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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종로관악 새봄맞이 수양회 주제1강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2019-02-24 23: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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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종로관악 새봄맞이 수양회 주제1강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말씀/빌립보서 2: 1-11
요절/빌립보서 2: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 교회는 다들 예수님을 사랑하고, 열심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못하고 삐끄덕 삐끄덕 거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한 마음 한 뜻 한 spirit이 되는 법에 대해 알려 주고자 합니다. 저희들이 오늘말씀을 통해서 하나됨의 비밀을 배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다 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여기서 ‘있거든’은 조건문이 아니라 ‘있지 않느냐!’ 라는 확증의 의미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뜨거운 구원의 은혜와 성령안에서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만나서 기도하고 양식모임을 이루며, 매주 한번은 팀별로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둘, 셋씩 짝을 지어 빌립보 대학에 전도를 나갔습니다. 동역자들끼리의 사랑의 교제도 아름답게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아프다고 하면, 죽을 비롯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엄마나 아파서 자녀들을 돌보기 어려울 때는 그 집 자녀들을 여러 사람들이 찾아가서 자기 자녀들처럼 돌보아 주기도 했습니다. 돈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은밀히 장학금을 내놓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던 바울을 돕기 위해서 희생적으로 물질을 내놓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들을 칭찬하면서, 그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되도록 권면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개인적으로는 다들 신앙이 훌륭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체로서 하나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개인간에, 그룹간에 의견 차이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4장 2절을 보면, 빌립보 교회의 개척 멤버요 기둥들이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도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same mind, same love, same will, 즉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으로 one spirit이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같은 사랑으로 구원받은 한 형제자매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한 가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몸을 이루어 가는 한 몸 공동체요, 예수님 한분을 배우며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한 뜻을 위해 부름받은 신앙의 동지들입니다. 이러한 우리 성도들이 각자 가진 아름다운 모습들로 서로 사랑하며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 될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되는 것이 좋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이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LA에 있는 한 한인교회에서는 주일예배 후에 식사 서빙을 샌드위치로 할 것인가? 밥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투다가 교회가 분열되었다고 합니다.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룬 부부가 있었는데, 신혼 때 치약을 위에서부터 짜는가? 아래서부터 짜는가? 하는 문제로 싸우다가 이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서로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절대성을 상실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개인의 주장과 개성을 중시하는 오늘날 서로 마음을 합하여 하나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많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음, 한 사랑, 한 뜻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서로 하나되지 못하고 다투는 것 만큼 속상한 것도 없습니다. 교회안에 성도들이 갈등할 때 하나님의 마음도 참으로 속상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들임에도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같이 3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 안에는 그들이 하나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툼과 허영이었습니다. 다툼과 허영을 영어 성경에서는 각각 selfish ambition, vain glory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Selfish ambition이란 바울처럼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죽든지 살든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욕망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일인자가 되어 주변 모든 사람들을 다 자기 영향력 아래에 두고, 자기의 이기적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 먹고자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하면, 분노를 표출하거나, ‘내가 누군지 보여주겠다’라는 마음을 품고 칼을 갈게 됩니다.


