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글보기
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12 강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누가복음 7장 36절 ~ 50절)2017-05-04 20:47:50
작성자

 

 

말씀 / 누가복음 7:36-50

 

요절 /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할 때 우리가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십니까? 얼마큼 사랑하십니까?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십니까?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인색하게 사랑했던 한 바리새인과 정말 예수님을 많이 사랑한 한 여인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분들을 통해서 왜 예수님을 인색하게 사랑하는 지, 어떻게 예수님을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지 그 비결을 배우고 우리도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누구의 초청을 받으셨습니까?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놀랍게도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든 가시는 분입니다. 그의 초대에 응하사 그의 집에 가서 식사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7,38절을 보십시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식사자리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동네에서 죄 지은 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47절에 보면 그녀는 죄가 많은 여자였습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39절의 죄인이란 말이 공인된 죄인 곧 창녀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학자들 중에 그녀를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율법에 의해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녀를 보호해 주시고 그녀에게 죄사함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이 예수님의 사죄의 음성으로 그녀는 죽을 처지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초청받지 않는 손님이었습니다. 당시 관례에 의하면 공인된 죄인들은 4규빗(1.8m) 이상 접근하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다른 집도 아니고 거룩함과 의로움의 대명사인 바리새인의 집에 온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니 바리새인 집에도 용감히 들어왔습니다. 그녀가 온 목적은 사랑하는 예수님께 자신이 간직하여 온 귀한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뒤로 와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발을 적셨습니다. 우리는 눈물이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옛날에 어떤 목자님은 양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위해 기도실에 가서 양파를 까면서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적실 정도로 많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울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울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보셨습니까? 버림받아서 자기연민으로 울어 보신 적은 있으시지요! 눈물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도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과 같은 글이 떠오릅니다. “감동을 느낄 때 우리는 정화되고 행복해지며, 신성해진다. 그리고 감동을 받은 사람이 또 감동을 줄 수 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여인은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발은 가장 낮고 천한 신체이며 반면에 머리털은 사람의 영광이니 여인이 자신을 가장 낮추고 예수님을 가장 높힌 것입니다. 또한 여인이 소중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가를 보여줍니다. 이어서 여인은 예수님 발에 입 맞추었습니다. 45절을 볼 때 그녀는 단 한번 예수님의 발에 억지로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옥합에 소중히 담긴 향유를 예수님 발에 다 부어 드렸습니다. 당시 옥합의 향유는 여인의 소중한 결혼의 꿈과 소망을 의미했습니다. 귀한 향유가 예수님 발위로 철철 흘러내렸습니다.

 

 

