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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요한복음 제8강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한복음 7:1-44)2018-05-0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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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요한복음 8 강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말씀 / 요한복음 7:1-44


요절 /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4장의 주제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메시지를 준비해 보니까 4장과 또 다른 은혜가 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의 심령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은 6장 사건 이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함으로 주로 갈릴리에서 다니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초막절은 유대인의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기간은 유대 종교력으로 7월 15일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 지속됩니다. 양력으로 하면 대략 9월에서 10월 사이입니다. 초막절은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사막의 열기로부터 보호해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광야의 매서운 추위로부터 보호해주시며, 물 한모금 없는 광야의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심으로 마시게 하신 그 은혜를 추억하고 기념하며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기간 사람들은 집의 지붕 위나 뜰에 초막을 지어놓고 그 안에 들어가 1주일간 생활하였습니다. 초막의 지붕을 뚫어 밤에는 별이 보이고 낮에는 뜨거운 태양빛이 들어오도록 하여 광야생활의 고난과 그 고난 가운데 함께 하셨던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묵상하였습니다. (레 23:42-43) 이 기간에는 전국 각지와 심지어 외국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3-9절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지금이 좋은 기회이니 지금 초막절 행사가 열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을 드러내라고 권면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10-24절은 초막절 기간 예수님의 자신에 대한 증거입니다. 명절이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에 대한 견해는 좋은 사람이다, 무리를 미혹하는 자이다 하는 정도의 견해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메시야가 아니라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 -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명절 중간 쯤 되어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본문은 왜 예수님이 명절 처음부터 가르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가르치셨으면 더 많이 더 풍성하게 가르치실 수 있는데 늦게 오셔서 중간부터 가르치셨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1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고 기록된 것을 볼 때 아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랍비 학교를 다니지도 않으셨는데 어떻게 이런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말씀하십니다. 두 가지 증거로 먼저 사람이 겸손히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자기 영광을 구하는지 혹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지 보고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왜 살인하지 말라 기록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지 물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것 아닌가, 누가 죽이려 한단 말인가 되물었습니다. 예수님은 5장에서 안식일날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언급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 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예외적으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몸의 일 부분에 정결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의 전신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왜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25-36절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점차 예수님의 메시지가 결국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주장임을 알아듣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당장 예수님을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큰 기쁨 가운데 영접해야 합니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신성모독죄로 즉각 체포하여 재판에 넘겨야 합니다. 그런데 당국자들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당국자들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그들도 예수를 정말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 여겼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그리스도는 어딘가에 조용히 숨어 계시다가 엘리야가 와서 권능을 주면 그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능력을 행하는데 우리는 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고, 엘리야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반론을 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사실은 나사렛 출신이 아닌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 출신이고 그동안 나사렛에 목수로서 은밀히 숨어 있었고, 또 세례 요한이 장차 오리라 한 엘리야이며 그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능력이 내 위에 임했다’ 라는 식으로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 더욱 권위있게 나는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으나 아직은 손을 대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면 그 증거를 통해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반문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그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가서 헬라인을 가르친다는 뜻인가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장차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 당시 초막절 기간 전통적으로 행하던 중요한 행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막절 기간 1중일 동안 매일 대제사장이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와 그 물을 성전의 제단에 붓는 행사였습니다. 제사장이 실로암 못에서 길어온 물을 가지고 성전 문을 통과할 때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세 번 불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큰 소리로 이사야 12:3절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또 대제사장이 성전의 제단으로 행진할 때 성가대는 여호와께 감사하는 내용을 담은 시편 113-118편을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114:8),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시이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15:11),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16:12-14)” 찬양이 끝나면 제사장은 제단 위로 올라가 제단에 물을 부었습니다. 물을 부을 때 광야 생활할 때에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내년에도 풍성한 비를 내려주셔서 곡식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하였고, 장차 메시야께서 오실 때에 이 성전으로부터 생명의 물이 온 세상에 흘러넘치게 하시겠다는 에스겔 47장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소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사는 초막절 기간 내내 행해졌고 특히 7일째 되던 날 대제사장은 제단을 일곱 번 돈 후에 제단에 실로암에서 길어 온 물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초막절의 의식이 일주일간 진행된 후 큰 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 때에 사람들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우리가 지난 요한복음 4장 말씀을 통해 인간 영혼의 목마름 문제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지난 번에는 주인공이 사마리아 여자였으므로 여러 목마름 중 특히 이성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 또 사람의 인정에 대한 목마름을 다루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다른 목마름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의롭다 하심”에 대한 목마름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타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수도원에서 엄청난 고행을 행했습니다. 특히 얼어죽을 것처럼 추운 곳에서 밤새 금식하며 기도하는 고행을 수없이 반복하여 행했습니다. 그는 훗날 회고하기를 그때 조금 더 고행했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다못한 한 선배가 그를 로마에 성지순례를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루터는 한 성지의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주기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했습니다. 수없이 주기도문 암송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이때 자기도 모르게 루터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터져나왔습니다: “정말 이렇게 하는게 맞을까?(Who knows if this is true?)” 그를 성지순례보냈던 선배는 이제 그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괴로워하며 자기는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고, 정말 솔직히 자기는 마음으로 (엄청난 수준의 고행과 선행을 끝없이 요구하는) 하나님을 증오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그가 어느 날 로마서 1:17절 말씀을 마음에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통해 루터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것같은 고행이나 혹은 어떤 선을 행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대속의 죽음의 공로를 통해서만 받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루터의 영혼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마치 양동이로 쏟아붓는 것처럼 흘러넘쳤습니다. 그는 고행을 멈추고 믿음으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원한 루터의 목마름은 영원히 해갈되었습니다.


