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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7강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17-48)2020-03-2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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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태복음 7강 (주일메시지)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 마태복음 5:17-48
요절/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최고봉과 같은 말씀입니다. 최고봉에서 받는 이 말씀은 너무도 아름답지만 과연 현실에서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말씀이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은 환상적인 말씀이 아닌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주의 말씀으로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영어로 “fulfill(NIV)”입니다. 이것은 그 본래적인 의미를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계명의 말씀을 그 문자적인 의미만 충실히 이행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 안에 담긴 정신을 가르시고 실천하도록 도움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십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의 일점 일획이란 지극히 사소한 부분을 가르킵니다. 랍비들 중 어떤 이들은 신명기 22:6~7에 있는 새의 둥지에 대한 율법이 계명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곧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같이 취하지 말고 어미는 놓아주고 새끼나 알만 취하도록 하는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자기와 자기 가족만 생각하지 말고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와 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새를 둥지채 전부 다 가져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가 씨가 마르게 되어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에게 손해가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고 버려서도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곧 그 정신을 알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말 그대로 살인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은 형제에 대해 결코 미움과 분노의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해 미움과 분노의 마음을 품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살인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충격적인 어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곧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해 라가, 곧 돌대가리라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절대로 형제에게 장난으로라도 욕설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욕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은 하지 않으면서 속으로 형제에 대한 미움과 분노의 마음, 곧 살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은 죽은 아내 라헬을 꼭 빼닮은 요셉을 너무 사랑하였습니다. 야곱은 특히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아들 요셉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야곱은 형들은 일반적인 옷을 입도록 하고 요셉에게만 특별히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형들은 싸구려 옷이나 신발, 가방 등을 사주고 컴퓨터는 거실에 있는 구닥다리 컴퓨터를 공용으로 쓰도록 하고, 요셉에게만 최고 멋진 상표의 옷, 신발, 가방, 개인용 고급 퍼스널 컴퓨터를 사준 것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처사는 형들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분노는 특별 대접을 받는 동생 요셉에게 향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 건방진 동생 요셉을 쳐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이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큰 범죄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요셉을 죽인 것과 진배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요셉의 형들처럼 형제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특정한 자녀에게만 많은 유산을 물려주고 자기에는 조금만 주었다고 생각할 때 분노하고 형제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특정한 아이만 사랑하고 관심가져줄 때 그 아이에 대해 시기심과 미움, 분노로 이글거릴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상사가 특정한 사람을 특별히 인정해주고 칭찬과 대접을 해 줄 때, 내가 보기에는 부당하게 더 많은 월급을 주는 것 같을 때 그 특혜받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또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신에 비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편하게 세상을 사는 것같은 이들을 볼 때 분노로 이글거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간에 우리 마음에 형제를 향한 이런 미움과 분노가 이글거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을 어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노가 속마음으로만 있든지, 혹은 욕설이나 기타 강렬한 비난의 댓글을 다는 것으로 표현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과 분노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해 미국 유학 중 돌아온 자녀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코로나 확진을 받은 모녀와, 그 모녀의 행동을 고의적인 것으로 보고 1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하겠다는 제주도 지사, 또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스트레스 받은 자녀를 위로하기 위해 하와이 대신 제주도 여행을 간 것인데 소송을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모녀 편에서 변호를 해 주는 기자회견을 한 강남구청장으로 인해 사회적 핫 이슈가 되었습니다. 저도 관심을 가지고 댓글을 죽 읽어보았는데 댓글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녀, 혹은 강남구청장에 대해 이글거리는 분노를 가지고 인신공격성 표현을 담아 쓴 댓글이었습니다. 그러한 댓글은 읽어보면 작성한 이의 분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많지는 않지만 가끔 어떤 댓글은 전혀 그러한 개인적 분노의 표현없이 개인은 개인으로서, 공직을 맡은 이는 공직을 맡은 이로서, 현재와 같은 시국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정말 차분하게, 또 설득력있게 써내려간 글도 있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바로 그와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곧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형제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또 반대로 부당한 일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냥 혼자서 속으로 삭히고 있는 것도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올바른 자세는 부당한 것에 대해 전혀 개인적인 미움이나 분노의 마음없이 그 부당한 것을 명확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상대방도 인신공격을 받았다는 느낌을 갖지 않게 되며 그 부당함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당시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곳이 갈릴리 근방이라고 볼 때 갈릴리 지역에 살던 사람이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1박 2일 휴가를 받아 많은 경비를 들여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막 제물을 드리기 전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체험적으로 형제에 대한 미움을 품은 그 마음 그대로 주의 제단 앞에 나갈 때 어떤 일이 생깁니까? 우리의 기도, 성경읽기, 예배가 형식적이 됩니다. 딱딱하고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형제와 화목한 이후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기도와 예배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강과 은혜와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만약 누군가 우리를 고발하면 아직 함께 길에 있을 때 합의를 보아야 합니다. 금전적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든 배상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합의를 받아내야 합니다. 어물쩡거리고 있다가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전부 다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살아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장차 주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내가 반드시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에게 아직 아직 용서받지 못한 채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또 반대로 내가 주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할 사람을 미처 용서하지 못한 채 심판대 앞에 서는 것 역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살아있을 때, 생명이 붙어있을 때 용서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실제 간음하지만 않으면 계명의 말씀을 지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종교 개혁가 루터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곧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죄의 본성(루터는 그것을 마귀라고 표현함)이 우리에게 음란한 생각의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음란한 생각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살이 스쳐가듯 순간순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날아온 화살을 그대로 방치하여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박히도록 하는 것, 더 나아가 박힌 화살을 빼낼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둠으로 화살의 독이 온 마음에 퍼져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 - 그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루터는 어떤 이의 비유를 소개하였습니다. 그것은 “참새가 내 머리 위에 날아다니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참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틀고 부리로 내 눈을 쪼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라는 것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오른 눈이 우리를 실족하게 할 경우 그 눈을 빼버리는 그와같은 자세로 여자를 볼 때 음란한 생각이 마음에 파고들면 계속해서 그 생각을 품고 안목의 정욕을 즐기지 말고 즉각 그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당시 바리새인들, 특히 힐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어떤 이유든 남편이 아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경우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비해 삼먀이 학파는 음행한 것 이외에 음행은 불가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당시 다수의 유대인들은 힐렐의 가르침을 따라 자유롭게 이혼하였습니다.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역시 힐렐의 가르침을 따라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 부인을 내보내고 이혼했으며 이것을 공개적으로 글로 써서 밝혔습니다. 이처럼 많은 유대인 랍비들, 종교 지도자들은 부인보다 더 젊고 예쁜 여자가 마음에 들 경우 서슴없이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아 이혼하고 새로 결혼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문자적인 허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운 것입니다. 마치 법에 빠삭한 전문 법조인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운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외에 이혼은 다 간음에 해당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33-37절을 보십시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헛 맹세하지 말고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는 것은 본래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맹세를 남발하였습니다. 맹세한 것이 아니면 어느 정도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맹세한 것이 아니면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만 말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 저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다. 저 사람 말은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다.” 이러한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법적인 절차상, 예를 들어 재판정에서 증인 선서를 해야 하는 경우 맹세를 할 수 있습니다.)


