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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여름수양회 3강 '나의 회복, 십자가' (누가복음 23:26-49)2017-07-27 09: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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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여름수양회 3강 / 윤안드레



나의 회복, 십자가



말씀 / 누가복음 23:26-49

요절 / 누가복음 23:45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오늘은 나를 찾아서 떠나는 산책, 3번째 코스입니다. 오늘 산책길은 어쩌면 참혹하다 못해 혐오스럽고 회피하고 싶은 산책길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골고다 언덕길을 되짚어 가는 가운데 십자가 은혜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함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제 I 장.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6-31)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밤새 심문한 후에 아침이 되자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선동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로마에 반역한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예수님을 심문하였고 헤롯도 심문을 하였지만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고소한 사람들의 말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폭동이 일어나서 자신의 자리가 위험해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진짜 죄수 바라바를 놓아주고, 죄 없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형장으로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을 새워, 땀이 핏방울처럼 될 때까지 기도하셨고, 체포당하여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다시 빌라도와 헤롯에게 세 차례 심문을 받았습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침 뱉음과 뺨 때림과 지속적으로 모욕과 억울한 고소와 정죄를 받았습니다.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수치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를 던져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한발, 또 한발, 느리지만 마음을 다하고 힘을 짜내어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셨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무릎이 깨어져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은 군인들에게는 너무나 느리고 답답한 걸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무리 중에서 끌어내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였습니다. 시몬은 졸지에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시몬으로 인해 잠시 숨을 돌리게 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십자가를 따르던 행렬에는 구경꾼들도 있었지만 슬퍼하며 우는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여인들은 울며, 가슴을 치며,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가슴을 치며 울게 됩니까?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숨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고맙다” 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은 진짜 슬퍼해야 할 일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실상은 여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더 불쌍한 존재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29-31절을 보십시요.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그것은 장차 다가올 그날 때문입니다. 그날은 어떤 날입니까? 생명을 출산하고 기르는 고귀한 축복이 저주가 되는 날입니다. 또 그날은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날입니다. 산사태라도 나서 빨리 죽어 고통을 멈추고 싶은 날입니다. 그날은, 푸른나무이신 예수님이 참혹하고 처절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오늘 보다도 더, 비교할 수 없이 두렵고 참담한 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만 전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차례 심판을 예언 하셨습니다. 눅19:41-44을 읽어 보겠습니다. “41 (예수께서) 가까이 오사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흙으로 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또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책망하신 후에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한다고 하신 바 있습니다. (눅11:50) 예수님의 십자가 후 40년이 안된 AD70년, 로마 장군 티토는 예루살렘을 완전 봉쇄하기 위해 성 밖에 흙으로 다시 성을 쌓았습니다. 성안에서는 물과 식량이 바닥나서 강도와 살인으로 죽은 사람들이, 나중에 로마 군인들에게 죽은 사람들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역사가 요새프스의 기록에 의하며, 자녀들까지 잡아서 먹었다고 합니다. 배고픔이 가셨을 때 그들이 과연 살고 싶었을까요? 내 자식이 땅에 메어침을 당하는 것을 볼 때 자식을 낳은 것이 저주요 죽는 것이 축복이 될 것 입니다. 결국 백만명 이상이 죽고,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심판이 닥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제 II 장. 예수님의 죽으심과 찢어진 성소의 휘장 (32-49)


 32-33절을 보십시오.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과 함께 다른 두 죄수들도 사형을 받게 되어 끌려갔습니다.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서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히고, 두 죄수를 예수님의 좌우편에 두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단순히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최대한 고통과 수치를 느끼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죽여도 시원치 않다는 죄인에 대한 강렬한 미움과 증오가 담겨있습니다. 한 뼘 길이의 대못이 손과 발의 피부, 혈관, 신경, 뼈와 살을 뚫고 나무에 박힙니다. 그리고 못 세 개로 나무에 매달리게 됩니다. 상처에서 피와 물이 흐르고, 고통으로 움직이면 상처가 더 벌어지고, 더 큰 고통이 찾아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기절을 합니다. 의식을 잃으며 몸이 처지면, 더 심한 아픔이 의식을 깨웁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으로 몸이 비틀리며 다시 기절을 합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천 번쯤 반복하며, 서서히 죽어 갑니다.


 그 처절한 고통 중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34a절을 보십시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아마도 예수님은 이 기도를 끝임 없이 되뇌셨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정죄할 때, 침 뱉고 모욕할 때, 채찍질 할 때, 대못을 내리 칠 때, 비웃고 조롱할 때, 그리고 아마도 가장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그 고통을 중단하고 싶은 유혹이 가장 큰 그 순간에, 입 밖으로 나왔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서서”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약6백 년 전에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3-6)


