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19년 창세기 15강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창세기 22:1-23:20)2019-07-07 21:07
작성자

창세기 15강 메시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22:1-23:20

요절 창세기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창세기 22장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22장은 신앙에 있어서 최고봉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졸업시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본문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하시는 지를 테스트했다는 것입니다. 어쨋거나 참 심오한 말씀입니다. 이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한 가지를 깊이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21장 전반부에 이삭이 젖을 뗀 것이 기록되었고 23장에 사라가 127세에 죽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3살에서 37살 사이인데 4,12절을 볼 때 이삭이 아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지워주신 장작 짐을 지고 갑니다. 이를 보고 학자들은 이삭의 나이를 13살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시험이란 무엇입니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좋은 목적으로 하는 시험과 나쁜 목적으로 하는 시험입니다. 나쁜 목적으로 하는 시험은 사탄이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목적으로 하는 시험은 그 사람의 실력을 테스트하여 상을 주거나 직분을 맡기는 목적으로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신 시험문제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시험문제를 잘 보면 출제자의 의도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고 하면서 이삭을 가리켜 네 사랑하는 독자 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시험은 아브라함이 누구를 더 사랑하는 가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더 사랑하는 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지를 검증하고자 하십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이삭이며 이 이삭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참고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바치라거나 전 재산을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적으로 아브라함이 무엇을 가장 아끼는 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성경에서 명령하는 한 가지 명령을 찾으라고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2:40)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행위를 하지 않으셨으면 우리 존재의 기반인 우주와 만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 의미와 가치와 위상을 가집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며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마땅히 요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아끼고 사랑할 때 모든 삶과 가치관이 정돈되고 우리도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며 신앙의 모델입니다. 따라서 그를 시험하시고 그가 그 시험에 어떻게 부응했는 지는 모든 인생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번제라는 제사의 종류는 완전한 헌신을 말합니다. 제물을 죽인 다음에 완전히 태워 드리는 데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지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절대로 인신제사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는 것은 실제로 그것을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이삭은 죽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루 길도 아닌 삼일길이나 되는 오늘날의 예루살렘 모리아 산까지 가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근처 뒷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했다면 사라의 방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3일 길을 걷게 하신 것은 한번 하나님을 이삭보다 더 사랑하기로 결심했으면 흔들리지 않고 초지일관 그 길을 갈 수 있는 지를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첫째, 아브라함은 고민하거나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이삭을 죽여 바친다는 것은 얼마나 고민되고 힘든 일입니까? 아마 겟세마네 기도에 준하는 몸부림이 있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쫒아낼 때 얼마나 근심하고 고민했습니까? (21;10) 그런데 본문에는 그런 고민과 몸부림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13세 정도이고 신앙은 최고봉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약속을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향에도 그것을 소화하여 감당할 힘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이 명하신 모리아 산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거인이 된 아브라함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딜(deal)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을 가장 사랑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혹시 사라를 바치면 안 될까요?” 라고 묻거나 가진 재산 전부를 바치겠습니다.” 혹은 내 자신을 바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닭이 비싸던 시절에 닭을 잡아먹고 싼 오리 발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두 번째 사랑하는 것을 바치라고 하지 않으시고 가장 사랑하는 것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정확히 이삭을 바치려 했습니다.