오늘날 기성 세대의 관점에서 이 시대 청년들을 보면 죄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청년들의 마음에도 깊은 죄의식과 정죄감, 이로 인한 자의식이 있습니다. 아직 머리 속에 별로 죄가 없고 부끄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 천진난만하고 해맑고 밝습니다. 그러나 점차 청년이 되면서 그 마음과 생각 가운데 온갖 죄악된 생각이 가득하게 됩니다. 어떤 청년은 머리 속이 그야말로 음란 사이트처럼 늘 음란한 생각과 상상으로 가득합니다. 어떤 청년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여러 은혜를 받아도 눈 한 번 꿈뻑하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다는 금붕어처럼 감사하는 마음은 은혜를 받는 그 때 그 순간 뿐이고 마음 속에 늘 원망과 불평만 가득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청년은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게임이나 음란, 술 등을 통해 늘 문제를 회피하는 부끄러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많은 청년들이 이러한 죄문제로 인해 고통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죄문제를 감추고 여러가지 좋아보이는 것들로 자기를 포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보이는 것들로 포장을 해도 그 포장 안에 담긴 내용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청년들을 향하여 내게 오라고 하십니다. 너의 부끄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죄사함의 물, 구원의 물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다음으로 참된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타는 목마름을 가지고 찾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재능을 가지고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것을 위해 태어났다. 이 일을 하는 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고 가치이고 의미이며 목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청년들은 때로는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청춘을 의미없이 낭비하는 철없는 소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014년 영화 Begin Again의 OST 곡인 Lost Stars 라는 노래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Please don't see just a boy caught up in dreams and fantasies

Please see me reaching out for someone I can't see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It's hunting season and the lambs are on the run

Searching for meaning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Who are we? Just a speck of dust within the galaxy? 




나를 단지 꿈과 환상에 사로잡힌 소년으로 보지 마세요


아직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분을 찾아 헤매는 저를 보아 주세요 


오 하나님, 왜 젊음이들은 젊음을 낭비할 수밖에 없을까요?


지금은 사냥철이고 양들은 사냥꾼을 피해 도망다니고 있습니다.


양들이 왜 달리고 있느냐고요? 의미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는 길 잃은 별인가요? 어둠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는 누구인가요? 은하수 안에 떠도는 한 줌의 먼지인가요? 




