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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요한계시록 5강 `셀 수 없는 큰 무리 `(요한계시록 6-7장)2019-11-10 20: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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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요한계시록 5강

 

셀 수 없는 큰 무리

 

말씀/ 요한계시록 6-7장

요절/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오늘 말씀을 통해 신앙생활을 능히 감당할 큰 힘과 위로를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계시록이 기록된 당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본문을 통해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먼저 흰 말은 당시 정복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장수를 연상시켰을 것입니다. 또 말을 타며 활을 능수능란하게 쏘는 것은 당시 로마 제국의 동편에 위치한 파르티아의 제국을 떠올리게 하였을 것입니다. 파르티아 제국은 기원전 3세기 중엽 이란계 유목민이 카스피 해 남동쪽에 세운 고대 국가로 로마 제국과 한나라, 인도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으며 중국에서는 안식국으로 불렸습니다. 기원후 3세기 초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파르티아 제국의 병사들은 말 위에서 정확하고 강력한 화살을 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로마군은 이러한 말을 탄 파르티아 군인들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흰 말을 탄 장수가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 이기고 또 이기려 했다는 것은 전쟁을 계획하고 작정했다는 의미입니다.


 

1세기 성도의 눈으로 볼 때 당시 세계는 로마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 로마를 상대로 국지적인 테러를 일으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감히 그 어떤 나라가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5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 역사를 주관하는 주관자가 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이들은 로마 황제가 세계 역사의 주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도미티안 황제가 세상 역사의 주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때마다 내리는 칙령이 세상을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양피지에 기록한 후 인봉한 칙령이 각 지역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총독에게 전달되고 그 총독이 그 인을 제거한 후 읽게 된 황제의 명이 세상 역사를 결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께서 인을 떼시고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며 결정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첫째 인을 떼시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사랑의 주님께서 왜 무서운 전쟁이 일어나게 하십니까? 본문의 배경이 되는 스가랴 6:1-8절을 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스가랴 6:1-8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나 지나친 방식으로 학대한 강대국을 징벌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스가랴 본문에도 네 병거가 나오는데 그 병거는 각각 붉은 말들, 검은 말들, 흰 말들,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스가랴에게 천사는 이는 하늘이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나가고 건장한 말은 온 땅에 두루 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말들이 이끄는 병거를 통해 악을 행한 강대국을 징벌하시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볼 때 이러한 전쟁은 주 예수를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세력을 징벌하시기 위한 전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 제국이 실제로 파르티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2천년간의 역사를 장기적으로 살펴볼 때 주 예수의 통치권을 흉내내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특히 자신을 숭배하도록 한 세력은 반드시 전쟁을 통한 징계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지난 세기 여러 인문학자들은 2차례의 세계 대전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하였다고 인정하였습니다. 2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 이전 사람들은 신은 죽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신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이도, 신의 도움이 없이도 인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도 안되는 나약한 예수의 도덕을 버리고 오른편 뺨을 치는 자는 다시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잔인한 복수를 함으로 강한 나의 모습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명석한 두뇌와 강한 정신을 가진 이들을 사회 지도자로 세우고 나약한 이들은 도태시킴으로 인류 전체가 번성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가르침 위에 제국주의가 발전하였고 제국간의 충돌로 인해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또 그 여파로 2차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2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의 결과 사람들은 인간 안에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훈을 배우고 어떤 권력도 절대 권력이 되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통제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또 힘이 강한 나라가 힘이 약한 이웃 나라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국제적인 감시 장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오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내면의 죄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전쟁은 끝이 없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전장을 누비는 붉은 말은 피비린내를 연상시킵니다. 그 말을 탄 자는 큰 칼을 휘두릅니다. 검은 말은 기근을 상징합니다. 그 말을 탄 자가 저울을 가졌는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라고 외쳤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밀 한되는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 먹을 분량입니다. 보리 석되는 그의 온 가족이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오늘날 버전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하루 알바해서 6만원 벌었는데 한끼 식사에 2만원씩 하여 그것으로 알바한 돈을 다 쓰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정식 식사 대신 값이 절반에 불과한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면 하루 알바한 돈으로 3일은 버틸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일차적으로 본문의 의미는 전쟁이 시작되면 사람이 죽고 그러한 전쟁의 여파로 생필품의 가격이 폭동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실제 당시 전쟁이 시작되면 밀이나 보리같은 생필품의 물가가 5배에서 15배까지 폭등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오늘날 대한민국 청년 실업자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청년 실업자들은 구직 활동을 하면서 1주일에 얼마간 시간을 쪼개 알바하는데 그 알바한 돈으로 편의점 김밥이나 도시락을 사 먹으면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입니다. 겨우 직장을 구한 사람의 경우도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겨우 직장을 구했지만 매달 받는 월급으로 집세, 생활비 등을 지출하고 나면 저축할 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자꾸 미루게 됩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자녀 양육비와 교육비를 생각하면 결혼하여 출산하는 것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신문을 펼쳐보면 전세계적으로 이러한 청년들의 고민은 동일합니다. 남미의 한 나라에서는 지하철 값을 50원 올렸더니 전국적인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겨우 50원 올린 것 가지고 이렇게 폭동을 일으켰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들을 분노케 한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30여년 전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모든 것을 민영화한 것입니다. 대중교통도 민영화하고 의료보험도 민영화하였습니다. 민영화한 결과 그것을 운영하는 사업가들은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의료보험 회사의 경우 많은 지출이 발생할 수 있는 노인이나 가임기 여성들에게는 2배의 의료보험비를 받았습니다. 한 예로 50대 엄마, 20대 딸, 20대 아들을 둔 가정의 경우 한 달 의료보험비가 50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 수 있는 병원은 민간 보험회사에서 지정한 병원 딱 한 군데였습니다. 그 병원에서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다른 병원을 가면 비보험이 되었습니다. 또 약도 조제약이란 개념이 없어서 한 번 사면 무조건 상자로 사야 하는데 감기약 하나 사는데에도 5~6만원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부 장관이 새벽에 지하철을 타면 할인을 해 주니까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지하철을 타면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칠레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 어디든 기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돈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황금 만능주의,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등 따시고 배부르면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돈을 숭배하고 자기 배를 숭배하는 것은 반드시 기근을 불러옵니다.

