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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부활절 '청년아 일어나라' (누가복음 7장 11~17절)2017-04-17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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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부활절 말씀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 누가복음 7:11-17

요절 / 누가복음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오늘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날을 두 개 꼽으라면 성탄절과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부정이 된다면 구원의 교리는 헛것이 되고 교회는 무너집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탄생하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에는 한 백부장의 종을 구하신 사건과 한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에게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시간 부활의 능력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만케 되기를 기도합니다.

 

1-10절을 보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유대인들보다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또 군인입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직업군인입니다. 당시 군인의 가장 큰 특징은 폭력적이고 횡포가 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군인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종을 사랑했습니다. 당시 종은 사람이 아니라 도구였습니다. 그 종도 건강한 종이 아니라 병든 종이었습니다. 그러면 내버려야 하는데 그를 살리고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 일에 유대인의 장로들이 나서고 있습니다. 장로라면 매우 보수적이고 민족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들과의 접촉을 금기시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와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이 사람에게 이 일을 하시는 것이 합당하다며 그를 두둔하고 간청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이가 될 수 있습니까?

 

백부장의 가장 놀라운 점은 6-8절에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장로들의 말을 듣고 가시는데 이번에는 백부장의 집에서 그 친구들이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6)”라고 말합니다. 그는 장로들을 보내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뭔데 이 분을 가라 와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엔 선생이라고 불렀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신앙적으로 문외한처럼 보이는 그가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더 깊었습니다.

주는 만물의 주인입니다. 군인다운 표현으로 말한다면 우주사령관입니다. 기껏 백 명을 통솔하는 자신이 우주를 통솔하는 분을 와라 가라 했으니 얼마나 불손한 짓을 한 것인지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또 자신도 주께 나아가는 것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오실 필요 없이 명령만 내려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군인으로서 현장에서 터득한 권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아래에도 병사들이 있는데 이더라 가라 하면 가고 저더라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했습니다. 이는 그에게 백 명을 움직일 권세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주사령관이시니 만물을 말씀 한 마디로 움직일 권세가 있으실 거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로마 왕궁에서 명령만 해도 이스라엘 시골에 있는 사람까지 움직이는데 주님이 말씀하시면 종에게 붙어있는 병마가 움직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켜 따르는 무리에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 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친구들이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대로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예수님을 만물에 대한 권리를 쥐고 계신 권세자로 믿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이 휘하에 있는 백 명의 병사에 대한 통솔권을 쥐고 있듯이 예수님은 만물에 대한 통솔권, 지휘권을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떤 영역도 예수님의 명령과 지휘체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만물은 주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119:91).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고 했습니다(8:6).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16)” 라고 말씀합니다.

 

백부장은 종의 생명도 주님이 창조하셨고 그에게 붙은 병마도 주의 발 아래에 있으니 그가 원하시면 이뤄지리라는 믿음으로 간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아보지 못한 위대한 믿음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세상에는 소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많은 권세자들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만물의 통수권을 갖고 계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가 뜻하시면 그 어떤 일도 하시고,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온 세상을 그 뜻대로 움직이시는 주님으로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1절입니다. 그 후에 나인이란 성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더욱 매료가 되었는지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12절을 보면 성문에 가까이 이를 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수도 예수님을 따르는 수만큼이나 제법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맨 앞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고 많은 성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중동은 기온이 높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우리나라처럼 3일이나 5일을 놔둘 수 없습니다. 11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도 그 날로 묻힌 것을 보면 그도 그 날 숨져서 장지로 가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가까운 사람들은 그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처음엔 죽음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안 죽었어, 빨리 눈 좀 떠봐!” 수년 전 한 목자의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아침에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 날로 병원 장례식장 영안실 냉동칸에 안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자의 어머님은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원 바닥에 주저앉으셔서 아버지 추운 데 계시면 안 되니까 빨리 문 열라며 반 실성하신채로 통곡을 하셨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 함께 하던 분이 한 마디 작별 인사 없이 영원히 떠났다는 것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부정을 하다가 충분한 애도기간을 거쳐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를 마음에서 떠나보냅니다. 그런데 그 날 죽어서 그 날 장사를 지내야 합니다. 마음에서 미처 정리도 안 되었을 테니 그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인적상황이 어떻게 됩니까? 노인입니까? 노인이라면 호상이라고 말합니다. 중년의 아저씨입니까? 그러면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슬픔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청년이었습니다. 아마 10대나 20대일 것입니다. 추모공원에 가보면 빽빽한 유골함 선반에 10대나 20대에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사진과 약력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몇 개를 읽다보면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과연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주에 한 목자님으로부터 사촌조카가 갑자기 죽어서 조문을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9살이고 서울대 대학원을 나와 유학을 준비하던 자매였는데 그 날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가 잤는데 다음 날 보니 죽었습니다. 부검을 했는데 사인도 없다고 합니다. 왜 죽었는지 무엇이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를 장사지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 동안 뼈 빠지게 공부한 것은 무슨 의미이고 가족들은 이 날벼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요? 죽음은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미스터리를 남깁니다.