  Vain glory란 헛된 영광, 허영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이 역시 교만한 마음입니다. 허영은 구체적으로 대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아니,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선배대접을 하지 않는 거지?” “아니, 내가 이 정도의 대접받게 못 받을 사람이야?” 허영이 많은 사람은 작은 말과 행동 하나에도 상처를 입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자신의 일이나 어려움에 관심을 받지 못하면, 교회가 사랑이 없다며 투덜거립니다. 이렇게 이기적인 야심이나 교만, 자기 중심적인 허영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서로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 다툼이 일어나 결국 그리스도의 피로 산 교회 공동체가 사분오열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가 하나가 되게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다 같이 3b절, ‘오직’부터를 한 목소리 읽겠습니다. 시작.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툼이나 허영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패밀리 레스토랑의 직원처럼 무릎을 낮추고 주문을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90도 각도로 반듯하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까? 겸손이란 이런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겸손이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비록 단점과 허물이 있지만, 자신과는 스타일이 맞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같이 합력하는 동역자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남을 낫게 (better)하게 여기는 것보다 낮게(low) 여기는 것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남들과 자신을 비교할 때, 자신의 가장 잘난 장점과 다른 사람의 단점을 비교한다고 합니다. 키가 크신 김여호수아 목자님이 저를 보고, ‘피터 목자는 키가 작잖아!’ 해버리면 게임 끝입니다. 우리는 항상 남과 비교해서 남보다 앞서길 원하며 그걸 통해 우리의 교만과 허영을 살찌웁니다.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면 쾌감이 매우 큽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상대방보다 낫다고 착각합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음치인 저는 천상의 목소리로 주일예배 특송을 섬겨 주시는 목자님들을 존경합니다. 다른 목자님들이 저보다 말씀을 더 잘 전해도, 그 분의 메시지를 통해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같이 기뻐하며 그 분을 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제 아들은 말을 잘 안듣고 부지런하지가 못합니다. 그래도 저와는 달리 노래도 잘 부르고, 루빅스 큐브도 맞출 줄 압니다.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면, 다들 귀한 은사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동역자들을 높이고 귀하게 여겨야 교회에 기쁨이 넘치고 살맛이 납니다.  


  둘째, 한 마음 한 뜻을 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 같이 4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먼저 자기 일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 일이란 열심히 일을 해서 가정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영적으로 가정을 잘 돌보는 등 기본적인 의무를 잘 이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교회에서 자신이 해야 할 직무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진심과 노력을 다해 말씀공부를 준비해서 양을 먹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센터 청소, EBF, JBF, 각종 서빙, 대표기도, 싱 얼롱 인도, 주일예배 ppt 등등 주님이 맡기신 일을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장막에 사는 형제, 자매님들은 자신의 청소담당, 빨래, 서빙 등을 잊어버려서 다른 형제, 자매들을 굶게 하거나 힘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다툼이나 분쟁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만과 허영이 있을 때,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무조건 더 큰 것만을 얻으려 합니다. 영적 역량을 키우지도 않고, 예수님의 내면성과 섬김은 배우려 하지 않으면서, ‘왜 나를 이정도 밖에 대우해 주지 않지?’ ‘자기가 뭔 데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하며 쓴 뿌리를 품습니다. 이런 교만과 허영이 실생활에도 영향을 끼쳐서 자신을 객관적 평가보다 높게 생각하게 합니다. 교만과 허영이 허황된 욕심으로 자라서 노력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벌고, 쉽게, 쉽게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우리가 먼저 가정과 교회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자기의 일을 돌보는 것은 기본이요,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봐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기의 일은 잘 돌봅니다. 자기 일은 잘 챙긴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삼시 세끼를 꼭 챙겨 먹습니다. 고혈압 약도 잘 챙겨 먹고, 운동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나 정보는 알아서 잘 챙깁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의 일은 또 잘 돌아봅니다. 하지만, 교회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모릅니다. 장막에 쓰레기가 넘치던지, 센터의 어디가 고장 나던지 간에 당장 자신에게 불편함이 없으면 무관심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중요한 기도 제목이 있어도 무감각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이 속한 요회에 대해서는 그나마 관심이 있지만, 다른 요회의 양들이 누가 누가 있는지, 어떤 기도 제목이 있는지 모른 체 무관심하기도 합니다. 대학생 선교가 어려운 이 때에, 마음속으로 아예 대학생 선교를 체념한 분들도 계십니다. 이 분들은 선교 사명은 뒤로 한 체, 자신의 직장이나 세상에서 인정받으려 합니다. 교수 목자들은 좋은 논문을 쓰려고 하고, 직장인분들은 승진에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립니다. 우리는 자기의 일을 잘 돌보아야 하지만, 더 나아가 주변의 필요와 교회의 기도제목과 복음사역에 우리의 마음과 시간,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볼 때,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해 보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습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런 우리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다 같이 5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여기서 품는 것은 일회성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한번 묵상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실생활에서 계속해서 묵상하고 적용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를 판단하고 무시하고 싶은 그 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누가 아주 미워 보일 때 그분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축구선수 손흥민에게는 손흥민 존이 있다고 합니다. 그 위치에서 계속해서 수천번 수만번 공을 차는 것을 연습했기 때문에, 손흥민 존에서는 공이 들어갈 확률이 매우 높아진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을 매일 연습할 때,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심장 이식 수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이식 수술도 있는 것입니다. 