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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창세기 10강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창세기 13-14장)2019-05-26 08:5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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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0강 메시지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13,14장


요절 : 창세기 14:19,20a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 전투에 대한 승리의 확신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왔습니다. 아브람에게는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했습니다. 그가 네게브에서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렀고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을 처음 제단 쌓았던 곳이라고 부르는 데 사실은 두 번째인데 본격적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 그곳이어서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그는 아마도 감사, 회개, 결단의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5-7절을 볼 때 아브람과 함께 롯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함께 하니 롯도 로또를 맞은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니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브람의 가축을 돌보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돌보는 목자들끼리 다툼이 잦아졌습니다. 7b를 보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 땅이 비좁았다는 보충설명이면서 동시에 혈족이자 믿음의 가족인 아브람과 롯의 식구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아브람은 어떤 결정을 내립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롯을 불러 첫째 친족끼리 서로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좀 거리를 두고 살자고 말했습니다. 셋째로 땅을 선택할 때 우선권을 롯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롯은 이 때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삼촌이 먼저 하셔야죠” 한마디도 하지 않고 보기에 좋아 보이는 요단쪽 물 좋은 곳을 선택했습니다. 요단강이 흐르고 있어 수풀과 목초지가 잘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당시만 해도 소돔과 고모라 유역이 심판을 받기 전이라 에덴동산과 같고 애굽의 나일 강 유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했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물렀습니다. 도시란 성벽이 있는 성읍을 말합니다. 아브람은 성벽이 없는 마을에서 집을 짓지 않고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반면에 롯은 도시를 동경했습니다. 그는 삼촌 손에 끌려 떠나왔지만 대도시 고향 우르가 늘 생각났습니다. 대도시에 살다가 가나안 시골에 살자니 너무 삶이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애굽에 갔을 때 다시 문화생활의 맛을 보고 돌아오니 살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장막생활보다 안정된 도시생활을 선호했고 좀 더 나은 도시로 옮겨갔습니다. 결국 그는 옆으로 걷는 게처럼 삼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소돔성쪽으로 조금씩 장막을 옮겼습니다. 소돔은 사해 남부 도시중 가장 발달된 도시였지만 그 성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악하여 큰 죄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죄가 단순히 도덕, 윤리적인 수준을 넘어섰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 창조질서를 뒤엎는 영적인 죄악을 스스럼없이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그런 곳을 부러워하며 그곳으로 주민등록을 옮기고 그곳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14-18절은 좋은 땅을 얌체 같은 롯에게 양보하고 손해의식에 시달리는 아브람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북, 남, 동, 서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이는 땅을 다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믿음에 기초해서 좋은 땅을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막상 양보한 다음에는 손해의식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아브람이 양보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나안 땅 전체를 주시겠다고 위로하시며 그것을 바라보라 하셨습니다. 롯에게 양보한 것보다 최소 100배는 더 넓은 땅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들을 다 버리고 자신을 따른 제자들에게 100배의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막 10:28-30). 단기간에는 손해처럼 보이나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믿음으로 좋은 것을 양보하고 버린 사람들이 그 양보한 것이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채워주십니다.


아브람은 롯이 아버지가 없어 돌보고자 하는 책임감으로 롯을 데리고 다닌 점도 있지만 자손이 없게 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보험용으로 데리고 다닌 점이 있습니다. 롯은 어떤 면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롯이 떠나자 아브람은 후계자 문제는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후계자는 물론이고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실 땅과 자손을 생각하며 가나안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땅을 밟으면서 마음을 넓히고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믿음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롯은 가나안의 경계에 있는 소돔성을 찾아갔지만 아브람은 가나안의 남부 중심지 헤브론의 상수리 수풀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위로와 비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단을 쌓았습니다.


14장 내용은 롯이 거주지로 선택한 소돔성이 큰 전화에 휩싸이고 롯이 전쟁포로가 되었는 데 아브람이 참전하여 구출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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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절은 전쟁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이 전쟁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이며 국제전입니다. 메소포타미아 4개 연합과 가나안남부 5개연합이 싸운 전쟁입니다. 니므롯 1인이 통치하던 메소포타미아제국은 여러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바벨탑이 있던 시날 땅은 아므라벨이란 사람이 통치했습니다. 시날외에 엘라살, 엘람, 고임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최강자는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었습니다. 그는 니므롯만 못했지만 메소포타미아 여러 나라들에 영향력을 미치고 가나안 나라들을 다스렸습니다. 그가 다스렸던 엘람은 지금의 이란으로써 매우 호전적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전쟁은 소돔 왕 등 5명의 가나안 남부 왕들이 그돌라오멜 통치 13년째 그돌라오멜 섬기는 것을 그만둠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섯 왕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사해 남부에 위치하여 다른 가나안 족속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메소포타미아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쉽게 쳐들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이한 생각을 했던 것같습니다. 하지만 그돌라오멜은 다음 해 메소포타미아 3개 나라를 규합하여 그들을 이끌고 쳐 내려왔습니다.

