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글보기
제목2019년 창세기 9강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 11:27-12:20)2019-05-20 01:37:20
작성자


2019 창세기 9강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11:27-12:20

요절/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학교 공부에서도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 것처럼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담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러합니다. 중요한 포인트를 알면 맥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성경의 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하나인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27-32절은 데라의 족보에 관한 상세한 내용입니다. 먼저 26절과 27절을 보면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는데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였고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였습니다. 밀가는 하란의 딸이었고 하란에게는 또 다른 딸 이스가가 있었습니다. 만약 29절에 나온 하란이 28절에 나온 하란과 동일한 인물이라면 나홀은 조카와 결혼한 셈이 됩니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살아있는 형제가 죽은 형제의 가족을 책임지고 돌보는 당시 문화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여 자식이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데라는 그의 아들 아브람과 손자 롯과,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갈대아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 하였으나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습니다. 데라는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1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참조해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의 사도행전 말씀에 의하면 12:1절은 아브람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 곧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주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NIV 성경과 KJV 성경은 이것을 반영하여 “The LORD had said to Abram(NIV), 또 Now the LORD had said unto Abram(KJV)”으로 과거 완료형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편 NASB 성경은 Now the LORD said to Abram으로 번역하여 아브람이 하란에 거주하고 있는 지금 말씀하신 것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정리해 보면 12:1절은 아브람이 그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인 메소포타미아, 곧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주신 말씀일 수도 있고 그 말씀을 받아 가나안으로 가다가 하란에 눌러 앉았을 때 다시 2차로 반복하여 주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본 메시지에서는 NIV와 KJV의 견해를 따라 그가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주신 말씀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1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아브람이 태어나 살고 있던 고향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사이에 두고 있던 비옥한 메소포타미아(두 강을 사이에 둔 땅이라는 의미) 땅이었습니다. 중국의 황하 강, 인도의 인더스 강, 이집트의 나일강처럼 큰 강이 하나만 있어도 비옥하여 문명의 발원지가 되었는데 강을 두 개나 두었으니 그 비옥함과 풍요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이 지역 사람들은 달의 신 난나르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 밀가 등의 이름이 전부 난나르 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4:2절을 보면 여호수아는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여러 신들의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을 직업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람은 이런 분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참된 신으로 믿고 섬기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일전에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라는 책이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조선의 왕이 얼마나 강한 유교 사상의 영향력 아래 살아갔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국가(家)라는 한자어에서 볼 수 있듯이 왕은 나라라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돌아가신 어른들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또 더 큰 어른인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는 예를 행해야 했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의 절반에 가까운 200년 이상이 돌아가신 어른에 대한 특별한 예를 갖추는 이른바 상장 기간이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은 거의 수도사들이 금욕하며 수도생활하는 것에 준하는 여러가지 고단하고 어려운 절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은 그 삶의 거의 절반을 수도사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 1년에 드려야 할 국가 제사 횟수가 고종 때에 이르러는 무려 500여 차례 이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사의 대상은 조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잡신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이 수십에 달하였습니다. 제사날이 되면 왕은 기일 전에 축문을 쓰고 향축에 서명하고 사당과 제단에서 신을 부르고 첫 술잔을 올리는 일 등을 해야 했습니다. 이와같이 유교 사상과 관련된 각종 행사가 일상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곧 유교가 생활이요 삶이 곧 유교였습니다.


이러한 강한 유교의 영향력은 왕을 비롯하여 온 나라의 사대부 가문, 또 그 가문과 연관되어 일하며 먹고 살아가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깊었습니다. 한국의 기적과 같은 기독교 부흥을 연구한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한국이 만약 지금까지 이와같은 강한 유교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면 기독교의 부흥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36년간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고난을 통해 유교 문화와 사상이 거의 해체되었고 그 사상적 공백 안에 새롭게 기독교 신앙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6년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이라는 고난은 한국 백성으로 하여금 유교 사상이라는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아브람이 난나르 신앙이 깊이 뿌리내린 메소포타미아에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을 떠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그의 고향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은 여러 일가친척들과 인정으로 얽히고 설킨 곳입니다. 저는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노화도라는 남해안의 작은 섬입니다. 윤선도가 귀향갔던 보길도 옆에 위치한 섬입니다. 서울에서 이곳을 가려면 해남 땅끝 마을로 간 다음, 다시 그곳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머나먼 곳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목포에서 하루종일 배를 타고 내린 다음 산을 하나 건너면 저의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라셨던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주민이 전부 저의 어머니의 일가친척입니다. 저의 외할머니만 해도 아들을 여섯이나 낳으셨기 때문에 그 아들들의 부인과 자녀들까지 전부 합하면 그 수가 많고 또 외할아버지의 동생들과 그 동생들의 자녀들을 헤아리면 그 수가 너무 많아 도대체 정확하게 어떤 친족관계인지 항상 헷갈렸습니다. 