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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요한복음 제9강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7:53-8:36)2018-05-13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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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요한복음 제 9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 / 요한복음 7:53-8:36

요절 / 요한복음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미국의 독립운동가 패트릭 헨리는 1775년 버지니아 의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명연설을 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는 생명과 같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그러면 '자유와 방종이 어떻게 다르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종'을 찾아보니 "제멋대로 행동하여 거리낌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의미입니다. 사전이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자유. 자유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인가요? 아니면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인가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며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7:53절입니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초막절 축제 이후 사람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감람산은 예수님이 때때로 가셔서 기도하시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큰 역사를 섬기신 이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시며 새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신 것을 볼 때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해야 되는가 배웁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면서도 빨리 끝내고 다른 일을 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깊이 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얼마나 효력이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깊이 하고 또 응답을 체험하는 가운데 더욱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하는 모임이 되기를 원합니다.

 

8:22절을 보십시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셔서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2대 사역은 기도와 가르침입니다. 시간이 날 때 마다 기도하시고 가르치기에 힘쓰셨습니다.

 

예전에 마더 배리 선교사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 가장 중요하고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영국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계속 스카이프로 현지 리더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작게 보이는 것을 사용하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3절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종교 지도자들이 한 여인을 끌고 들어왔습니다.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음행은 'the act of adultery'로 간음을 말하는데, 이는 그 성격상 현행범으로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마 종교지도자들이 초막절 축제 후 그런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함정을 만들어 몰카를 설치해 놓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추측은 6절에서와 같이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조건을 얻고자 여인을 이용했다는 것을 볼 때 신빙성을 더해 줍니다.

 

그들은 씩씩거리며 말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제거하고자 열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치밀한 계획 하에 여인을 끌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쓰셨다는 것은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유일한 기록인데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쓰는 시간을 갖으심으로 종교지도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행동을 돌아보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예수님을 다그칩니다. 이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7b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무슨 말입니까?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보라, 자신을 먼저 심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그들의 심령에 비수같이 꽂혔습니다. 그들의 숨은 죄를 빛 가운데로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반박하고자 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슬그머니 하나씩 빠져나갔습니다. 그들은 죄에 속박된 자기를 풀어낼 힘이 없었습니다. 빛의 세계로 나올 자유가 없었습니다.

 

9b절입니다.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들이 모두 물러가자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해야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자를 정죄할 자격이 안 되어 모두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만민의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정죄할 수 있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죄를 못 본 척하고 그냥 넘어갈 수 없으십니다.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죄하셔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시나요?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인의 죄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그냥 없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죄는 결코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없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합니다. 피가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그 여인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그 여인을 대신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기 때문입니다.

 

고후5:21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그녀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십니다. 대신 죽으심으로 그녀를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녀에게 자유를 주신 예수님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주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12-36절은 이상의 사건을 들어 예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앞의 사건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은 어둠에 다닌 것입니다. 자기는 자유롭게 즐기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어둠에 다녔고 생명의 빛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생명이 없는 어둠의 세계, 죽음의 세계에 다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빛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사 그를 따르는 자에게 생명의 빛을 주십니다. 생명의 빛이란 보통 빛이 아닙니다. 칠흑같이 깊게 드리운 어둠을 뚫고 들어가 환히 밝혀주는 강력한 빛을 말합니다. 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이 빛을 신적인 빛(divine light) 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 빛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고후 4:6).

 

사람은 누구나 죄로 인해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갈 때 이 기이한 빛, 신적인 빛을 받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증언하니 참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증언은 참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 곧 진리를 아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빛의 자증성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빛은 스스로 드러납니다. 자증(自證)합니다. 3자가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스스로 존재하시고 자기를 드러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는 또한 증언하는 다른 분이 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예수님을 증언하는 다른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님을 증언하시나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증언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5:37-39).

 

19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성경박사라고 자처했지만 실상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19). 얼마 전에 한 목자님의 소감을 들어보니, 미국에서 신학박사과정을 공부하다보면 결국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야 논문을 쓸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성의 잣대로 성경을 비판하는 것이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성경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머리로만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오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한 말씀을 배우더라도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가실 때가 옵니다. 그가 가신 후에 아무리 찾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사죄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죽습니다. 여기서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것은 단지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신은 소멸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소멸될 수 없습니다. 영혼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러면 영혼이 죽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는 그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2:1).

 

그러면 영혼은 왜 죽는 것입니까? 에스겔 18:4b절은 그 답을 말해줍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죄가 영혼을 죽게 만듭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게 만듭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분명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믿는 길 외에는 구원의 길이 전혀 없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여기서 '인자를 든다'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지 잘 아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이 영적인 눈을 떠 그를 믿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당시에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고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29).