 

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더 과학기술문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생명공학을 발전시켜 어린애 머리만한 감자를 만들고 다리가 4개 달린 치킨을 생산해내면 이러한 기아와 기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경제학자들은 경제 공부를 많이 하여 정확한 경제적 처방을 내리고 시스템을 만들면 이러한 분배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돈을 숭배하는 죄를 회개하고 돈 대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자기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기심을 회개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어린 양을 위해 살며, 구체적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통해 이러한 기근과 기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번에 종로 7부 가을 수양회에서 나환자들을 위한 애양원 설립의 배경이 되는 두 분의 선교사들을 연구하여 발표하는 심포지움을 하였습니다. 두 분의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뛰어난 의사로서 안정되고 부요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을 자기만을 위해 살기보다 그들을 구원하신 주를 위해 살고 그들보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젊은 날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나라 코레아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이 두 분의 삶은 한국인의 마음에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같은 동포인 그들도 버린 나환자들을 이억 만리에서 온 코쟁이 미국인들이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는 것을 보고 최홍종 씨는 그가 가진 땅 천평을 기증하여 애양원 병원 건립의 기초를 쌓게 하였습니다. 또 손양원 목사는 다른 목회지를 마다하고 나환자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 김인권은 서울대 의대 교수가 되는 꿈을 포기하고 30년간 나환자들과 소아마비 환자들을 수술하며 돌보는 헌신적인 의사가 되었습니다. 두 미국인 선교사의 나눔과 베품의 삶이 여러 한국인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었고 그들의 삶의 목표를 자기를 부요하게 하는 데에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에 여러 어려움, 특히 경제적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 대신 주님을 경배할 때 하늘의 이름없는 새도 먹이시고, 이름없는 들풀도 아름답게 옷입히시는 주님께서 모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주거할 공간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믿고 나에게 있는 것을, 나의 시간, 나의 정성, 나의 노력, 나의 물질을 비록 작은 분량일지라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나눔의 삶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다섯 째 인을 떼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넓은 의미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삶의 최우선권을 두고 산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제단 아래에 있다는 것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흘렸던 붉은 피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졌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의를 위해 살다가 순교의 붉은 피를 흘린 첫 번째 인물로 아벨이 나옵니다. 아벨 이후 수많은 이들이 의를 위해 살다가 순교의 붉은 피를 흘렸습니다. 이들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들이 흘린 피를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 위에 생명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년 8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온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붉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의 순교의 피가 적셔진 대동강 물은 평양에 흘러들어가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하였습니다. 주기철, 손양원 등 수많은 조선 기독교인들이 그의 순교의 정신을 따라 살게 되었고 평양에 대부흥 운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 피를 갚아 주기를 탄원하는 순교자들에게 그의 형제들도 죽임을 동하여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순교자들이 흘린 붉은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교자들이 흘린 붉은 피의 터전 위에 더 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영접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12-17절은 어린 양의 진노의 날, 곧 최후의 심판의 날이 어떠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땅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게 되고 달은 피같이 됩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처럼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하늘은 과거 책의 역할을 했던 두루마리를 폈다가 다시 말을 때 순식간에 말리는 것처럼 말려 떠나가게 됩니다. 또 산과 섬이 움직이게 됩니다. 이러한 최후의 날은 주 예수를 경배하는 대신 돈과 권력과 세상 쾌락을 경배하며 탐하던 자들에게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됩니다.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를 당하느니 차라리 산과 바위 밑에 깔리는 편을 선택하려 합니다.

