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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고린도후서 제 5 강 '화목하게 하는 직분' (고린도후서 5:11-6:10)2017-11-27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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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고린도후서 5강 


화목하게 하는 직분 


말씀/ 고린도후서 5:11-6:10 

요절/ 고린도후서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오늘 말씀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사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1절은 위의 10절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가 알고 교제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왜 자기에게는 복음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았는지 원망이 가득한 눈길로 자기를 바라볼 것을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 중 일부는 자기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어 너무 감사하다고 말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바울은 잠시라도 방 안에 누워 편하게 쉬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복음의 말씀으로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와같이 자신의 사역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임이라고 말합니다. 또 고린도 교인들도 양심적으로 판단해본다면 이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고린도 교회에 어떤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외모를 자랑했습니까? 그들은 자기가 누구누구의 문하생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또 현란한 헬라 수사학을 자랑했습니다. 또 종교적 활홍경에 빠져 기괴한 몸짓이나 소리를 내는 것을 통해 자신이 신령한 종이라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을 기초로 자랑하는 그들과,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양심에 기초해서 비교해보라고 말합니다. 과연 누가 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역자일지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합당한 답변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외모를 자랑하는 이들은 미친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신앙의 외적인 모습에 열정을 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이를 통해 신령한 사역자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만약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 사도행전 26장에서 체포된 바울을 심문하던 베스도 총독은 너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하더니 드디어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유대인 죄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그는 베스도 총독이 볼 때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전파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메시야로 아느냐 모르느냐는 한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중대한 문제였으므로 온 열정을 다해 그것을 증거하였습니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미친 사람처럼 계단을 오르내리며 대문을 두들기며 불났다고 외치는 사람은 사실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 그 건물에서 가장 제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메시지의 중대함과 시급함을 알았으므로 미친 사람처럼, 그러면서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로 전했습니다.  


14a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강권한다는 표현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내키지 아니한 것을 억지로 권하다”로 되어 있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For Christ’s love comples us(NIV)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강한 힘으로 강제하여 특히 어떤 행동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KJV에는 constrains us로 되어 있습니다. constrain은 줄로 묶었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줄이 되어 나를 꽁꽁 묶었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보통 바울 하면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고, 욕하고 채찍으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 돌로 쳐도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복음을 전하는, 정말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불사조같은 사람, superman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는 이 표현을 통해 그도 사도의 직분이 막 너무 재미있고 신나고 좋아서 자발적으로 감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 사랑의 그 강력한 권고하심, 그 compelling, 사랑의 줄이 그를 꼼짝못하게 묶는 그 constraining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도 피와 살과 오장육부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춥고 헐벗고 배고프고 아픈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북풍한설 내리치는 겨울날 차가운 감옥 바닥 위에 변변한 이불도 없이, 베개도 없이 누워 자려 할 때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기가 그의 머릿 속, 그의 심장과 온 몸의 뼛속깊이까지 스며들어올 때 이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리가 없습니다. 그도 사람이었으므로 너무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다시는 이런 감옥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추운 겨울이면 휴양지로 내려가 따스한 햇살을 쬐며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습니다. 양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그 참혹한 고통을 다 참고 견디신 그리스도, 손에 대못이 박혀 붉은 피가 솟구쳐 흘러내리고 팔목의 신경으로부터 전해져오는 그 끔찍한 고통이 온 몸을 뒤틀리게 하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할 때 그 고통을 양들을 위해 다 참고 견디신 그리스도. ‘알았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가마.’ 이 한 마디만 내뱉으시면 지옥 같은 고통에서 곧바로 벗어날 수 있음에도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으신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바울은 겨울이 왔다고 해서 휴양지에로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매맞고 감옥에 갇힐 위험이 도사린다고 해서 양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그 사랑이 그를 고린도에 오게 하였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게 될 양들의 죄문제를 생명을 걸고 끝까지 돕도록 하였습니다. 