매일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그 분의 겸손을 배워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겸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6-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물질세계 뿐만 아니라 천사들과 같은 영적인 존재들과 하나님 나라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 광활한 우주의 크기와 그 속의 물질과 에너지들, 이 우주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들이 감히 보기를 원하는 물리법칙들과 수학법칙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무에서 공간과 물질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구를 뒤덮고 있는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70억명의 인간을 한 사람 한 사람 one-to-one으로 섬기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나는 새들, 산과 들의 짐승들, 심해의 물고기를 돌보십니다. 예수님은 알파이시며, 오메가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2000년전에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 땅으로 수직 낙하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이 있는 사람은 겸손할 것이 아니라 위세를 부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한 것을 자랑하고, 잘생긴 사람은 잘난 척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국경을 건널 때, 미국 경찰들이 얼마나 사람을 무시하고 잘난 척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장에서 보면, 작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으로 얼마나 위세를 부립니까? 그렇습니다! 권력이 있으면 막 부리고, 돈이 있으면 돈 자랑하고, 잘난 점이 있으면 잘난 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요,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NIV의 해당구절을  직역하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종이 보여야 할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밥을 먹는 서민 코스프레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재해가 일어난 자신의 지역구에 나타나 사진 한 장 찍고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이런 보여주기 식의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낮아지심을 어떻게 비유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은 위험에 처한 개미들에게 이를 알려주기 위해 인간이 개미가 된 비유를 하기도 합니다. 한 목자님은 육군참모총장이 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예수님이라면, 그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는 것은, 이미 그 영광이 얼마나 큰 줄 잘 알기 때문에, 너무나 큰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려 놓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가정을 택하시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말구유에 누여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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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왜 이렇게 겸손을 드러내신 것입니까? 사실 겸손은 혼자 있을 때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거울을 보고, “저는 참 겸손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겸손은 그 겸손의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 상대방을 위해서 겸손하는 것입니다. 목자님들이 학생들에게 간과 쓸개를 다 내주고, 겸손하는 것은 섬기는 그 학생을 위해서 입니다. 그 학생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 낮아지는 것입니다.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많이 맞은 한 형제님이 어떤 자매 목자님과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 형제는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그 자매 목자님께서 매우 버릇없고, 화가 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저는 옆에서 이를 보면서, 제가 다 화가 났습니다. 나중에 그 형제가 예수님을 믿게 되어, 그 자매목자님께 찾아와 자신을 감당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와! 겸손이 생명의 길이구나! 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다혈질의 형제처럼 예수님의 겸손의 이득을 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인간이 되는 겸손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죄사함과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겸손은 단순히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자기의 목숨을 희생을 하셨습니다. 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이심이라.”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를 위해 모욕과 오해를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언제 제일 억울합니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아닌데, 자신이 그 잘못을 저질렀다고 누명을 쓸 때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면, 우리는 대자보를 붙이던지, SNS나 청와대 게시판에 ‘저의 피눈물 나는 억울함을 풀어주세요!”하는 글을 올릴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누명을 받은 것이 억울해서 자살로 무죄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한 것은 결코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억울하게 십자가 형을 판결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조용히, 온순하게 종교지도자들과 군병들의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인데, 죄인 중에 괴수 취급을 받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도리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할 말이 있지만, 능력이 있지만, 말하지 않으시고,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고 뺨을 맞고, 채찍을 맞고, 조롱을 당했습니다. 분노하거나 화를 내시거나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이며, 이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겸손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 같이 9-11절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겸손에 크게 기뻐하시고, 또한 감사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이나 낙원에 있는 영원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심판 받을 악한 영혼들까지도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겸손한 복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또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이것이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제자들 중 넘버원이 되고 싶었던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교만한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낮아지고, 섬기는 것은 고통이 수반됩니다. 솔직히 비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왜 내가 먼저? 언제까지 겸손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때가 될 때, 겸손한 여러분들일 높이실 것입니다. 


