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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6강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1-16)2020-03-22 17: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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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강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말씀 마태복음 5:1-16
요절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혹은 산상보훈이라 불리우는 가르침입니다. 1-12절은 소위 팔복에 대한 가르침이고 13-16절은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동양의 오복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팔복이 무엇인 지 배우고 특별히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갈릴리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가버나움 근처의 한 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영어로 보면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입니다. 원어나 영어를 보면 “복이 있도다 ~~ 하는 자여” 라고 함으로 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문형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부러울 정도로 복받은 사람일까요? 동양에서는 오복사상이 있었습니다. 유교경전인 서경편에 보면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이 그 오복입니다. 오래 살고, 부자로 살며, 건강하고 무탈하며, 덕을 베풀다가, 천수를 다하는 것입니다. 다른 책에는 귀와 다남자 즉 존귀한 삶을 살고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복이 아니라 팔복을 말씀하십니다. 팔복은 오복보다 나은 완전한 복입니다. 좀더 근본적이고 내면적이고 진정한 만족을 주는 복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심령은 마음과 영혼입니다. 원어나 영어를 보면, 심령은 한마디로 영혼입니다. 영혼이 가난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가난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최고로 가난한 상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손가락만 빠는 상태입니다. 그보다 더 가난한 상태는 채무가 있어 빚쟁이에게 몰리는 상황입니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자녀들앞에서 행패를 부립니다. 빚쟁이들이 몰려 올까 두렵습니다. 따라서 빚쟁이를 피해서 야반도주를 하기도 합니다.  

 

채무자로 쫒기는 상태가 물질적으로 가장 가난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혼이 가난한 상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 이상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아무것도 건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것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깊은 운명주의, 풀수 없는 인간관계, 형편으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가장 큰 문제인 죄와 죽음문제로 한계에 처해있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이 저지른 너무나 부끄러운 죄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현재도 반복하여 넘어지는 죄로 인한 깊은 절망과 슬픔이 있습니다. 죽음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공룡보다 거대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자신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런 문제앞에 속수무책인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그 답은 그런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the kingdom of heaven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왕국을 뜻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으로 공간보다 통치가 핵심입니다. 영혼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통치에 깊이 절망하여 자기통치를 포기하고 왕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린 사람들입니다. “주님, 저는 더 이상 제가 저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나를 내려놓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다스려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오사 그의 영혼을 다스려주십니다.


이때 그는 더 이상 무능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치해주심을 체험하며 말할 수 없는 평안, 기쁨과 행복, 소망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려 주실 때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자기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 이것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입니다.


그런데, 내 삶이 천국으로 바뀔려면 우리가 나를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의 통치를 요청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령이 부요합니다. 여전히 자신을 신뢰합니다. 이유는 죄꼬리만한 자기신뢰의 근거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된 삶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자기발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려 주시기 원하시지만 자신을 초청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거지로 들이닥치지는 않으십니다. 사실 모든 인생들이 자신의 실체를 알면 심령이 가난하여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통치를 요청하는 게 정상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자기발견을 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요청하는 겸손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하여 우리가 참된 복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참된 복의 실체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시편 73:28a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중의 복입니다. 야곱은 나이가 많은 노총각이었는데 부엌에서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에서문제를 주시고 집을 떠나 쫒기는 도망자 신세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막막한 가운데 불안과 두려움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야곱은 심령이 극히 가난했습니다. 요셉도 채색옷을 입고 아빠의 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이방 땅에 홀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밑바닥 삶을 살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경험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쫒길 때에 매일 매순간 심령이 가난해져 하나님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고 안정된 형편이 되자 심령이 부요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 찾기보다 옥상에서 두리번 거리다가 안목의 정욕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시각간음죄를 짓고 결국 실제간음죄를 짓고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왕국은 헬이스라엘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국을 누리려면 우리가 계속해서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 지 영적 천재였던 사람도 어느새 심령이 부요해지고 간절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면 연약한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찾을 비결이 무엇입니까? 지속적으로 문제가 있고 한계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밖에 없는 가 싶지만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가시가 있어 계속 우리를 찔러줘야 합니다. 그것이 학업문제일수도 있고, 물질문제일수도 있고 건강문제도 일수도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문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에게 일생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은 괴롭지만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한계상황을 느끼게 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이시간 감사합시다. 또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는 한계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명도 우리를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는 축복의 장치입니다.


현재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위용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을 다들 찾고 있는 줄 믿습니다.


행복과 천국은 어떤 이유로든지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 기간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알알이 맺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한 목사님이 이 시기가 축복된 시기라며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음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은 만나지 않고 모임을 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영적 진공상태에 빠집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 삶의 수준이 혼자 있을 때가 사람들앞에서 있을 때 더 떨어집니다. 교회에 있을 때보다 교회를 떠났을 때 수준이 떨어집니다.


한번 진단해보겠습니다. 혼자있으면 영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한 영적 방향이 있습니까? 아니면 삶이 더 영적으로 행복해지고, 천국을 맛봅니까? 아니면 더 수준이 현저히 떨어집니까?