14b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생각하건대”는 원문상 확신한다(because we are convinced:NIV)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확신한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죽으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다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옛 사람,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의 옛 사람은 내가 내 삶의 주인되어 삶의 목적이 오직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성공, 나의 행복, 나의 만족, 나의 유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한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롬 6:4)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믿는 사람에게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됩니다.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게 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와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한 사람을 평가할 때 육신을 따라 판단합니다. 외모, 학벌, 나이, 연봉, 타고다니는 차, 들고다니는 휴대폰을 보고 평가합니다. 이는 그가 육신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판단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가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인지, 그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예수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그것을 기준으로 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삶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너무 존경하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바울도 예수님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착각하는 정신나간 청년이요,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저주받은 사람처럼 나무에 달려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과연 하나님께서 이단의 괴수를 공의롭게 처벌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십자가 예수님 앞에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의 안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것을 알게 되었고 그를 위해 사는 것이 가장 큰 특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주 안에 있게 된 것은 단순한 마음의 변화가 아닙니다. 단순히 생각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the new creation)의 탄생입니다. 첫 번 창조에서 흙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흙이 어떻게 변하여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의 탄생은 그것과 비견될만한,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입니다. 오직 자기를 위해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은 결코 교육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설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아니 그보다 더 큰 새 창조의 능력이 나타남으로 가능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다음으로 바울은 현재 그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먼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화목의 손길을 우리에게 내미셨다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한다는 것은 원문상 ‘정반대의 것으로 바꾼다’ 곧 ‘적대적인 관계를 우호적인 관계로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은 무서운 말입니다. 사람이 적대 관계에 있으면 아무 거리낌없이 상대방 편에서 볼 때 정말 무서운 위해를 가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입니다. 이에 비해 북한은 세계 최빈곤국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과 적대관계에 있다는 이 사실 한 가지 때문에 매우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북한은 핵무기를 사용하여 미국의 도시 하나쯤 잿더미로 변한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미국 중부 지역에서 두 집안이 사소한 갈등(카드놀이하다가 속였다는 다툼)으로 적대관계에 빠지게 되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때 한 집안에서 휴전을 요청했는데 막내아들을 총격전으로 잃은 어머니가 휴전을 거절했습니다. 이에 다시 총격전이 시작되었는데 더 많은 형제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분노에 찬 어머니는 큰 아들에게 용감하게 싸우다가 남자답게 죽으라고 외쳤습니다. 적대관계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죄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요, 동시에 죄를 가장 혐오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죄 안에 살아가는 인간도 죄로 추악한 모습을 볼 때 구토감을 느끼며 몸서리치는 거부감을 경험합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죄에 대해, 또 죄를 밥먹듯 지으며 살아가는 죄인들에 대해 이러한 적대감을 가지십니다. 우리가 가까이 있는 사람 중 한 사람과 적대관계가 아닌 다소 껄끄러운 관계만 되어도 매우 불편함을 느낍니다. 또 그 사람이 직장 상사이거나 대학원 교수님으로 사회적 파워를 가지고 있을 경우 그 불편함은 크게 배가됩니다. 미국도 북한과 적대관계에 있으니 미국 대통령을 포함하여 모든 미국 시민들이 크게 불편해하고 또 불안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가장 높고 강하신 하나님이 나를 향해 적대감을 갖고 계신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사지가 떨리고 머리가 흔들리며 이가 빠질 것처럼 떨리는 무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적대감을 갖고 계신다는 생각이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그 불편함을 피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그런 잔인하고 끔찍한 하나님은 거부하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시한다고 해서, 거부한다고 해서 적대관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마치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차를 몰고 가는데 그 끝이 천길만길 벼랑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가운데 운전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이 적대관계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애써 하나님을 무시하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들, 삶의 잔재미와 쾌락에 몰두합니다. 마치 수능을 앞둔 수험생이 수능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화목의 손길을 내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화목의 손길을 내미시기 위해 반드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그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다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셨습니다. 마음에 근본적인 두려움이 사라지고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먼저 화목을 체험한 자들에게 대사의 직분을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과 불화상태에 있는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영어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신은 Christ’s ambassadors, 곧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신(대사)은 그 나라에서 나이도 있고 사회적 신분과 덕망이 있는 사람 중에 선발하여 다른 나라에 파송되었습니다. 사신은 물넘고 산건너 그 나라의 왕을 만났습니다. 이때 사신은 결코 자기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를 사신으로 보낸 왕의 뜻과 생각만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또 상대나라 왕이나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대사의 메시지를 싫어할 경우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신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신의 자세, 그리스도의 대사의 자세를 가지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현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현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음행을 행했습니다. 간음한 자를 용납하고 그에게 합당한 징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영광과 욕심으로 가득한 거짓 선지자들의 그럴듯한 수사학과 지식, 능력에 미혹되어 바울을 의심하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그들 마음의 중심에 진리를 따르기보다 자기 욕심과 만족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 그들에게 회개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곡한 음성으로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화목하게 하는 직분, 곧 그리스도의 대사를 직분을 주십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에서 목회자 세습이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에서 기독교가 점점 그 영향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군대에서도 점차 신자들의 수가 줄어들어 교회를 통폐합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웬만한 부대마다 군목이 배치되었는데 요즘에는 군목 한 사람이 여러 부대를 출장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신자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목사가 부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요즘 매년 신학교를 졸업한 수많은 목회자 후보생들 가운데 담임목사 자리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 후보가 부족한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진실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가 된 참된 신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은 기드온의 32,000명의 병사 중에 정말 하나님을 위해, 기드온을 위해 싸울 자세가 된 300명의 정예병을 추려내셨습니다. 그 300명의 정예병을 통해 13만 5천명의 미디안 연합군과 싸우도록 하셨습니다. 300명의 정예병은 12만명의 미디안 군을 물리치고 계속하여 미디안의 패잔병을 뒤쫓았는데 놀라운 사실은 패잔병의 수가 15,000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2만명을 물리친 것은 기습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쳐도 어떻게 밝은 대낮에 300명이 15,000명의 패잔병을 뒤쫓아갈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기드온을 위해 생명을 내건 300명의 용사를 크신 능력으로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 용사와 같은 믿음의 용사들, 정말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된 믿음의 정병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들을 이 시대의 대사로 임명하여 세우십니다. 오늘날 대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적인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을 패스해야 합니다. 합격한 사람은 외교부 산하의 국립외교원에 입교하여 1년간 교육을 받습니다. 교육을 마친 후 최종성적평가를 하여 종합성적이 우수한 사람을 5급 외무공무원으로 임용한다고 합니다. 이 교육과정에는 전문성을 요구하는 훈련을 당연히 하고 아울러 외교관으로서 언행과 품행에 대한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시한다고 합니다. 한편 이렇게 임용되었다고 곧바로 대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2등 서기관부터 시작하여 1등 서기관, 참사관, 영사대리, 부영사, 영사, 총영사, 공사, 대사 순으로 오랜 기간 근무하는 가운데 크게 인정을 받아야 은퇴하기 전 겨우 대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힘겹고 어려운 과정을 통해 대사를 선발하는 이유는 그만큼 대사가 한 지역에서 조국을 대표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다 대한민국을 대표합니다. 대사에게는 책임도 따르지만 여러가지 특혜도 있습니다.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집과 차와 기타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제공됩니다. 또한 면책특권이 주어집니다. 이는 대사가 잘못했다고 해서 감옥에 가두는 것은 대사 개인을 벌하는 것 이전에 대사가 대표하는 그 나라에 수치를 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사는 영광스러운 직분이며 동시에 무거운 책임을 동반한 직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아는 자들, 하나님과 진실로 화목한 자들, 그 삶의 목적이 내가 아닌 그리스도로 변화된 자들을 이 시대 그리스도의 대사로 모집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대사 직분을 수행하기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 물질, 능력, 힘, 지혜 등을 전부 다 공급해 주십니다. 동시에 그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한 마디가 다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영광스러우면서도 무거운 책임을 주십니다. Christ’s ambassadors!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천군천사들도 부러워하는 직분입니다. 천군천사는 그리스도의 servants들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권대사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사로 부르시는 이 주님의 음성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복음의 핵심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6:1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들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까? 이는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삶의 음란과 우상숭배, 거짓 사도들을 따르는 마음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회개하여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도록 권면합니다. 