 

죽음은 무자비한 면이 있습니다. 공부 좀 잘 한다고 봐주지 않고 힘이 세다고 양보하지도 않고 돈이 많다고 기죽지도 않습니다. 착하고 의롭게 살았다면서 1년 더 살라고 동정해주지도 않습니다. 본문의 청년처럼 나이가 어리고 외동아들이라고 정상참작을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상황을 봐가며 일하지 않습니다. 그의 권세를 거역할 사람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이 세월호 참사 3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광화문을 가면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정이 걸려있습니다. 그 근처를 자주 갔지만 한 번도 자세히 영정을 본 적은 없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 힘들어 진다는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세월호 침몰 동영상이나 희생자들의 마지막 전화 목소리, 문자들, 그들이 남긴 피맺힌 흔적들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한 번도 검색하지 않았습니다. 탈출할 시간이 한 시간 30분이나 있었는데 어른들의 말을 듣고 제 자리를 지켰던 순수한 그들, 제 자식과 같은 나이의 그들을 보고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희생자 중에는 아이들을 탈출시키던 국민대를 나온 한 의로운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탄식하게 하고 슬프게 만듭니다.

 

본문의 죽은 자는 청년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한 어머니의 독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남편을 일찍 여읜 것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인데 하나 있던 아들마저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여성이 받는 스트레스 1위가 자녀와의 사별, 2위가 배우자와의 사별이라고 합니다. 이는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말기 암 진단을 받는 것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스트레스라고 말합니다. 자녀를 떠나보낼 때 부모에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부모로서 자식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왜 하필 내 아이인가 하는 원망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남편도 보내고 자식도 보낸 과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특히 이스라엘에선 남편이 없다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자식이 없다면 기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는 말 그대로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자식을 묻고 그도 그냥 세상을 떠날 것만 같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13절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예수님은 이런 과부를 보셨습니다. 보셨다는 것은 그의 현재의 외적인 모습만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있는 슬픔, 죄책감, 후회, 억울함, 서러움, 두려움 등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그 상황에 동참하여 그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일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죽음의 권세 앞에서 연약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누가 울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웃 주민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주께서라고 말합니다. 계속 예수께서로 말하다가 울지 말라고 하시는 문장에서는 주께서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누구인지 우리는 앞에서 봤습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울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적 전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울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만이 울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여인과 같은 경우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도 죽음의 권세가 영향을 미치는 일은 벌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혹은 예기치 않은 결과나 갑작스런 삶의 변화로 말미암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납니다. 슬픔, 죄책감, 후회, 억울하고 서럽고 두렵고 불안한 마음은 우리 마음에도 일어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입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그리고 예수님은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멘 자들이 섰습니다.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셨을 때 얼음같이 차가운 죽음의 힘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휘감고 있는 죽음의 힘이지만 그 힘이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멘 자들을 서게 하심으로 죽음을 정지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슬픔이 더 이상 퍼지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Young man, I say to you, get up!)”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손을 내밀라하시며 능력을 보이셨던 예수님이 이번엔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5절입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기절하였던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었던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드러누워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도 한 번에 일어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다는 것은 단순히 영혼의 생명만 돌아온 것이 아니라 기력, 생명력까지 돌아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살아나되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란 말입니까? 원하시면 신적 전권을 가지고 명령해서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부활 생명의 권세자이십니다. 앞에서도 백부장의 종에게 들어간 병마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셔서 고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도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만물은 그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이 죽은 자를 살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왕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엘리야가 살립니다. 왕하 4장에서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외아들을 살립니다. 그 상황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구하였고 하나님이 그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나옵니다(왕상17:21,22). 엘리사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아이의 몸 위에 엎드리니 살이 따뜻해졌다고 나옵니다(왕하4:33,34). 그들도 죽은 자를 살렸지만 그들에게 죽은 자를 살려낼 권세가 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이 원하셔서 그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죽은 아이들을 결코 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권세를 빌려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내 스스로가 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물의 주인이요 우주의 사령관으로서 명령을 할 것이니 내가 말하는 것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라고 했고 그는 즉시로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와야 하는 존재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는 자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생명의 권세자요 부활의 능력자이십니다. 그 안에 부활의 능력이 있어서 원하시는 자들을 누구하고 상의하지 않고 살리십니다. 살리시는 주님은 마침내 본인의 몸도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1:4)”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과 제사장들의 모함과 빌라도의 죄로 말미암아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울부짖는 그는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류의 죄를 완전히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버리신 행위였습니다. 무덤은 예수님을 가둬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약속하신 대로 사흘 만에 죽음에서 일어나셨고 돌무덤을 열고 나오셨습니다. 자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 약속, 능력, 구원이 참됨을 확증하셨습니다. 죽음 권세 앞에서 우는 자들을 구원하셔서 영원히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2:14,15)”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영혼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내 인생의 생명력과 소망과 비전입니다. 본 사건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5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난 청년을 어머니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과부가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아들입니다. 아들만 돌아오면 됩니다. 세상을 다 잃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들이 있으면 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을 잃은 과부의 아픔에 동참하셨고 아들을 돌려주셨습니다. 과부는 가장 힘차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아들을 힘껏 안았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인류역사 이래로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던 죽음의 세력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꺾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는 곳에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가장 큰 슬픔의 제목이 가장 큰 기쁨의 제목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과부와 같은 기쁨과 환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키시는 부활의 권세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그 목자는 빚도 많은데 아버지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염려를 많이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 해주시고 어머니의 믿음이 더 굳건해졌고 본인과 동생도 가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돌아보니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정말 소중한 것들을 빠짐없이 채워주셨다고 했습니다.