  저는 1978년 부산 해운대에서 1남2녀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남보다 우월하고 싶어했습니다. 유치원때부터 태권도를 배워서 동네의 아이들을 때려서 공공의 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때부터 이미 자신이 선생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저는 한민족이 고대중국의 주인이었다는 환단고기 같은 엉터리 역사서나 증산도 계열의 책들을 읽으면서 허무맹랑한 세계속에서 빠져 지냈습니다. 저는 백인중심의 시대는 가고, 앞으로 다가올 아시아 중심의 세계, 특히 아시아를 대표할, 한국을 대표할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높았던 저는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며 하나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 제 주변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1997년 서울대 면접을 볼 때였습니다. 면접관 교수님은 제가 어느 대학에 또 지원했는지 물으셨습니다. 저는 포항공대에 지원했다고 하자, 교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자네는 성적이 좋아서 서울대와 포항공대 둘 다 합격할 것 같은데, 어디에 갈 건가?” 당시 포항공대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저는, “매너리즘에 빠진 서울대보다 포항공대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황하신 교수님은, 합격해도 오지 않을 테니 떨어뜨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수학에서 200% 가중치를 부여한 포항공대에도 떨어지고 낙동강 오리신세가 되었습니다.


  재수를 거쳐 서울대에 들어간 저는, 유비에프 목자님을 만나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종교에 이미 득도를 했다고 생각을 했던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할 때 주로 졸거나 깨어 있으면 헛소리를 했습니다. 한편, 의로운 삶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동경이 있었던 저는 운동권 동아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거리를 두려고 했었지만, 저는 어느 순간 철거촌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한 여학생을 짝사랑하다가 거절을 당하고, 저는 폐인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수업만 겨우 듣고, 자취방이 있는 녹두로 내려가 만화를 보거나 비디오방에서 성인영화를 보며 저는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입안이 헐고 목과 정강이에 손바닥한만 신경성 피부병이 생기었습니다. 간지러워서 손으로 벅벅 긁어서 피가 났습니다.


  제가 이렇게 폐인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책을 세권 읽고 3개의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대일 목자님인 진재키 목자님께 연락을 해서 과제를 대신 해 달라고 염치없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자님은 이런 저의 부탁을 겸손히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쁘신 중에서도 두 개의 리포트를 써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만하게 두개만 써 주었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해서, 저는 유비에프 예배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장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두통에 시달리는 와중에 여름 수양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거운 마음에 말씀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같이 장막생활을 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소감을 재미있게 써서 단상에 올라가 발표를 하자 사람들이 엄청 웃었습니다. 저는 “나는 저것보다 저 재미있게 쓰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다음날 모든 종교의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했던 저의 과거와 이제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믿겠다는 결단의 소감을 써서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감 이 후에 저에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신앙생활을 계속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간절했던 어느 날, 누가복음 24장 34절 말씀이 제 맘속에 들어왔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는 예수님을 부처보다 한참 아래로 보고, 무시하던 자였습니다. 사실 저보다 아래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면, 달마도 부활했다고 맞받아 치며 비웃었습니다. 이런 저의 죄를 무지의 중의 잘못으로 여겨 주시고, 변호해 주시는 예수님의 겸손의 사랑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덧입고 하나되는 생활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원래 너무 교만해서 사람들과 하나될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때 한번은 어떤 급우가 절 보며, 비웃지 말라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동생이 수학 문제를 물어보면, “넌 어떻게 이것도 모르냐?” 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제가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었을 때, 장막에 들어가 다양한 성격의 믿음의 형제들과 하나되고 아름다운 영적 가족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에 선교사로 나가서는 저보다 10살이나 어린 사무엘 형제님을 친구로 삼아 그가 목자가 되기까지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영어를 못해서 말도 안 통했습니다. 학교에서 피싱하면 처음 만났는데, 성경을 공부할 생각이 있습니까?를 영어로 묻자 그는 Yes!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문장만 외워왔고, 그 다음 문장은 준비해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섬겼을 때, 우리는 친 혈육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를 제 아들처럼 사랑하고, 그 역사 저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따르는 저의 영적 제자가 되었습니다.


