람이나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14절을 보면 성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침상에서는 슬피 부르짖습니다. 이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고통에 슬퍼하면서도 하나님에게 구원과 회복을 위해 회개의 부르짖음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교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눈물이 많지만 자기연민의 눈물이지 회개의 눈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입니다. 그렇게 울다가도 먹을 것이 있다, 유익할 것이 있다고 하면 금방 그 주위에 몰려드는 비둘기처럼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당장의 유익이 아니라 근본적인 회복이 문제인데 당장의 상황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그들이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강대국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금 여로보암 2세 시기에도 경제적으로는 부강한 편입니다. 일방적으로 도와주셨는데 그렇게 해서 힘을 얻은 다음에는 키워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추위에 떠는 길냥이를 데려다가 생선을 먹이고 기력을 회복시켜줬더니만 집안의 물건들을 긁어놓고 아무데나 배설하고 주인을 할큅니다. 은혜를 악으로 갚는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16절입니다. 그들은 돌아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삶의 방향을 바꾸긴 합니다. 그런데 높으신 자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속이는 활과 같다는 것은 처음에는 과녁을 맞힐 것 같다가 실제로는 안 맞히고 다른 데로 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께로 돌아올 시늉을 해서, ‘아 이번엔 하나님께로 제대로 돌아오려나 보다’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고멜이 호세아 앞에서 눈물을 흘리니까 ‘이젠 남편에게 돌아오겠구나’ 했는데 그 다음날 쌩 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되게 행하니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자신이 피해를 볼 것입니다. 자업자득이라고 자기가 뿌린 죄의 열매를 자신이 거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방 땅에서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애굽 땅에서 조차 조롱거리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도 조롱하는 자들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그들을 내버려두실 수 있습니까? 8장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내 언약을 어기고 내 율법을 범하는 그들을 이방군대가 독수리처럼 덮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또 그런 식으로 나옵니다. 2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참으로 교활합니다. 살만하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 못 벗어날 것 같으면 의지하는 것처럼 아양을 떱니다. “우리가 하나님 잘 알아요. 하나님은 인애가 크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어떻게 그 백성들을 모른 척 하시겠어요? 하나님, 우리 도와주실 거죠?” 이렇게 말합니다. 앞의 6:1-3에서도 봤지만, 말로는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용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우리는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그들은 하나님을 입의 말로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삶과 그 중심을 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3절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하는 말을 갖고 결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선을 버렸는가 붙들었는가 하는 것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선은 하나님이면서도 앞에서 강조한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인애를 버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의 품격에 맞습니다. 그들은 원수의 추격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왕을 세우고 지도자를 세웠지만 어디 한 번이라도 하나님에게 묻고 세운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드린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이나 만들었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향하여 타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들은 지금까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한 삶, 무익하고 헛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방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도 즐겨 쓰지 않는 그릇처럼 찬 밥 대우 받는 버려진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들나귀처럼 앗수르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고 비싼 선물을 주고 친구들을 얻으려 하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쇠해질 것입니다. 

그들이 제단을 많이 만들고 제사를 많이 드린 것이 무엇이 유익합니까? 제사는 죄를 가중시키는 도구였고 오히려 만 가지로 기록된 율법을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이 돌아갈 곳은 애굽입니다. 애굽으로부터 탈출하여 해방을 얻은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모든 축복과 은혜가 걷어지고 죄와 사망 권세에 다시 사로잡혀간다면 이것보다 더 저주스런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치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그 누웠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한 것입니까? 그들이 스스로 파멸을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까? 달궈진 화덕처럼 언제든지 음란한 죄의 과자를 구워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내가 곧 죽는 줄도 모르고 비둘기처럼 나를 구원하지 못할 곳으로 가지는 않습니까? 슬피 울지만 내 신세 한탄만 하지 회개의 눈물은 말라있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내가 왜 고통하며 쇠잔해지며 왜 버림을 받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른 채 계속 제물 드리는 일, 외적 종교 생활에만 몰두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안다고 말만 하지 말고 실제로 인애를 배우고 실천하며, 하나님을 알고 그가 기뻐하시는 뜻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