다시 그 마을을 지나 들판을 가로질러 가다가 산을 하나 더 건너면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라셨던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저를 보고 워메 세왕이 아들이네 하고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그분이 정확하게 나와 어떤 친족관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일전에 아프리카 출신의 한 목자와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아프리카 기준으로 꽤 괜찮은 월급을 받는데 삶이 매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고향의 수많은 일가 친척들에게 월급을 조금씩 떼어서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보니까 대학을 나오고 성공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혈육을 돌보지 않는 무정하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취급되어 고향 사회에서 매장당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와같이 일가친척이 전부 그 근처에 모여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제 새롭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믿음의 삶을 출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뭐 좀 하려고 하면 일가 친척 중 무슨 일이 터져 그 문제를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실제 창세기 13-14장을 보면 그의 조카 롯이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브람이 전쟁터를 뛰어다니는 둥 난리를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알기 전 함께 놀았던 술친구, 게임 친구 등의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가지 끈끈한 인정으로 얽히고 설킨 그의 고향, 그의 아버지 집을 떠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아브람이 이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신 땅으로 가고자 할 때 마음에 불안과 염려,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왔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은 무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는 어려운 조건이지만 안정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지금까지 늘 살아왔던 방식, 익숙한 방식으로 살면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 일가친척의 어려움을 돌보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도 필요한 경우 일가친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가 친척 중 출세한 사람이 있으면 자식의 취업을 부탁할 수도 있었고 갑자기 목돈이 필요한 경우 값싼 이자나 혹은 무이자로 큰 돈을 빌릴 수도 있었습니다. 또 큰 강이 두 개나 옆에 있어서 가뭄이 나도 어려움이 없이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곳이었습니다. 또 뭔가 삶이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난나르 점집에 가서 무당에게 5만원 주고 점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또 스트레스가 쌓이면 말이 통하는 술친구를 불러 밤새도록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속내를 털어놓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를 지지해주었던 모든 경제적 심리적 정서적 기반을 다 포기하고 떠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때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어떤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본문은 4가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모든 것이 익숙한 그의 고향에서 안정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심각한 인생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삶의 가치가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일하여 살다가 그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한 가문이 어떤 곳에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 그 가문이 하늘이 보기에 가치있고 의미있는 가문이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대를 이은 사람은 하늘이 맡긴 사명을 완수했다고 여겼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대를 잇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 하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심정으로 살았으며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심정은 마치 오늘날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알바를 하면서 먹고 사는데 큰 문제는 없지만 안정된 직장이 없으므로 마음으로 번뇌하고 고통하는 청년 취업 준비생과도 같았습니다. 혹은 직장은 다니지만 이 일이 정말 나에게 참된 기쁨과 보람과 만족을 주지 못하여 늘 언제 그만둘까 고민하는 직장인과도 같았습니다. 외적으로는 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해결되지 않는 한 가지 인생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청년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자식이 없는 그의 인생문제를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심지어 자식을 딱 하나 점지해주는 정도가 아닌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복을 주는 것과 이름을 창대하게 하는 것이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지만 NIV 번역을 보면 세미콜론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음: “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복은 히브리어로 베라카로 엎드려 절하여 구한다 (kneel down and ask)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blessing입니다. Blessing은 bleed, 곧 피흘린다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로 고대에 짐승의 피를 흘려 신의 은총을 간구하는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복이란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뛰어넘어 하늘에서 내려주는 은총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도 훌륭한 장수를 칭할 때 먼저 용장(勇將) 곧 용기있는 장수, 다음으로 지장(智將), 곧 지혜로운 장수를 말합니다. 지혜로운 장수는 전쟁에서 지혜가 탁월하여 군사들을 사지에서 건져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장보다 뛰어난 장수를 덕장(德將)이라 말합니다. 덕장은 여러 지장을 그 아래 두고 거느릴 수 있습니다. 삼국지의 유비와 같은 장수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최고의 장수는 복장(福將)이라 하였습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하늘의 복을 받은 장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지혜로운 자들이 무구한 전쟁역사를 살펴볼 때 대체로 뛰어난 장수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이지만 전쟁 중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온다든지 하여 화전(火戰)을 구사하는 쪽에서 큰 낭패를 본다든지, 혹은 갑자기 장수가 중병에 걸려 사망하든지 하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에서 도움을 받은 이가 결정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삶을 이와같이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풍성하게 채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이 살던 세상은 인생의 각 분야를 여러 사람들에게 의존하며 사람들을 관리하던 삶이었습니다. 돈이 필요한 경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돈많은 일가친척집의 대소사를 평소 늘 자기 일처럼 챙겼습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그 친척이 그에게 복이었습니다. 또 누군가 사고를 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고위 관리가 있는 친척 집안의 대소사를 늘 자기 일처럼 챙기고 명절 때마다 큼직한 선물을 들고 그 집 어른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법적 문제가 터지면 그 고위관리가 그에게 복이었습니다. 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을 함께 나눌 술친구를 관리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때에도 그를 만나 밤새 술을 마심으로 인맥관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미지의 땅으로 갈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의 모든 면에 있어서 그에게 복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윤복희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는 젊은 시절 참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문란한 생활로 인해 낙태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회개한 후 부른 노래가 여러분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가수로서 남들보다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그는 이전에 외롭고 쓸쓸할 때 남자를 찾았고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주님께서 그의 위로요, 그의 눈물이요 그의 등불이요, 그의 벗이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부른 노래가 바로 여러분이란 노래였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아브람이 그가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의지하던 모든 것들, 모든 사람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따를 때 그의 삶의 모든 면에서 그의 복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외로울 때에는 그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슬플 때에는 그의 위로가 되어주시며 두려울 때에는 그가 피할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주의 일을 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음으로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한 사람의 의미와 가치를 상징합니다.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은 그의 삶을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그의 고향에 남아 여생을 마칠 경우 그는 수많은 아브라함 가문 사람들 중 평범한 한 사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의 이름은 그의 집안 족보 한 구석에 기록된 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이는 그가 다른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고 인생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 때 그의 삶은 세상 모든 사람과 확연히 구별된 삶이 됩니다. 마치 빛이 비추이면 어둠이 물러나듯 그의 삶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위대한 삶, 그의 이름은 위대한 이름이 됩니다.