  한 형제 선교사님은 정신적으로 매우 연약했습니다. 돈 벌 생각도 하지 않고, 아내에게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인간취급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십자가에 낮아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분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자 우리 둘 사이가 편하게 되었습니다.

  3년전 캐나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포닥 생활을 거쳐 하나님의 은혜로 울산에 있는 유니스트 교수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은 그렇게 밝지 만은 않았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 나와있었던 우리 가정이 관악3부에 잘 적응하여 관악3부 목자님들과 하나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만큼 하나님의 축복과 여러 목자님들의 섬김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돌아올 당시에 저의 마음은 매우 까칠했고, 예민했습니다. 자신이 매우 잘난 사람이라 교만히 생각했습니다. 이 때 저는 갑자기 혈압이 200까지 높아져서 마음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울산에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리거나 숨을 못 쉴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등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팀 모임 중에서도 겸손과 사랑 가운데 발언하기보다 공격적인 자세로 발언을 많이 하여서 분위기를 안 좋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불평, 불만 가운데 살다가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교만한 생각과 불평 불만으로 자신을 채우기보다,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저는 이 구절을 때마다 외웠습니다. 저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경건하며 겸손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이 때부터 불면증이 없어지고, 마음에 평안이 생겼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태생이 교만하지만 겸손하고자 노력하고, 동역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이를 돌아보는 여유도 조금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제가 자신의 일만 돌아보는 이기적인 자로 되돌아 간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한 형제를 섬겼습니다. 저는 자신의 연구와 주말에 서울에 올라와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저는 이 형제님이 학사경고를 한번만 더 받으면 학교에서 제적이 되는 것도 몰랐고, 그는 결국 제적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원 학생 목자님들을 섬기는 큰 은혜의 직무와 책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저희 요회에 하나님께서 많은 형제, 자매님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이 분들을 위해 마음을 드리지 못했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연구와 연봉, 아파트 대출금, 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제가 자신의 일에만 얽매여 있었던 것을 회개합니다. 이번주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제출한 과제제안에서 떨어지고, 연구 실적 평가에서 수학과 특성상 예상은 했지만, 최소한 밑에서 두 번째 등급은 될 줄 알았는데, 최하등급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예수님의 겸손을 생각하니 충격이 덜하였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고 양들을 섬기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섬김을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캠퍼스 선교에서 마음이 멀어졌던 것을 회개하고 주님의 일에 제 진심과 열정을 드리길 기도합니다. 타이틀만 목자가 아니라 양들을 위한 진짜 목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를 비우고 낮춰서 문둥병자들의 목자로 살았습니다. 손 목사님은 문둥병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줄 정도로 문둥병자보다 더 낮아졌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가서는 같은 감방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장 지저분한 자리, 화장실이 있는 쪽에서 잠을 잤습니다. 감방 죄수중 다리에 동상이 걸린 사람을 보고는 그 발을 가슴에 품고 자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삼아서 친히 데리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그는 낮아짐으로 문둥병자들과도 하나되고, 감방의 죄수들과도 하나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원수 같은 공산당청년까지 감동시켜 하나가 되었습니다. 6.25때도 피난가지 않고 양떼들과 하나되어 그들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는 그가 십자가에까지 낮아져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가 손양원 목사님처럼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서 어떤 죄인과도 하나 되며, 센터 안에서 어느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센터 전체가 하나 되고, 우리 종로 공동체 전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두신 성서한국, 세계선교의 뜻을 힘있게 이루어 드리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