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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호세아 특공대 5강 (호세아 11:1-14:9)2017-03-14 08: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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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호세아 특공대 5강

이슬 같으신 하나님

말씀 / 호세아 11:1-14:9
요절 / 호세아 14: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하나님은 멀어져만 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의 공통점은 ‘Return to me’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11-14장도 내게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왜 안 돌아옵니까? 돌아온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그때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1:1,2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부르듯 불러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를수록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였습니다.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습니다.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 싫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앗수르 사람을 왕으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5).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으면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왕으로 모시는 구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왕은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왕입니다. 그런 왕 아래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결심하고 하나님에게서 물러갑니다. 위에 계신 이에게도 돌아오라고 소리쳐도 그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자가 하나 없습니다(7). 

그들이 왜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을 섬겨봤자 하나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잘 사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 유익이 없으니 아무리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더 크게 부르면 더 멀리 물러갑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예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늘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깁니다. 

이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분노가 아니라 긍휼입니다. 8절을 보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는 짓이 너무 어린애 같을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솟구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참 좋겠는데 찾지를 않습니다. 
12:1절입니다. 에브라임은 종일토록 헛수고만 합니다. 그 헛수고가 무엇이냐 하면 앗수르와 계약을 하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강대국들에게 잘 봐달라고 조공을 바치고 굴욕적인 외교협약을 맺는 것입니다. 삶이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힘 있는 자들을 찾아다닙니다. 이것은 바람을 먹고 동풍을 따라다니는 심히 헛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옛날 그들의 조상인 야곱이 어떻게 했는지를 말하십니다. 야곱은 모태에서부터 그의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을 이겨먹으려고 거짓을 일삼던 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하나님과 겨루고 천사와 겨루며 울며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축복을 쟁취하는 자에서 축복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로 변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자신의 하나님을 만난 곳이었습니다. 
이 야곱과 지금 너희들을 비교해보라는 것입니다. 야곱도 변화되었는데 왜 너희들은 하나님에게 나아와 부르짖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벧엘이 우상을 숭배하는 악의 진원지가 되도록 해야 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하나님을 항상 바라야 합니다. 

이렇게 변화되어야 할 그들이 다르게 변하였습니다. 7절을 보면 그는 상인이라고 말합니다. 상인이란 말은 원어로 ‘가나안인’이란 말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상업을 해서 먹고살았기에 가나안인은 곧 상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사람이 다 되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입니다. 가끔 주유소 중에서도 가짜 휘발유를 섞어서 판매를 하거나 주유미터기 눈금을 조작하거나 처음엔 정식으로 가격이 올라가다가 중간에 몇 단계 뛰는 식으로 가격이 올라가도록 조작도 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들이 꼭 그런 식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낼 자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매우 뻔뻔스러워졌습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인애와 공의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불의합니다(11). 형을 속이고 밧단아람으로 도망치고 아내를 얻기 위해 20년을 수고하던 야곱은 볼품이 없었습니다. 이런 조상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들이 하는 짓은 너무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격노케 하였습니다. 

이전에 이스라엘이 말을 하면 주변 민족들이 떨던 시대가 있었습니다(13:1). 그렇게 하나님이 높여주셨는데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우상을 섬기더니만 멸망을 자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더니 배가 불렀고 마음이 교만해져서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잊었습니다(6). 먹고 살만하니까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생존문제를 책임져주는 데 이용되는 신이지 온 마음을 다해 경배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9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패망합니까?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라”고 말합니다.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적과 아군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적군으로 생각하고 앗수르를 아군으로 착각하는데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눈에 보이는 왕, 열강들의 왕처럼 힘 있는 왕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까지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구원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파멸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은 그들의 죄가 큽니다. 하나님은 이 죄를 봉함하고 저장하여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하십니다(12). 마지막 날에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14장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남편이 아내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에서 ‘께로’에 쓰인 전치사는 단순히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가 아니라 ‘귀착점, 목적지’를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돌아와야 할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방향을 전환하는 일은 많이 했습니다. 애굽이 아닌가보다 하면 앗수르로 갔고 앗수르도 아닌가보다 하면 아람으로 갔습니다. 매를 맞으면 슬피 울었고 진노를 피하고자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로 하나님을 삼지는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전혀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되 말씀을 가지고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를 제거해주시도록 간구하며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입술의 열매입니다.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나 감정적 변화가 아닙니다. 죄의 펙트를 드러내어 그것을 청산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3절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앙망하기보다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한 것이 가장 큰 죄였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보다 더 실질적으로 의지한 돈과 직장과 학벌과 성공주의 등을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회개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말을 타지 않겠노라고 말합니다. 말은 국력의 상징입니다. 전쟁 시 가장 필요한 군용물품이 말이었습니다. 말이 싸움의 승패를 가름할 때가 많았기에 이스라엘은 애굽으로부터 꾸준히 말을 수입하였습니다. 말을 타지 않겠다는 것은 성공을 위한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 자기들 손으로 만든 것들을 향해 신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원하는 바를 신에게 투영하여 마치 그것이 신의 뜻인 것처럼 해서 소원성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의지할만한 대상들을 버리고, 인간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지 않고, 나의 소원을 과감히 내려놓는 데서 회개가 시작되는 것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겠다고 하십니다.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겠다고 하십니다. 나의 진노가 이미 그에게서 떠났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공급자가 되십니다. 5절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물이 부족한 광야에서 이슬은 가장 소중한 영양의 공급원이었습니다. 황량한 사막 한 복판에서도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는 것은 이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슬이 되시면 그들은 백합화 같이 피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장 크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이고 뿌리 깊은 거목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가지는 사방으로 퍼지고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을 것입니다. 너무나 아름다고 향기로운 존재가 되고 그 그늘 아래에 많은 자들이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그들은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 것입니다. 

호세아는 마지막으로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파멸의 원인이 하나님을 떠난 것 때문이며 그들의 구원과 회복이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누가 이를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를 아는 것이 지혜요 총명이라고 말합니다. 

결론입니다. 이스라엘만 아니라 모든 인생들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요 그의 사랑을 외면하고 멀리멀리 물러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천국을 소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믿고 잘 된 일이 별로 없다고 속삭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고 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인간적인 수단들을 동원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인애와 공의를 배우는 백성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셔서 우리가 백합화처럼 레바논 백향목처럼 된다고 하십니다. 세상으로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돌리고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