셋째,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사라와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사라가 이 영감탱이 드뎌, 치매구만하며 종들에게 아브라함을 포박하라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신뢰하는 종 다메섹 엘리에셀을 불러 허벅지아래 손을 넣고 너에게만 비밀을 털어놓는다며 고민상담을 했으면 다메섹 엘리에셀이 주인님, 그건 아니죠하며 막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사라나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털어놓음으로 그들이 순종의 길을 막아주기를 기대하는 잔머리도 굴리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50km를 걸어 모리아 산앞에 도착했습니다.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했던 성전 산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시온산, 모리아산, 갈보리 산 등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지금은 시가지가 형성되어 산처럼 안보이지만 사실은 산입니다. 아브라함이 멀리서 모리아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삼일 길을 오며 도중에 생각을 바꾸고 돌아 갈 수도 있었지만 흔들림없이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종들을 떼어놓고 이삭만 데리고 모리아산을 올라가려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종들이 막는 것을 차단하고자 함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한 말이 놀랍습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리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We)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22:5b) 이삭이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믿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더라도 부활할 것을 믿은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삭을 통해서 후손들을 번성케 하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에 그 약속을 지키기위해서는 이삭이 다시 살아나야하기 때문입니다(11:18,19a). 즉 아브라함은 언약신앙에 기초한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떻게 부활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신과 그 아내가 죽은 자와 같았는 데, 이삭이 태어난 것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고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을 알고, 부활신앙을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부활신앙이 없는 것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행은 즐겁고 행복합니다. 모리아 산까지 걷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동행은 어떠했을 까요? 아브라함은 번제나무를 이삭의 어깨위에 지웁니다. 물론 자신이 나이가 많아서도 이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가는 아들인데 좀 가혹한 것같습니다. 미안해서라도 저같으면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삭을 축복하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삭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이삭이 아버지와 같이 걷다가 세상에서 가장 애닮은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 “내 아들아, 내가 여기있노라”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참으로 가슴을 저미는 질문입니다. 또 참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기 쉬웠습니까?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이 무너지며 미안하다, 이삭아, 너 눈치챘구나! 돌아가자, 내가 아무리 하나님 사랑해도 이건 아니지!” 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을 파고드는 이삭의 말에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고 초연하게 산을 향해 걸으며 말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말문이 막히는 상황에서 참 놀라운 답변이지요?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다가 난처하고 할 말이 없을 때 성령께서 친히 할 말을 주심을 체험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심습니다. 그로 하여금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게 했습니다. 우리도 후배들, 양들이나 자녀들을 잘 돕는 다고 이런저런 인간적인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심기를 기도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머리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제스처나 눈속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아들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드리려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 하나님이 놀라서 급히 막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합니다. 캠퍼스에 올라가 전도하겠다고 소감에 반복하여 씁니다. 그런 소감 몇 번 쓰면 한 학기가 갑니다. 요새는 아예 쓰지도 않습니다. UBF 세계대표이셨던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던 분이었습니다. 전요한 선교사님은 그분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을 조심하셨습니다. 그냥 가볍게 한번 말해본 것도 어느새 진지하게 그대로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공부를 많이 해도 절대로 실제로 움직이진 않습니다. 공부한 것과 행한 것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행함으로 증명했습니다. 야고보서 2:21-24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우리는 전보다 성경을 자세히 공부하고 깊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맹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행함으로 완성됩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에 대해 연구하지만 실제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에 대해서 연구발표하고 전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에 대해 설교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신앙의 실제적인 면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급히 아브라함을 막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우선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경외’(야레,敬畏)라는 것은 어떤 존재를 무서워하고 크게 여겨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이때 무서워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존중하며 하나님을 세상 무엇보다 크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 부분에서 경외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본질은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투명인간 취급합니다. 청소년 언어로 하면 하나님을 개 무시합니다. 하나님을 삶과 역사 밖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 행세를 합니다. 자기들이 선악을 결정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1:21). 우주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들끼리 좋아하고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삽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창조주인 자신을 정말 경외하는 사람을 원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30b절을 보면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창세기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들에게 존중받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인간들에게 그렇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안타까운 사실이 무엇입니까? 천지창조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첫 사람 아담부터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법신이 아니라 인격신입니다. 그래서 존중받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든 존중받으면 기뻐하고 무시 받으면 슬퍼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말씀에 진지하게 순종하는 것으로 입증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하나님을 무시했지만 한 사람 아브라함이 독자를 바치기까지 자신을 존중하는 것을 통해 위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이런 사람으로까지 성장하는 목표를 가지고 키우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사람을 키우시고 그를 본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일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세워지고 그런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경외합니다. 사람을 크게 여기고 그를 두려워하여 그가 하는 말이 옳든, 그르든 그에게 순종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깁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의 부모님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모세를 키웠습니다. 모세는 출애굽할 때 바로를 무서워하지 않고 출애굽의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왕의 금령이 있었지만 하루 세 번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6:10).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관원들의 핍박을 받을 때에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 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고 하며 자신들은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천명했습니다(4:19).

 

하나님은 축복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가 축복된 인생을 사는 비결은 축복자체를 얻으려고 씨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정말 현명한 사람은 축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경외심을 인정하신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삭대신 번제물로 한 숫양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이 어린 양이 언제부터 준비되었는지 궁금하지만 하여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해두셨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브라질에서 온 파울로 선교사님과 조앤 2세 선교사를 명동에 있는 설렁탕집에 가서 대접했습니다. 제가 좀 바빠서 아침식사시간에 만나서 섬기기 때문에 서운함을 느끼지 않도록 전날부터 어디서 무엇을 대접할지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명동설렁탕으로 정하고 다음날 아침에 그곳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두 부녀가 이야기하는 데 그 전날 조앤이 아빠에게 설렁탕을 먹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조앤을 위해 그 설렁탕집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앤은 백세설렁탕이라는 것을 시켰는데, 저는 그 설렁탕이 조금 비싸지만 국물이 뿌옇고, 버섯이 들어있어 제가 먹던 보통 설렁탕을 시켜주는 게 차라리 낫지 않았나 싶어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조앤은 버섯이 들어간 설렁탕을 먹고 싶었는데 딱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앤은 참 순수하고 겸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매님이었습니다. 아빠와 조앤은 언니가 결혼해서 앞으로 결혼에 대해 자기차례인 것으로 알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분들과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에 대해 나눴습니다. 설렁탕 한 그릇을 먹는 것까지 섬세하게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결혼문제를 인도하시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예비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번성의 축복과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셔 그 씨가 번성하여 셀 수 없이 많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번성에는 먹고사는 문제는 당연히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의 영육간의 후손은 지구의 절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시험은 그가 받을 축복에 비하면 작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의 씨에서 그리스도가 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대통령 100명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100명보다 더 나은 분입니다. 이런 후손을 배출하다니 이것이야 말로 가문의 영광, 조상의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3장 내용은 사라의 죽음과 그것을 계기로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매입한 내용입니다. 막벨라 굴은 지금도 이스라엘 가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유자가 그냥 주겠다고 하는 데 굳이 은 400세겔 (지금 시가로 16천 정도)에 공식 매입하여 확실하게 아브라함과 그 가문의 소유지로 확정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이 가나안땅 전체를 주실 것을 믿는 믿음가운데 행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최고로 하나님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기에 가장 귀한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없을 때 하나님만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마음에 우상이 없어지므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나의 이삭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