6:3-8절 전반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여러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참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그들을 섬겼다고 간증합니다. 바울은 영광의 복음을 전했으나 때로 복음 때문에 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복음 때문에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지만 또한 복음 때문에 악한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8절 후반부부터 10절에서 바울은 그가 속이는 자 같으나 사실은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사실은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간증합니다. 당시 외모를 자랑하던 거짓 사도들과 비교해 바울은 연약하고 내세울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어딜가든 대접받고 환영받고 온갖 명예와 칭송을 받던 거짓 사도들과 비교해 바울은 항상 고난받고 배척당하고 고생하고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이런 그의 겉모습을 보고 고린도 성도들은 그의 사도됨의 진실성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복음 때문에 고난받는 그러한 모습이 그가 하나님께 알려지고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 참된 사도라는 증거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받으실 때 세상은 그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 고난이 그가 참 메시야라는 증거가 되지 않았습니까! 전쟁터에서 받은 모든 상처의 흔적은 그가 열심히 싸웠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받는 모든 아픔과 상처는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새 피조물입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대사로 부르십니다. 대사의 부르심에는 아픔이 따를 수 있습니다. 고난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클수록, 아픔이 클수록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증거를 몸에 새기게 됩니다. 우리를 대사로 부르시는 이 주님의 음성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