5-7절은 그돌라오멜 동맹군들이 가나안 남부 동맹군을 치러 온 루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모두 요단강 동쪽입니다. 그들은 요단강 동쪽 나라들을 초토화시키며 사해남부쪽으로 접근했습니다. 요단강 동쪽 나라들을 치면서 남하한 것은 아마도 그들에게도 본 때를 보여줌으로 사해남부 다섯 나라처럼 반역하려는 생각을 아예 갖지 않도록 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돌라오멜 동맹군이 요단강 동쪽 루트를 택함으로 아브람은 이런 전란의 참화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반면에 롯은 죄의 낙을 위해서 소돔성을 선택한 결과 전란의 참화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게 되었습니다.


8-16절은 어떻게 사해동맹군이 패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롯이 전쟁포로가 되어 끌려간 내용입니다. 양 동맹군의 전쟁은 사해근처 싯딤 골짜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3,8,10) 싯딤 골짜기는 울창한 숲입니다. 이곳은 사해동맹군이 은신하여 메미동맹을 공략하기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았습니다(14). 그래서 메미동맹을 유인하여 그들을 그곳에 빠뜨려 죽여 역청대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진도앞바다의 울독목을 잘 이용하여 대승을 거둔 것처럼 말입다. 그런데 사행동맹군은 어떠했나요? 사해 왕들은 1년동안 전쟁준비를 전혀 해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홈그라운드라 할 수 있는 싯딤골짜기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승리할 어떤 전략이나 전술도 연구해 두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악된 도시의 왕들이라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기보다는 먹고 즐기는데 빠져있었기때문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등이 전란에 휩싸인 것은 죄가운데 살던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 그리고 롯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이제 롯의 남은 운명은 전쟁포로로 끌려가 이방 땅에서 노예생활하다 죽는 것이었습니다(12).


13-16절은 롯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아브람과 그의 놀라운 승리입니다. 소돔성에 살고 있던 어떤 사람이 도망쳐서 아브람에게 롯이 포로된 사실을 알렸습니다. 아브람은 그때 마므레라는 사람의 상수리 수풀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므레는 에스골, 아넬을 형제로 두고 있었고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사로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어떤 결정을 내렸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쫒아가서.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합니다. 인간적으로 정말 무모해 보이는 결정입니다. 마므레 동맹문까지 1000명도 안되는 병사로 10만은 될 대군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목자들로 구성된 민병대 수준으로 어떻게 정규군들을 이긴 단 말입니까? 그런데 자식이 물에 빠지면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듭니다. 아브람이 앞뒤 안 가리고 참전을 결정한 것은 아브람이 롯을 자식처럼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의 승패를 떠나 롯을 구해야한다는 일념으로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들은 가축을 돌보는 목동, 목자들로서 아브람이 데리고 있던 종들이었습니다.


단은 북부이스라엘의 끝으로 헤브론에서 단까지는 약 240km 거리입니다. 밤에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아브람 일행은 시속 40km로 달리는 말들을 타고 추격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야간 기습작전을 구상했고 여러 대로 나누어, 자고 있던 매미동맹을 기습했습니다. 이 작전은 훗날 기드온이 사용한 야간기습작전의 원조입니다. 깨어있는 자가 잠든 자를 이깁니다. 야간기습으로 동맹군의 본진을 격파한 아브람은 다메섹 북쪽 24km의 호바까지 쫒아가 모든 빼앗겼던 것과 롯과 롯의 재물과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습니다. 믿기지 않는 승리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 참전해서 롯을 구출한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참 사랑입니다. 롯은 어떤 사람입니까? 삼촌에 대해서 최소한의 예의도 없고 얌체처럼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최소 10년간 아들처럼 섬겨주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이익만 챙겼습니다. 10년 이상 믿음을 배웠으나 영적 가치관이 안되어 소돔성으로 가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 놈 잘됐다” 하며 고소해하고 나몰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런 예의없고 이기적이고 믿음없는 자를 위해 목숨건 참전을 결정합니다.