38-42절을 보십시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눈을 상하게 했으면 가해자의 눈도 상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눈을 상하게 했으면 그에 준하는 피해 보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본래 정신은 상대방이 입은 피해에 대해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보상을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피해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보상금을 요구함으로 가해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워서도 안됩니다.


문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악용하여 상대방이 행한 악을 그대로 갚아주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예로 들어본다면 어떤 아이들이 자신의 자녀를 왕따시켰다고 생각해 봅시다. 화가 난 부모가 학교로 달려가 가해자들을 향해, 혹은 가해자의 부모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지르고 막 삿대질을 해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금하신 악한 자를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을 돌려 대라 하셨으니 자신의 자녀를 더 많이 왕따시키도록 방치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요한복음 18:22-23절에서 자신의 뺨을 치는 이에게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른편 뺨을 맞거든 왼편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내가 당하는 악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 악에 대해 이글거리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담임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 더 나아가 관계 기관을 통해 더 이상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합당한 조치가 취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그래도 안된다면 언론에 호소하는 등의 조치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뺨을 치는 자에게 사적인 보복을 해서는 안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부당한 고소를 통해 내 속옷을 가져가려고 한다고 합시다. 그의 고소와 재판의 결과가 너무 부당하여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재판의 판결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판결이 났으면 흔쾌히 속옷을 내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재판의 결과에 더하여 겉옷까지도 욕심을 부리는 것 같으면 더 이상 다투지 말고 겉옷도 주어버리는 편이 낫습니다. 그에게 다시 재판을 걸어 끝까지 갈 경우 그 재판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그와 영원한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그가 불신자인 경우 신앙에 대해 더욱 완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지고 양보하는 편이 낫습니다.


또 어떤 로마 관리가 부당하게 오 리를 갈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 지배 하에서 법으로 로마 관리는 누구든지 오 리를 짐을 들고 갈 것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이것은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부당한 요구에 대해 맞서 싸우지 말고 아예 십 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요구의 2배를 해 주라는 것보다는 기꺼운 마음으로 가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십 리를 가는 것처럼, 인상쓰면서 억지로 하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로마 관리에게 신앙의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로마에 대한 미움과 분노의 마음 대신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며 로마 사람들에게도 주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43-47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본래 십계명의 말씀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만 있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직접적인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역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반대인 원수는 미워하라는 의미로 유추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대상에 원수까지도 포함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해를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차별없이 비추십니다. 또한 그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차별없이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하나님을 닮아 원수도 이웃으로 생각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나를 미워하고 박해할 때 그가 나를 개인적으로 미워하기에 앞서서 근본적으로는 내 안에 계신 나의 주님을 미워하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미워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집사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자기를 미워하기에 앞서서 그가 사랑하는 주님을 미워하기에 돌로 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결론적으로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때 온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적에 분노와 복수심이 아닌 따스한 마음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를 위한 기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