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글보기
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9 강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으니' (누가복음 6:6-19)2017-04-10 21:03:25
작성자

2017년 누가복음 제 9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으니

 

 

말씀 / 누가복음 6:6-19

요절 /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오늘 말씀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실망하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그 해법인 사도양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좋은 사도들이 되며 또한 사도들을 힘써 양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 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또 다른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전 안식일에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음으로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었습니다.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에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까?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은 도구를 다루는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지체입니다. 더구나 주로 쓰는 오른 손이 말랐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어두웠겠습니까? 기록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돌을 쪼는 석공이었습니다. 한 손으로 정을 잡고 한 손으로 망치를 잡고 힘 있고 정교하게 내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오른 손이 말랐으니 그는 해고를 당하였고 다른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취업과 함께 연애, 결혼도 자동포기했습니다.

 

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종교지도자들은 한 손 마른 자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정적인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몇 가지 충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매국노를 제자로 부르심으로 그들의 판단과 반감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제자들을 변호하심으로 요주인물이 되셨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율법, 특히 안식일 법을 파괴하는 율법파괴자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에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예수님을 종교법정에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안식일 법을 어기는 자로 고발하기 위해 필요한 증거를 수집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불쌍한 어린 양인 한 손 마른 자를 미끼처럼 사용하여 가재미눈을 뜨고 예수님의 처신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계교를 아신다면 말씀만 가르치시고 조용히 회당을 빠져나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혹시 한 손 마른 자를 불쌍히 여기고 정 그를 고쳐주고자 하신다면 조용히 제자를 통해 내일 만나자라거나 끝나고 회당 뒤로 와라라는 메모를 전달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를 그들 가운데 세우고 공개적으로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종교지도자들의 사랑 없는 목자의 내면과 잘못된 율법관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등 때문에 사람을 교훈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잠언 28:2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이 참 사랑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생명을 구하고자 하십니다. 반면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한 양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그의 삶이 어떻게 죽어가는 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살인자의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하심과 달리 종교지도자들의 악한 행위를 비교하며 안식일에 어떤 행위가 옳으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안식일 법을 포함한 모든 율법의 배경에 깔려있는 가장 중요한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 없이 행하는 모든 율법준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또한 모든 율법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에게 생명을 재충전해 주기위해 제정되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양이 빠지면 그 양을 건져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한 손 마른 사람은 양보다 훨씬 귀하며 인생의 깊은 수렁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율법의 정신에 맞으며 안식일의 취지에도 맞습니다.

 

  잠간 우리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구약의 계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먹이실 것을 불신하여 경제활동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견해는 어떤 면에서 당시 전통적인 생각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기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율법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법도 그 배경과 취지까지 파악하여 아주 깊이 있고 폭넓은 해석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안식일의 입법자로서 안식일과 율법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설익은 조교수가 경제학원론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저자가 와서 직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율법과 안식일에 대해 잘 가르쳐주시며 그들의 기계적인 율법준수와 사랑 없는 악한 내면에 도전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예수님은 그들이 대답하지 못함을 보시고 한 손 마른 자를 고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첫째로 한 가운데 서라. 아마도 이 손 마른 자는 회당의 뒤편 구석에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른쪽 손을 감추기 위해서 오른 쪽 구석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하는 것은 부담스런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둠을 버리고 빛가운데 나오도록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는 삶에서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로 네 손을 내밀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네 손이 나았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마른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역시 매우 부담스런 명령이었습니다. 그의 오른 손은 움직이지 않는 손이요 부끄러운 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의 손, 순종의 손, 진실의 손을 내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에게 믿음을 심으셨고 순종을 가르치셨으며 빛과 진실의 열매를 온전히 맺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리적인 치유뿐 아니라 내면을 치유하시며 사람을 온전히 고치십니다.

 

  예수님이 도끼눈을 뜨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것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한 영혼의 선한 목자인 것을 보여줍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본 종교지도자들은 노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의 율법과 안식일에 대한 얕은 이해와 사랑 없는 악한 내면이 드러났습니다. 이때 그들은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인정하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를 의논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던 날 밤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목자로 세움 받은 종교지도자들의 배우지 않는 마음, 사랑 없는 내면, 회개치 않는 태도에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실망과 탄식과 문제의식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문제를 목자의 문제, 영적 지도자의 문제로 보시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향을 잡으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은 날이 밝자 자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12명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으로 어떤 권위자의 대리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사도란 예수님을 대신하여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과 함께 일합니다. 예수님이 파송하실 때 어디든 가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일합니다. 또한 장차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예수님의 뒤를 이어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책임성 있게 감당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대신할 사람들을 키우는 것을 사도양성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왜 12명을 세우신 것일까요? 12 란 숫자는 완전수인데 하나님의 3과 세상의 4를 곱한 숫자입니다. 세상을 섬길 새 이스라엘 12 조상의 의미입니다. 교육학적으로 12는 한 유능한 교수가 인격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120명을 사도 양성할 수 있지만 12명만 택하여 키우셨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이고 철저한 교육을 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하고자 하셨습니다. 사실상 당시에도 6000명의 바리새인 성경선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도 몰랐습니다. 양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과 헌신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6000명이 있어도 주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다다익선이라지만 꼭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을 키울 때 한 사람이라도 영향력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계승됩니다.