 

이런 아브람에게서 우리는 그의 후손이신 예수님의 참 사랑을 엿봅니다. 예수님은 쓸모없어 보이는 청년을 위해 돼지 2천 마리를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훌륭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능력을 보일 때는 “호산나” 하다가 무력한 모습을 보이자 금방 등돌리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던 그런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살고자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모르오”“내가 예수를 알면 사람자식이 아니요” 라고 했습니다. 이 말들이 예수님에게 들리는 거리에서 이루어졌는 데 그의 말들은 예수님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찾기 위해 갈릴리 바닷가로 가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그 한없는 사랑으로 그를 품으시고 그를 다시 수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합니다. 소망스러운 사람, 실망스런 놈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세상에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사실입니다. 동역자들도, 양들도,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결정적인 순간에 등돌리고 자기 유익을 쫒습니다. 이때 사람은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참 사랑이란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 실망스러운 사람, 더 나아가 배신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다보면 결국 실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대했던 사람에게 실망할 때 더 실망이 큽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에게 실망하면서 참다운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랑이란 결국 나를 실망시킨 사람, 한마디로 배신자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롯에 대한 아브람의 사랑은 영원히 빛나는 사랑이요 예수님의 죄인들에 대한 사랑의 예표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잠언 24:11절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가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단까지 쫒아가 롯을 구원한 아브람처럼, 사자를 뒤쫒아가 그 입속으로 들어가는 양을 그 입에서 건져낸 다윗처럼 한 영혼을 구원하는 목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얼떨떨하면서도 살짝 우쭐거리는 마음도 들었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나안 왕들보다 낫다” “내가 최고야” 라는 생각도 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의 기드론 골짜기 상류 왕의 골짜기에서 두 사람이 아브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람을 환영하고 축복하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은 살렘 왕 멜기세덱이었고 다른 사람은 소돔 베라 왕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이 먼저 아브람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그는 살렘의 정치적 왕이면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의의 왕입니다. 당시에 아브라함 말고도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특히 멜기세덱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수고하고 지친 아브람과 일행을 격려했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19,20a를 보십시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축복이란 미래에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문에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단지 과거의 승리를 해석하고 정리해줄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축복이란 승리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 원리를 손에 쥐어 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승리한 원인입니다. ‘주재’라는 말은 ‘만들다’ ‘가지다’란 뜻입니다. 천지의 주재란 말은 하나님인 이 천지를 만드시고 소유하신 분임을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이란 말은 만왕의 왕이시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요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아브람은 언제 알았을 까요? 애굽에 내려가서 알았을 것입니다. 바로는 당시 세계최고의 제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브람의 아내를 빼앗아 갔을 때 아브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그때 그는 무릎 꿇고 회개하며 진정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바로를 치셨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사래를 내놓으며 준 물질도 회수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람은 정말로 하나님이 바로보다 높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아브람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높은 그돌라오멜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쫒아간 것은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믿음의 도전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승리하고 올 때 “언성 히어로 아브람, 중동을 쥐락펴락하다.” “중동의 새 강자, 중동에서 가장 높으신 분, 왕의 왕 아브람”이란 뉴스가 포털사이트에 뜨고 아브람이 실검 1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말은 승리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주어요 아브람은 목적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아브람이 자신을 행여라도 높이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도왔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붕뜬 마음이 사라지고 얼마 전 만에도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하나님앞에 울며 간구했던 기억을 되살렸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말을 100% 인정했기에 전리품 중 1/10을 멜기세덱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 것을 깊이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는 하나님이 그 승리와 열매를 주신 분임을 깊이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은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십일조 정신을 알고 실천했습니다.


아브람을 도운 멜기세덱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웁니까?


첫째 승리의 때에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대적보다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알 때 우리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의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바로와 그돌라오멜이 세계에서 지극히 높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앞에서는 10만이 넘는 대군도 지극히 작은 티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훅 불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먼지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열방들을 한방울의 물처럼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승리의 비결은 대적과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믿고 싸웠습니다. 기드온도 미디안의 대군을 작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고 싸웠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강한 자로 교만을 떨던 앗수르 대왕과 그 군대와 싸웠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심을 믿기에 믿음의 싸움이기에 연약한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습니다. 오늘날 강적은 누구입니까? 중2입니까? 가장 강한 자는 사탄마귀입니다. 그는 영혼들을 물에도 불에도 뛰어들게 만듭니다. 이런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애간장이 다 녹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6000마리의 군대귀신들도 굴복시키시고 쫒아내셨습니다. 성령님은 영혼을 늑탈하는 가장 강한 자인 사탄마귀보다 강하십니다. 우리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고 승리의 확신가운데 사탄과의 영적 전투를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소돔왕은 물질적인 사람이었기에 물질을 아브람에게 돌림으로 아브람을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소돔왕의 제의를 거부했습니다. 물질이 충분했기에 더 욕심 부리지 않았으며, 불의한 소돔 왕 때문에 치부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질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앞에 어떤 대적도 지극히 작아집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대적에게도 믿음의 도전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며, 다시 믿음으로 사탄에 도전하여 한 영혼을 구원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