 죄는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원수가 되게 하고, 사람과 사람이 원수가 되게 합니다. 성격을 파괴하고 인성을 파괴하고 영성을 파괴하고, 결국에는 생명까지 말살합니다. 사람을 짐승보다도 못하게 하기도 하고,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참혹한 죽음 후에 영원한 형벌에 떨어지게 합니다. 롬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죄를 짓고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입니까? 롬1:29-32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러한 것을 한번도 마음이나 행동으로 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롬6:23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또 벧후3:10 말씀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 날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 옵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그날이 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죽는 날이 그날입니다. 죽은 후에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날을 맞이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죽음의 강을 건너 심판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롬3:24-25은 말씀합니다.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속량이란 노예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기위해 그 값을 대신 지불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화목제물이란 쉽게 말하면 보상금 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값을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그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심판을 건너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34b-39절을 보십시요. “34b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구원하는 자, 그리스도, 유대인의 왕은 모두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위에는, 형을 받게 된 죄목이 쓰여진 죄패를 박았다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예수님의 죄패에는 ‘강도’나 ‘살인자’가 아닌, “유대인의 왕”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관리들과 군인들은 그 패를 보고 비웃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선한 학생을 왕따시키고 괴롭히는, 일진들처럼 예수님을 비웃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의 겉모습이 아닌 참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였습니까? 40-42절을 보십시요. “40 하나(한 사형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사형수였습니다. 그 와중에 두가지 놀라운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고 둘째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행한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그 대가인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또한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하였고 옳지 않은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를 언급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단순히 옳은 일을 하신 분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 곧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에게 이 같은 놀라운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마음이 녹은 것 같습니다.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옳은 마음과 태도를 잃지 않는 예수님 앞에서, 상황과 형편으로 합리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흉악한 사형수였지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다는 것 입니다. 그는 감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할 수 없었지만, 기억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100% 자격이 없지만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도 용서의 기도를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희망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소망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심으로 즉각적인 죄 사함과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해본 사람은 다 알지만,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때 즉각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늘의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낙원입니다. 용서받은 사람들과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낙원이라고 표현하심으로 그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알려 주고, 그에게 소망과 위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곧 들어가게 될 낙원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또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44-47절을 보십시요.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해가 가장 밝아야 할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오히려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둠에 덥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숨지셨습니다. 이때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성전 안에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두께가 10cm나(11x20m) 되는 커다란 커튼이었습니다.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서 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연적으로 정중앙이 단번에 찢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히10:18-20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께서는 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다시 제사 드릴 것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것은 성전과 제사시스템의 폐기선언 입니다. 성소의 휘장뿐 아니라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도 소멸하여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친히 그 몸으로 우리를 위해 단번에, 완전하고 영원한 제물이 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모든 일을 본 로마인 백부장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인정했습니다. 숨어서 믿음을 지키던 아리마대 요셉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여 장사를 지냈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와 집행책임자인 백부장과 아리마대 요셉,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에서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롬16:13을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도 이 사건을 통해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변화가 즉각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분명한 것이었고 그 현장을 참관한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후에 변화되어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새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제가 학생리더일때 바이블하우스의 전기요금을 내는 책임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날짜를 놓쳐서 과태료를 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으로부터 “쓸모 없는 사람 때문에 과태료를 내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돈 몇 천원 때문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정죄와 판단을 하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은 거짓이었단 말인가 의심과 회의가 꼬리를 물었습니다. 천국보다 조금 못한 바로 아랫집 같았는데 이제까지 속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문제는 제 안에 있었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동일한 죄에 넘어지는 자신을 보며 복음의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나 하는 거냐는 생각에 까지 미쳤습니다. 극심한 갈등과 혼돈 가운데서 작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절대적인 사랑의 증거를 사람들과 모임에서 찾고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에서 존재의미와 가치를 찾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울고 웃는 비참한 현실 가운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여름수양회에서 본문 메시지를 들으며 예수님의 이 기도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회개하고도 또 다시 죄에 넘어지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내가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 때 제가 죄악 된 죄인 것과 약점이 많은 것이 정죄가 아니라 감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고 죄인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후 제 삶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감동되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열악한 환경과 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주님의 사랑은 제가 나이지리아와 그 백성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빚진 자로서 그들을 아낌없이 사랑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큰 은혜였습니다. 한국에서 와는 달리 저는 매우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통해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죄로 신음하던 나이지리아 학생들이 변화되고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큰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실패한 후 레베카 선교사의 건강문제까지 겹치자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하나님께서 현지인 리더들을 주인으로 세우시고자 하시는 뜻으로 영접하였습니다. 한국에 와서 1년간 쉰 후에 한예종 개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GBS에 10명 이상 참석하고 예배에도 4-5명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우리의 시각 사이에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나이지리아 양들 보다 훨씬 소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캠퍼스에서 만날 때는 좋았던 사람들이 센터에 오면 힘들어졌습니다. 결국 하나 둘 적응을 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저는 소망을 잃고 자식들이나 support를 잘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또 상처 받고 떠나는 리더들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친동생보다 더 사랑하고 섬긴 사람이 제 자녀들에게 지우기 어려운 상처를 준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이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그를 전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제가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 인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또 제가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사람들의 문제를 바라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돌아보면 저도 의도치 않게 자식을 5년이나 돌보아준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가 고통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주님의 십자가상의 기도를 마음에 품고자 합니다.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제가 저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의 절대적을 사랑을 붙잡고 다시 서기를 원합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구원을 받았지라도 여전히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소의 휘장을 둘로 찢으셨습니다. 그것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도 우리의 의가 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 설 때 우리의 삶에 생명력이 있고 죽음 앞에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도 담대하게 설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절대적이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저희가 이복음에 빚 진자로서 주위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복음의 능력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모임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사랑의 공동체로 회복되어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데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