이번 코로나 기간의 사회적 거리두기에 두신 하나님의 뜻은 교회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성이 균형잡혀야 합니다. 사람들앞에서 영성과 하나님앞에서 영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실은 더 깊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교회안에서도 천국을 맛보고 교회를 떠나도 천국을 맛보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번 코로나기간이 교회에 다니는 자와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갈리는 기간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 주의 종과 종교인이 갈리는 기간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교회와 이름뿐인 교회가 구분되는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코로나 기간을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깊이 경험하는 복된 기간으로 삼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12절은 나머지 7개의 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의 복, 온유한 자의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화평케 하는 자의 복,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애통은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는 깊은 슬픔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로 인해,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공동체의 죄로인해 그같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고 싶은 데 안되므로 그것에 대해 깊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짜 변화되며 그들은 성령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온유한 자는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럽게 다른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시냇물같은 사람입니다. 장애물이 있으면 피해갑니다. 인간관계에서 그냥 저줍니다. 그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의 아량은 크고 넓어 어떤 사람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망둥이, 꼴뚜기, 심지어 상어, 뱀장어 같은 사람도 그는 품을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을 얻고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사람을 잃습니다. 온유의 그릇만큼 사람들을 담을 수 있습니다. 가장 온유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온유한 사람이 결국 최종 승리자가 됩니다. 우리가 온유한 사람이 되어 다양한 사람들을 얻고 함께 할 수 있는 태평양처럼 넓은 내면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불의와 타협할 때 잠시 만족을 얻지만 그 만족은 찝찝한 만족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올바른 것을 추구합니다.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나 공동체나 사회를 하나님앞에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그리고 진정 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불의문제를 다룹니다. 이런 그는 진정한 만족을 얻습니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도 하나님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얻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요새 코로나 바이러스 기간에는 복있는 자는 손을 청결하게 하는 자입니다. 손을 청결하게 하는 자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청결한 사람은 어떤 복을 받을까요?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는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려면 손을 씻듯이 마음을 씻어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심령이 흐려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면 두 가지 안좋은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죄는 바이러스같아서 죄를 지으면 사람이 느려지면서 자기가 해야 하는 일들을 제대로 못하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자신의 영적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마치 하늘이 뿌여면 별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보고자 한다면 회개와 예수님의 보혈로 마음을 씻어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하나님이 다시 보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으로 선명하게 보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축복이 회복됩니다. 도시의 공해 때문에 안보이던 별들이 시골에 갔을 때 청명하고 뚜렷하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공해가 걷힐 때 하나님이 보입니다. 우리가 온라인예배보는 기간에 누가보든 안보든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분열이 종식되고 하나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들이,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됨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작은 예수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우기에 마땅합니다. 반면에 가는 곳마다 분열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을 하나로 잘 모으는 데 자기를 따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큰 틀에서 더 큰 분열을 만듭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과 자기만 옳다고 하는 사람들도 분열을 만듭니다. 분열은 마귀의 짓입니다. 마귀는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찌하든지 화평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10-12절은 의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인해 박해를 받는 것이 복된 삶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10-12절을 읽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흔히 의(義)하면 사회정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이 사회가 어떻게 불의한 가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불의문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가장 불의한 자는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불의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불의한 사람들이 의를 덧입는 길은 오직 불의한 자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의이시고 이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부당하게 욕먹고 박해를 당합니다. 영적 무지 때문에 당연히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율법과 안식일을 따르지 않는 다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곳저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염병”이라고 욕을 먹고 얻어맞고 많은 고초를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박해도 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복음증거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도 없지만 하늘의 상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박해는 참된 성도의 증명서입니다. 크던 작던 받긴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공회에 끌려가 채찍에 맞고 돌아 올 때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음을 기뻐하였습니다(행 5:41)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이나 모두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므로 박해를 받았다면 이상히 여길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어떤 박해도 받지 못했다면 침울해하고 의기소침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 신천지 때문에 노방전도가 매우 어렵게 될 것이니다. 모욕과 박해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전도는 계속되긴 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이니라”(13)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데 쓰이며 요리할 때 맛을 냅니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음식이 싱거워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소금이 없으면 간장으로 대신하면 된다고 했는 데 간장이 바로 소금성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녹아들어가 세상의 부패를 막고 신선하게 하며 맛을 내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이 맛을 잃어버린다면 쉐프들이 찬장만 차지하고 있는 그것을 당연히 버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빛이기에 산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동네를 다 밝히는 빛은 태양 빛입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등불의 경우, 집안의 실내를 밝혀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안에서 잘 활동하도록 도와줍니다. 이처럼 크든 작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선행이 바로 세상을 비추는 빛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은 팔복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팔복의 삶을 살 때 세상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맛깔나게 살아야 하는 지 깨달음을 줍니다. “아, 저렇게 사는 게 인생이구나!” 하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며 삶의 영감을 얻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로서 진리의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삶을 통한 맛과 빛을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부러워하며 그 삶을 배우고자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감동전도, 관계전도, 플랫폼 선교입니다. 그러니까 플랫품 선교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인격과 내면성을 가질 때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가 되면 아주 건강한 전도, 아름다운 전도가 됩니다. 어떤 이단단체는 조직적인 접근과 포교, 그리고 지식전수를 통해 많은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사회성과 거짓과 모략들이 다 드러나게 되었고 이제 치명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파헤칠수록, 드러날수록 감탄과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이런 매력과 감화가 없으면 더 이상 한국에서 예수님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보고’란 단어입니다. ‘듣고’가 아닙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지 않습니다. 삶을 지켜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이렇게 말이 아니라 삶의 섬김으로 전도하는 것은 노방전도보다 어떤 면에서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주님의 여망이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우리 시대의 진정한 선교정책입니다. 우리가 팔복교훈을 통해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성과 수준높은 인격을 개발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어려운 시대에 예수님을 전하고 천국을 확장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팔복의 교훈을 배웠습니다. 여러 복이 있지만 첫번째 언급된 최고의 복은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코로나 기간동안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충만히 받는 복을 깊이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