 

죽음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를 잃고 가족을 잃기도 합니다. 죽음 때문에 의미를 잃고 희망과 의욕과 생의 에너지를 잃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잃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은 돌려주십니다. 과부에게 있어서 외아들처럼 우리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돌려주심으로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삶의 회복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16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와주시려고 찾아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청년이 다시 살아난 사건을 보고 자기들의 죽은 가족을 살려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셨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해석입니다. 본문의 청년도 다시 살아났지만 언젠가는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 부활은 근본적이고 영원한 부활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자 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음을 보여주시는 표적으로서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부활하셨습니다. 또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부활하십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눈물을 그치고 나를 돌보심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만나주시기 전에 저의 삶도 상여행렬을 따라가는 동네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지배를 당했습니다. 저는 공동묘지로 둘러싸인 산 속 외딴 집에서 자랐습니다. 자주 상여소리를 듣고 그 행렬을 보았습니다. 심심찮게 바닥을 뒹구는 유골도 보았습니다. 일찍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고 눈물이 많았습니다. 서울로 이사 와서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어린 시절의 환경이 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하다가도 죽음이 떠오르면 다 부질 없는 짓으로 느껴졌습니다. 수 십 년을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던 할머니를 옆에서 보면서 죽음의 공포에 더욱 시달렸습니다. 이런 제겐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대한 소원이 별로 없었고 지금을 즐기자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저의 관심사는 청춘사업을 하고 낭만을 최대한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돌멩이들과 굼벵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 돌굼터라는 문학 동아리에 들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Slow life을 즐기고자 했습니다. 이태백이나 박인환 시인처럼 술을 마시며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때로 과음을 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엽기적인 행각도 많이 벌였습니다. 이런 저를 친구들은 골때리우스, 골때린스키 등으로 불렀습니다. 말짱한 정신으로 사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반쯤 술에 잠겨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삶에 대한 허무감이 크기도 했거니와 또 사춘기가 그때 왔던 것 같습니다. 저는 늘 섬김과 인정만 받으며 자라온 외아들인지라 자매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늘 차였습니다. 1학년 가을에 슬피 울며 술을 마시던 제게 한 친구는 찾아와 성경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그 말씀은 제 인생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손길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절망 속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만 그렇게 소원이 충만한 양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격이나 생각이 많이 다른 일대일 목자님을 매우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늘 도망갈 타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님은 저를 잡지 못했지만 주님이 저를 잡으셨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는데도 제 몸은 항상 센터로 향했고 말씀 앞에 나아왔습니다. 말씀이 저의 죽은 영혼을 일깨웠습니다. 1학년 겨울 방학 때 기도하는 중에 거듭남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제 안의 불안과 두려움, 허무와 공허감이 툭 끊어지고 생명수가 차오르는 신비한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누구나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몸은 가볍고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을 전도했고 고등학교 은사님도 일대일로 섬겼습니다. 며칠 사이로 180도 달라진 저를 향해 친구들은 정말 골 때리는 일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게 가장 귀한 구원을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비전과 열정과 은사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청년과 같았던 저를 일으키셨고 지난 32년 동안 함께 하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데 미약하나마 사용해주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소심한 편이고 눈물이 많습니다. 최근 2,3년 저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발생한 모든 일들 속에서 저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도 망하고 모임도 망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이런 제게 주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고 통솔하시며 그 뜻대로 움직이는 권세자이십니다. 병마에게도 명령하시고 죽은 자에게도 명령하셔서 생명을 살리는 부활의 능력자이십니다. 더 이상 제 안에서 죽음이 주는 염려와 어둠과 슬픔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저를 일어나게 하는 여러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제가 두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더욱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오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가 죽음 권세 앞에 무력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권세로 우리를 부활시키시며 가장 소중한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부활의 계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