청년들은 아직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분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분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성인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자기의 장점을 알아주고 자기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세상 사람들인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분은 그 청년을 창조하시고 그 청년에게 분명한 삶의 가치와 목적을 두시며 그 삶의 가치와 목적을 위해 필요한 재능을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청년들은 자기를 지으신 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끝없는 방황 가운데 청춘을 낭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내 삶이 은하수를 떠도는 한 줌의 먼지가 아니라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그 방황을 멈추게 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셨습니다. 잠언 18:4절을 보면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하였습니다. 또 이사야 58:11절을 보면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스가랴 14:8절을 보면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하셨습니다. 에스겔 47장에도 생수가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와 온 천하를 적시며 황폐한 땅을 옥토로 바꾸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이러한 구약 성경의 말씀대로 먼저는 성전되신 예수님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고, 그 물이 교회와 성도들에게까지 흘러넘치게 되리라 하십니다. 본문에서 그 배는 원문상 구둣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배도 되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의 배도 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둘 중 어떻게 번역한다고 해도 본질적인 의미는 동일합니다. 39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성전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마치 물이 스며나와 온 세상을 적시는 것처럼 온 교회와 성도들 각자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줍니다.


사실 우리가 많은 경우 단비와 같은 성령의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잘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늘 비가 잘 오고 땅이 비옥한 곳에 사는 사람은 가끔 황량한 사막에 한 번씩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1년 내내 거의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빨간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강한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눈도 뜰 수 없고 입 안에서 모래가 서걱서걱 씹힐 정도로 온 집안 구석구석이 모래로 가득하여지는 상황을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 깊은 깨달음이 오게 됩니다. 우리가 매주 말씀을 1대1로 공부하고 주일 예배 통해 말씀을 듣는 것이 사실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심령이 단비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오랜기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쩍쩍 갈라지는 논처럼 마르고 각박하여질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나고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눈만 마주쳐도 시비를 걸고 죽을 때까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혹은 한없이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어 줄담배를 피우며 술독에 빠져 날마다 술주정을 하며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져 웬만한 일이면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또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나의 모든 목마름을 해갈하는 것은 기본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생수의 기쁨이 전달될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근심 중에 있다가도 소망을 보고 밝은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다시 38절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생수의 강이 제대로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먼저는 때마다 나의 죄문제를 숨기거나 내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십자가 예수님 앞으로 진실되게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구주로 만났을 때 죄를 진실하게 고백할 때 주님께서 주셨던 죄사함의 은혜, 생수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자칫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고백하는 점에서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은밀한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삶을 오랜기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어떤 에너지나 기(氣)가 아니라, 인격체로서 진리의 영이십니다. 은밀한 죄를 가지고 있으며 회개하지 않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진실하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성령께서 주시는 충만한 생수의 기쁨이 있습니다. 진실한 회개를 한 사람의 얼굴은 마치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생수의 기쁨을 전달합니다. 다음으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믿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기보다 눈에 보이는 상황을 더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이러니까 나는 이렇게 상황에 매일 수밖에 없고,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어.’라고 생각하면 생수의 공급이 중단되고 심령이 여름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집니다. 그러나 그 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 더 믿을 때 생수가 흘러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과 비전과 담대함이 가득하게 됩니다.


초막절에 선포된 예수님의 강력한 메시지를 듣고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모세가 장차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오리라 했던 바로 그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갈릴리에서 나느냐,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오지 않느냐 반문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었으나 아직은 손을 대는 자는 없었습니다. 초막절에 선포된 예수님의 메시지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적대자가 되어 예수님을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음을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C.S Lewis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는 단지 알아두면 삶에 도움이 되는 도덕적 교훈이거나 나의 정신적 수준을 높여주는 심오한 사상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를 메시야로 믿어 죄사함을 받고 생수의 강의 흘러넘치는 기쁨을 체험하든지, 아니면 그의 모든 메시지를 거짓말로 믿고 철저히 그를 무시하며 살아가든지 둘 중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냥 좋은 분이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중간 지대 혹은 회색 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든지, 그를 희대의 사기꾼, 혹은 거짓말쟁이로 믿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한 메시지로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믿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어 우리 각자의 배에서 죄사함을 통해 흘러넘치는 생수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