 

  그들은 온 세상이 무너져도 주님을 따릅니다. 어떤 희생이 있어도 주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배우기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양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내려놓고 섬길 수 있습니다. 함석헌 옹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시는 믿을만한 한 사람의 중요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수라도 그렇게 신뢰할 만한 목자, 마음 놓고 양무리를 맡길 목자들을 키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사도들로 세우셨습니까? 14-16절입니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예수님은 자신을 대신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말 대단한 사람들을 선발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보면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이고 어부들입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학식의 사람들을 뽑지 않으셨습니다. 니고데모, 가말리엘, 힐렐, 샴마이와 같은 최고의 학자들을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의 똑똑함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드러나도록 함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을 보면 아주 다양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최고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으로 불타는 사람들입니다. 요한, 빌립, 도마, 가룟유다 등은 좀 유식한 편이지만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보다는 무식한 것 같습니다. 사도 중에도 유명한 사람들도 있지만 잘 알려있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분들이 누구입니까?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인데 나다나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요한의 형 야고보는 큰 야고보로 유명하지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 별로 유명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 성경은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을 통과해서 유럽에 선교하러 갔습니다. 그가 걸었던 선교의 길을 우리는 산티아고의 길로 부르고 있습니다. 안드레처럼 단순하게 믿는 사람도 있고 빌립이나 도마처럼 쉽게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매국노와 독립운동가가 같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마음속에 칼을 품고 있는 가룟유다까지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을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어떤 사람도 품고 키울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의 목자가 되도록 함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양한 사람들이었지만 공통적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히 배우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인간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은 교만하고 배우지 않습니다. 자기생각을 고집합니다. 그 결과 낡은 가죽부대처럼 신축성이 없어 예수님의 새로운 교훈들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수용성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신실성입니다. 사도들은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체포당하셨을 때 잠간 주님을 떠난 적이 있지만 그전까지 한 번도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신실하게 주님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따라다니며 배웠습니다. 누워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후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이 반영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금은 한없이 부족하지만 장차 큰 목자들이요 예수님같은 성자들이요, 인류의 사도들이 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대개 사람은 그를 키우는 사람의 믿음과 소망대로 됩니다. “호랑이나 물어가 버리면 좋을 놈” “빌어먹을 놈이라 칭하면서 키우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의 소망가운데 사람을 키우면 있으나마나한 사람도 주님의 큰 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소망가운데 우리가 섬기는 분들을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열두 사도들을 뽑으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예수님의 사도양성 방법은 가르침과 함께 field training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높은 산에 가시거나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가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을 데리고 많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삶의 현장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어떻게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지를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이론적인 영적 지도자들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목자들이 되도록 도우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 전국와 예루살렘, 이방 땅에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병든 문제, 귀신들린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모두들 예수님 한분을 만지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 목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는 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영혼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있는 목자가 얼마나 필요한 가 배웠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정치지도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들의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진정한 목자가 없는 문제입니다. 주님은 많은 제자중에서 우리들이 사도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의 직무를 감당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수많은 한손 마른 자, 병든 사람들, 귀신들려 고난 받는 사람들을 건지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소원을 영접하여 예수님처럼 사랑의 목자들이 되어 인생의 수렁에 빠져있고 내면이 말라가는 영혼들을 살려내는 이 시대의 작은 예수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한 손 마른자와 같이 병들고 부자유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은 많은 모임 중에서 UBF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부끄러운 것을 드러내놓는 신배들의 진실한 소감을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도 한가운데 서라”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부끄러운 내면을 드러내놓는 소감을 쓰고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유독 무대에 서는 일이 많은 우리 모임을 통해서 저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셨습니다. 특히 러시안 댄싱, 워십댄스, 듀엣드라마, 뮤지칼, 칸타타를 섬기며 한가운데 서라는 말씀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숨기고 적당히 어둠가운데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힘들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손을 내미는 순종을 감당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저를 자유하게 하시고 병든 내면이 치료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성대와 종로1부를 넘어 전국의 학생들, 때론 다른 센터, 여러 선교지의 형제자매와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판사나 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온전히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종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또한 스탭목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순수하고 겸손한 주님의 종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낮추시고 순수하게 하시는 훈련을 주셨습니다. 그 절정은 제가 동기목자보다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섬에 대사관 운전수로 나가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고등학교졸업자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에 순종함으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순종하는 내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후에 하나님은 저를 스탭목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훈련하신 후에 부족하지만 이 시대를 섬길 사도들을 양성하는 데 쓰고 계십니다. 제가 때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마음이 상하고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적더라도 소수의 사도양성을 잘 감당하여 이 시대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본문에서 종교지도자들처럼 남의 어려움과 아픔을 이해하는 공감하는 것이 매우 부족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근래 몇몇 분을 통해서 제가 공감지수가 떨어진 목자라는 것을 지적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부분에서 민감한 면이 있는 아이를 통해서 제가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섬기는 훈련을 시키고 계십니다. 제가 이런 점에서 더욱 훈련을 받아서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랑의 목자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자와 같은 우리를 네크를 걸고 살려내신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런 예수님 같은 목자들이 있을 때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같은 선한 목자들이 되어 한 손 마른 자 같은 영혼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런 선한 목자들을 네크를 걸고 양성하여 시대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