다음으로 아브람은 복이 될지라 하셨습니다. 본래 복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 자신이 복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시는 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곧 그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도 ‘아, 나도 아브람처럼 살고 싶다. 나도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한 나의 복이 되시고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을 체험해보고 싶다.’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람의 삶은 수많은 이들에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요 표준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을 기준삼아 아브람처럼 살아감으로 아브람에게 주셨던 복을 자기도 체험하게 된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또 아브람의 삶을 흠모하고 사모하여 자기 이름도 (뒤에 나오는 하나님이 고쳐주신 이름인) 아브라함, 자기 자식도 아브라함, 손주도 아브라함 (구별하기 힘드니까 아브라함 2세, 아브라함 3세) 으로 이름을 붙여주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이 역사 가운데 아브람 한 사람에게만 주신 개인적인 약속이 아닌가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 한 분에게 고유한 사역이면서 동시에 모든 신앙인들에게 십자가가 삶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믿음으로 살기 원하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으로 믿고 영접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과 나의 약속이 됩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 할 때 늘 마음에 불안과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 스펙을 쌓아도 쌓아도 부족해 보이고 뭔가 더 필요한 것 같아 마음이 늘 분주하고 두렵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여 인맥관리를 하려 할 때에 피곤하고 과연 쏟아부은 것 만큼 나올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혹 인맥을 잘못 탔다가 특검 수사에 함께 걸려들어 감방 가는 것 아닌가 불안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지금까지 믿고 의지하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의지하는 새로운 삶으로 여행을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초청의 음성을 “아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믿음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도 축복하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도 저주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본문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고 모든 것을 정리하여 하란을 떠났습니다. 서양 속담에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다 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어느 한 가지에 다 걸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속담을 무시하고 그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이 주신 약속 이 한 가지에 전부 걸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아브람의 비범함과 탁월함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브람처럼 살아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정말 복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아브람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믿음의 길에 첫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는 망망한 바다에 가면 낭떠러지를 만나 다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기고 망망대해를 향해 항해를 출발한 콜럼버스와 같은 믿음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아브람같은 큰 용기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믿음으로 살려할 때 작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을까, 혹시 쫄닥 망하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같은 용기를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이와같은 믿음의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믿음의 길은 결코 그 초창부터 화려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그 땅은 이미 가나안 사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답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약속을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약속을 믿고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중심부인 벧엘 동쪽으로 옮겨 그곳에서도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는 그가 예배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그는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주시리라 약속하신 그 말씀을 붙들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10절을 보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가득 터잡고 사는 것 까지는 그렇다 쳐도 기근까지 찾아올 때 아브람이 다소간 시험에 들기 쉬웠습니다. 그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에는 큰 강이 있어 기근으로 인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가나안 땅은 일정기간 비가 오지 않으면 곧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문제없이 만사형통한 것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근도 만나고 여러가지 어려움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과정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아브람의 믿음을 크고 강한 믿음으로 단련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무튼 아브람은 기근의 어려움이 너무 커서 나일강이 있는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아브람이 마음 가운데 아리따운 그의 아내를 보고 애굽 사람이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을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당시 시대 분위기 가운데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아내를 누이라고 애굽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브람은 아내를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후처로 빼앗기는 참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가로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습니다. 이는 아브람의 믿음의 삶에 닥친 큰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일로 인해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는 아브람을 불러 왜 그를 아내라 말하지 않았느냐 말하고 다시 그의 아내를 아브람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한 문제를 도와주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인이 때로는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또 그로 인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칫 실수했을 때에도 그것이 고의적인 죄가 아닌 경우,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편이 되어주시고 그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한 문제도 도와주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도 사람들의 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운 방식, 곧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새로운 길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믿음으로 살도록 초청하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 청년들을 향해서도 동일한 약속의 말씀, 초청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초청의 말씀에 우리 청년들이 다 믿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