 

30-32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40, 48, 52, 59절을 볼 때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여기며 돌로 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선생 정도로 믿은 것이지 구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유대인들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믿음을 갖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그저 신앙 연륜이 오래되거나, 지식이 많거나, 극적인 체험을 한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씀에 거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계속하여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삼강오륜 같은 책들을 읽고 실천사항들 리스트를 만들어 지키는 것 같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적어가지고 다니면 매일 체크하며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소위 바리새인들의 종교생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사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기도하며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 주어지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알게 됩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지식과 진리는 머리만 사용하면 알게 됩니다. 자기가 어떠한 삶을 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명석한 머리로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면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다릅니다.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영국의 빼어난 지성인 버틀란트 러셀은 나는 왜 크리스천이 아닌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잔인한 하나님을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머리가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그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삶, 곧 그의 말씀에 거하는 제자의 삶을 살 때만이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8:38절에서 빌라도는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그는 진리되신 예수님을 그 앞에 두고도 물은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32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는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참의 근원, 진리의 창조주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32절에서 말하는 진리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은 36절에서도 잘 확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진리는 아들을 가리킵니다(14:6). 아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면 자유란 무엇입니까? 자유란 부자유하지 않은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후 부자유함이 찾아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나아가기가 부자유스럽게 되었습니다. 서로 간의 관계성도 부자유스러워졌습니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부자유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조심하며, 염려하며,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기 안전을 위하여 조심하며,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그 쪽으로 가지 않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쪽"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히브리서 2:14,15절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성경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조심하며, 염려하며, 두려워하여 그 근처에라도 가기 싫어하는 그 무엇, 그로 인해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 그 무엇의 정체가 바로 죽음이라고 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모든 사람은 필사적으로 그것에 저항하며 부자유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단 하나입니다. 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는 이 죽음 문제를 해결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하였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해결책을 내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그로 하여금 우리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사 죽음의 권세를 멸하시고 우리가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않고 참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처럼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사형선고를 받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와 죽음에서 참 자유함을 주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드립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과거 앗수르, 바벨론, 그리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종이 되었지만 영적, 정신적으로 종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온갖 탄압 가운데서도 한 번도 여호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 곧 언약의 백성으로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언약만 지켰습니다. 율법 문구대로만 지켰지 그 정신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를 쌓았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강대국을 의지하였고 세상의 돈과 권력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주는 거짓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남아메리카의 한 부족의 어린아이들은 호박을 이용하여 오리를 잡습니다. 그 아이들은 호박 안을 파내고 자기의 머리를 넣습니다. 그리고 강으로 들어가 호박만 물위에 나오게 합니다. 오리들이 쉴만한 안식처로 생각하고 호박 위에 앉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물속에서 두 손을 꺼내어 오리를 잡습니다. 죄는 호박과 같은 것입니다. 잠시 쉼을 줄 거 같고 즐거움을 줄 거 같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자는 죄에 잡히는 것입니다.

 

죄는 한번 즐겨보거나 가지고 놀 만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서커스에서 호랑이 입속에 자기 머리를 넣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그만 호랑이에 물려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브라를 몸에 감고 묘기를 보이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죄는 그 인생을 파멸시킵니다. 죄의 종이 되는 자는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편 어떠한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까? 36절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돈으로 사람을 죄로 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49:8) 사람의 생명을 속량할 수 있는 값은 영원히 마련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는 그의 보배로운 피, 그의 생명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요, 그의 말씀에 거하는 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이 놀라운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하고 완악하여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 자는 그야말로 곡식창고 옆에서 굶어죽는 자요, 펑펑 터지는 샘 곁에서 목말라 죽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참되게 믿을 때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립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Freedom from something). 그러나 참 자유는 무엇으로 가는 자유입니다(Freedom to something).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유입니다. 참 생명과 사랑의 근원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 마음껏 그를 섬길 수 있는 자유입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껏 이웃을 사랑하고 마음껏 희생하며 섬길 수 있는 자유입니다. 아름다우신 예수님을 닮아가며 아름다운 사람으로 커 갈 수 있는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한 자유를 주시게 되었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시던 무한한 자유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매우 부자유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체포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사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자유도 포기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극히 가기 싫어하는 그 쪽으로 가사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자유롭게, 아주 자유롭게 우리의 자유를 포기하며 주님의 양무리를 섬기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이 높은 시대입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이 자유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유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사람으로 자라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참 제자가 되어 더욱 더 이러한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