당시 VIP 손님이 오면 종이 그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입맞추는 것은 뺨에, 향유는 머리에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여인의 헌신은 모두 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여인이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자신과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발 딛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요 예수님이 그 발로 골고다를 걸으시고 그 발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부서지고 망가질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부담스럽게 보이는 섬김을 그만 됐다하시며 뿌리칠 수도 있으셨습니다. 또 여인의 이런 과도하게 보이는 헌신을 중지시킬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전폭적인 사랑과 헌신을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런 여인과 예수님을 바라본 바리새인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속으로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선지자라면 여인이 부정한 여인인줄 다 알텐 데, 그녀의 접촉을 허용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죄인을 멀리하고 상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창녀 같은 여인의 접촉을 허용하는 것을 그녀와 한 통속이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런 속 생각과 판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부르사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41,4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한 사람은 5000만원을, 다른 사람은 500만원을 빚졌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갚을 것이 없었습니다. 500만원이나 5000만원이 아주 큰 것처럼 안보여도 사채의 경우는 그 정도의 금액이면 금방 눈덩이처럼 이자가 불어나 위협을 당하거나 노예계약서를 쓰게도 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채권자는 두 사람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채권자를 사랑하겠느냐고 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10배 더 큰 금액을 탕감 받았으니 10배 더 사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옳다고 하시며 시몬을 교훈하십니다. 44-46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예수님은 그 여자를 들어 귀감을 삼으시며 시몬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적은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중동에서 손님이 왔을 때 종이 발을 씻겨주든지 아니면 최소한 발 씻을 물을 주어 식사 전에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 기본 도리였습니다. 시몬은 이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집에 왔을 때 입 맞추며 환영을 표시하는 것도 사람을 맞이하는 최소한의 도리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식사에 초청한 손님의 머리에 흔한 감람유라도 한 방울 떨어뜨려주는 것이 또한 손님대접의 에티켓이었는데 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을 공부할 때 한 목자님은 시몬은 도대체 왜 예수님을 초청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도 내가 이러려고 초청을 받았나라고 민망하고 불쾌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행동은 시몬과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여인은 눈물이라는 최고급수로 예수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머리털 이라는 최고급 타월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시몬은 예수님 뺨에 한 번도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여인은 예수님의 가장 낮은 지체인 발에 민망할 정도로 많이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몇 천 원 하는 식용유수준의 저가 향유가 아니라 옥합에 담긴 한 병에 몇 천 만원하는 최고가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상과 같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최소한의 것만 하고 그 이상은 절대 하려하지 않습니다. 하더라도 억지로 하며 강탈당하는 심정으로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최고의 것들로 주님을 섬깁니다. 넘치도록 섬깁니다. 심지어 자신의 가장 귀한 것, 자신의 소중한 꿈이 담긴 것을 주님께 드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평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들은 겸손하여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을 너무나 기쁜 마음과 얼굴로 합니다. 두 눈에는 항상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가 어디서 발생할까요? 47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이 말씀에 의하면 시몬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적은 사람, 그리고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많은 사람인데 그 사랑의 많고 적음은 죄사함 받은 것이 많고 적음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47절 하반 절을 볼 때 그녀의 죄는 사실 이미 사해졌습니다. 죄사함은 그녀가 주님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의 대가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죄사함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아무 공로없이 주어집니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이 말씀은 그녀가 죄사함을 많이 받은 결과,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많이 받았다고 생각할 때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부부싸움이나 부모자식간에 갈등할 때 주로 쓰는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내게 해준 것이 뭔데” “아빠가 우리한테 해준 게 뭔데아닙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50만원 정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식사 한끼 대접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시몬이 자신을 적게 사랑하는 것에 실망하시고 많이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적게 죄사함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시몬은 죄가 적고 그래서 죄사함도 적게 받을 수밖에 없는 데 어쩌라는 말인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태생적으로 적게 죄를 짓고 따라서 적게 죄사함을 받은 게 적은 데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라는 것은 모순된 요구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많고 적음 문제가 발견의 문제라는 것을 알 때 모든 의문이 해결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마태복음 18:21-35절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1만 달란트 빚진 자에 비유하셨습니다. 1만 달란트는 우리 돈으로 6조입니다. 이는 사람이 절대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금액인데 우리 모두가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진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질문 받은 것을 기억하십니까? 1.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알게 모르게 죄를 범한 죄인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2. 여러분이 범한 죄 값은 지옥 형벌인데 하나님이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님이 대신 여러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이제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게 하신 구원의 진리를 믿으십니까? 우리 각자가 범한 죄값은 지옥형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의 총합이 아닌, 우리 각자의 죄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여인만 많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 시몬도 충분히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자신은 참으로 흉악하며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 즉 의인된 심정이 많은 죄인입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본문의 죄 많은 여인의 케이스로 이들은 명백하게 눈에 보이는 범죄사실이 있고 그것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서 큰 곤란을 당한 경우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본문의 바리새인 시몬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몇 가지 의로운 일들만기억합니다. 항상 그것을 곰씹으며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운데 삽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수치스럽고 악독한 행위와 말들은 다 잊어버립니다. 자기 의의 관점으로 편집한 인생비디오만 늘 돌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생전편을 풀 버전으로 돌려본다면 그것도 만인 앞에서 그런다면 그들은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에도 숨어야 할 죄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 가운데는 자신이 말하고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였으며 몰래 간음했습니다. 탐심의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무익한 일, 속이는 일, 남을 죽이는 독사의 독같은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였으며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빨랐습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그 속에 죽은 것, 더러운 것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로남불이라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악 됨은 덮어 버리고 의인이라는 자기최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현미경으로 볼 때 너무나 더럽고 흉악하고 부끄럽고 악독한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생각은 너무나 더럽고, 이기적이고, 자기영광을 구하며 교만하고 유치하였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생각은 행동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행동보다 생각을 더 중시하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어떤 면에서 더욱 흉악하고 악독하고 벌레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내면세계에 대한 발견이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은 왜 죽으시려하는 지를 알지 못하였으며 구속의 주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안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흉악한 죄를 위해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였고 그에 대한 감사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 과() 사람들은 자기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거울, 성령의 현미경과 하나님의 빛으로 자신들의 모든 삶과 내면세계를 다시 비춰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이 죄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다른 종교와 달리 시간이 가고 성장할수록 더 흉악하고 더 못된 자기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자기 의의 탑을 쌓아가지만 기독교는 성숙할수록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발견합니다. 그리고 통회하며 애통하고 자복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중의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기독교신앙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사도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였도다 죄인 중의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는 자신이 현재적으로 죄인중의 괴수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의가 아닌 오직 긍휼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흉악한 죄인으로 지옥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자라는 깊은 자기발견이 있고 또 이런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면 너무나 감사하여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합니다. 어떤 궂은 일, 낮은 일도 합니다. 가장 귀한 것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겸손히 죄인으로서 자기발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해서도 요구하지 않으며 낮아져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 시몬입니까? 죄인으로 자기발견이 깊었던 눈물 많고 겸손하고 헌신적이었던 여인입니까? 우리가 새롭게 겸손히 자기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갚을 수 없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크신 은혜에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중에 의인된 심정으로 주님께 불평하며 주님께 최소한의 것만 드리고자 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죄인중의 괴수로서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는 태평양처럼 충만하고 넘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신은 그에 비하면 태평양에 돌 던지기입니다.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크고 큰 은혜입니다. 찬송가 353장은 그 은혜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내 주 앞에 이 적은 것 다 드리니 주 예수여 내 정성을 받으소서. 주 날 위해 보배로운 피 흘리사 그 귀하신 생명까지 다 주시니 내 천한 몸 이 생명을 왜 아끼랴. 주 예수께 빚진 것이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이 찬송가가 우리의 주님께 드리는 사랑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사랑을 받으시고 죄사함을 다시 공적으로 선언해 주셨습니다. 이에 함께 앉았던 사람들은 속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죄는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마음의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큰 죄인으로서 재발견, 죄사함의 크신 은혜에 대한 재발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가 되게 하시고, 평생 주님의 크신 은혜에 빚진 자되어 주님께 눈물의 사랑고백과 헌신을 드리는 저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