 

7:1-4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7장은 심판의 일곱 번째 인을 떼는 내용이 나오기 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심판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철저히 보호하시고 지켜주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권세를 받은 네 천사들로 하여금 그가 보낸 다른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에스겔 9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시대 당시 예루살렘에는 우상 숭배가 만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그러한 우상 숭배로 인해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그러한 자들의 이마에 표를 그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가 있는 자들을 심판 가운데서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이마에 인침을 받은 이들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울며 회개한 자들입니다. 더 나아가 주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고 영접한 자들입니다. 이제는 주 예수를 그들의 구주요 왕으로 영접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 가운데 그러한 인침을 받는 자가 총 144,000이었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이스라엘 12지파의 목록 중에 유다 지파가 맨 앞에 등장합니다. 이는 메시야 예수께서 유다 지파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단 지파는 목록에 없습니다. 이는 단 지파가 우상숭배의 원조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으나 확실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가 하면 에브라임 지파 대신 요셉 지파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는 에브라임과 요셉을 동일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명이 있으나 역시 확실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인침을 받은 자는 각 지파 별로 12,000이었습니다. 서론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계시록에서 숫자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12,000은 12x1,000입니다. 12는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1,000은 무한을 가리킵니다. 민수기에 기록된 각 지파의 숫자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성인 남자, 곧 각 지파별 병력의 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각 지파별 12,000의 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영적 군사의 수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지파별 12,000을 다 합하면 144,000이 됩니다.

 

주 예수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사탄의 권세를 박살내시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지기까지 세상은 일시적으로 악의 세력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악의 세력의 공격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 대신 돈과 쾌락을 숭배하고 엎드려 절하게 하려는 영적인 싸움이요 전쟁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을 선포할 때 영적인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내 마음에서 굳게 붙들 때 내 내면을 파고드는 사탄의 음성을 격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가 강력한 무기입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방의 전진 부대는 후방의 대포 부대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무전병이 포격할 위치를 좌표를 보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후방의 대포 부대가 쾅쾅 대포를 쏩니다. 이때 전방의 부대는 힘과 용기를 얻어 전진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이와같은 대포 부대입니다.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적진을 향해 대포가 날아옵니다.

 

우리 모임에도 각 대륙별, 나라별, 지부별로 여러 지파가 있습니다. 우리 종로 센터도 부별로 나뉘어 있습니다. 종로 1부부터 시작하여 종로 10부까지인가 세다가 언제부턴가 고유한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종로 1부는 종로 개척의 시작이요 가장 선봉 챕터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종로 2부 역시 종로 1부와 함께 동시에 캠퍼스 개척을 시작했고 또한 기라성같은 세계적인 선교사님들 중 많은 분들이 종로 2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종로 7부는 숫자는  많지 않지만 영적인 군사로서 부족할 것이 없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특히 종로 센터는 여러 지부 가운데서도 영적 전쟁의 선봉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을 하다보면 적군의 파상공세에 떠밀려 잠시 수세에 몰리는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캠퍼스 가운데 장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를 기반으로 적군이 청년들의 마음에 불신의 불화살을 날리고 있습니다. 온통 캠퍼스가 불신의 불화살로 인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청년들의 마음에 말씀을 통해 믿음을 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줌으로 영적 전쟁에서 다시 승기를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12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44,000은 12지파의 수를 합한 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2x12x1,000으로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수는 딱 144,000이 아닌 셀 수 없이 큰 무리입니다. 이들은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먼저는 주 예수께서 옷입혀 주신 의의 옷을 입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의 우상숭배의 영향력에 물들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종려 가지를 들었다는 것은 이들이 돈이나 쾌락을 경배하지 않고 어린 양 되신 주 예수를 경배하는 자들임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이에 모든 천사가 화답하여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였습니다.

 

이 장면은 하늘의 예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늘에서 이와같은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땅에서 각 대륙별로, 지역별로 흩어져 드리는 예배는 때로는 작고 보잘 것 없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은 그렇게까지 웅장하지 못합니다. 그저 온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찬양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그러나 하늘 편에서 볼 때 온 땅에서 드리는 예배가 합하여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의 웅장한 예배가 됩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양이 온 우주에 울려퍼집니다. 그들의 찬양 소리는 참으로 아름답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천사들이 화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탄 연합 예배 때 찬양을 부르다보면 때로는 자신과 주변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고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거리를 두고 전체의 찬양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지휘자는 그 모든 소리를 합하여 듣기 때문에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다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며 헌신하며 예배드리는 삶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나 한 사람이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삶은 때로는 작고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것은 장엄한 하늘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한 부분입니다. 나 한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빠지면 전체 하늘 예배에서 소중한 부분이 빠지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드리는 예배가 지휘자 되시는 하나님 보실 때에는 참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배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할 때 이 땅에서 신앙생활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큰 위로를 받고 힘있게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가을학기 계시록 말씀을 통해 때로 작고 초라해보이는 나의 신앙생활이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것을 생각하게 힘을 내어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17절은 주님께서 주실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늘의 예배는 장차 우리가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 드릴 예배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다시 고난이 없습니다. 주림도 없고 목마름도 없고 해악도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흘렸던 모든 눈물에 대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사모하고 기대할 때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수고를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가을학기 계시록 말씀을 통해 이 땅을 향한 소망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늘 소망을 붙들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사모하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