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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17 강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누가복음 9:46-62)2017-06-04 09: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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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7 강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말씀 / 누가복음 9:46-62

요절 / 누가복음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제자의 도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참된 예수님의 제자로 새롭게 거듭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자 중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48a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어린 아이는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이 유치합니다. 또 철이 없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저희 시절만 해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이런 어린아이들과 함께 평생을 보내는 것을 기피했습니다. 사실 어린 아이가 어린이같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크면 자연스럽게 철이 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어린에게는 어른들에게는 없는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른이 되었는데 내면은 여전히 어린아이같은 이들입니다. 이른바 성인아이들입니다. 이들은 겉모습은 분명히 어른인데 하는 행동은 어린아이와 같으므로 주변 사람들을 몹시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만듭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난 후, 당황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왜 당황해하는지 몰라 자기도 당황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어떤 한 면에서는 미처 성장하지 못한 성인아이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일반 사회에서 이런 성인아이와 같은 면이 부각되는 사람은 무시하고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런 사람에게 다가가 그를 영접하고 그와 함께 대화하며 그의 진실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큰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요,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48절을 보십시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세상에서는 강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 능력이 출중한 사람,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외모가 탁월한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모든 사람 중 자기가 가장 부족하고, 또 연약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주님을 가장 간절히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주님의 종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연약함 가운데 주님을 간절히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늘 크고 작은 병을 몸에 달고 살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남들은 평생 한 번 받기도 힘든 큰 수술을 여러차례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연약함으로 인해 늘 절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생명을 다해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한 선교사님은 머리를 열었다가 닫는 뇌수술을 무려 3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는 약을 밥보다 더 많이 먹었습니다. 그는 이런 연약함 가운데 캠퍼스 양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를 통해 한 캠퍼스가 개척되고 세계 최고의 지성인들이 목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남들보다 분위기를 파악하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캐취해내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스위치를 올려도 한참있다가 켜지는 형광등같았습니다. 양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주변에서 설명해주어야 겨우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부족함을 들고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말씀으로 이 부족함을 채워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다해 말씀을 연구하고 암송하고 붙들었습니다. 그를 통해 수많은 지성인들이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모든 사람 중 가장 작다는 것은 자기가 큰 죄인이고 또한 큰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은혜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큰 은혜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 스데반이 순교할 때 찬성표를 던지고 그에게 돌을 던지던 자들의 옷을 맡아 지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체포하여 감옥에 처 넣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뿌리까지 박멸하기 위해 해외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와같이 예수님의 원수가 되어 행하던 극악한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구원해주실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주신 주님의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 은혜를 갚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날마다 생각하였고, 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받은 은혜에 합당한가를 항상 생각하였습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이 아닙니다. 큰 은혜의식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하고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이미 큰 은혜, 죄사함의 은혜, 구원의 은혜, 캠퍼스 목자의 직분을 받은 은혜를 깨닫고 일생 그 은혜에 사로잡혀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어느날 요한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가 사도 중 한 사람이 아니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쫓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사도들이 넓은 마음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을 반대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은 그들을 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넓게 보면 주 안에서 다 동역자들입니다. 자기가 속한 모임에 대해 주인의식과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으나 독선적이 되거나 배타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함께 예수님을 높이고 그를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격려하며 사랑하며 동역해야 합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에게 주어진 공생애의 기간은 3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공생애기간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지금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해 오셨습니다. 죄사함을 주는 회개의 복음을 전하셨고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또 70인의 제자와 12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그 공생애의 마지막이자 클라이맥스로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로마인에게 넘겨져 십자가 죽음을 당하게 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처절한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는 해발 820미터에 위치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굳게 결심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고 때로는 휴가를 반납하면서 헌신적으로 무리들을 섬겼는데 흉악한 종교지도자들과 야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는 무리를 생각할 때 예루살렘을 가지 않는 선택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어떻게 됩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이 물거품이 됩니다. 수많은 무리들은 죄 가운데서 그대로 멸망의 길에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는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이지만 수많은 영혼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2절은 이 주님의 결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52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거처를 미리 알아보도록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평소 유대인들과 적대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을 입구에다 예수님 일행을 온 몸으로 거부한다는 커다란 플랭카드를 걸어놓았습니다. 플랭카드 구석에는 예수님 일행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문구도 씌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마음 속에서 불이 올라왔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여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5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예수님도 인성을 입으신 분으로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그런 반응 앞에 마음이 상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은 목마름과 피곤함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얼마나 큰 사랑으로 섬기셨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당장 불로 심판할 것을 요청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지 결코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때 그때 불을 내리는 전도방식은 통쾌하고 시원해 보입니다. 또 복음전파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잘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중에 회개할 수도 있는 사람이 심판을 당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에서도 주인은 원수가 뿌려놓은 가라지를 지금 당장 뽑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마을을 불로 꼬실라버린다면 속은 후련하겠지만 그 안에 장차 회개하여 위대한 복음의 일꾼이 될 하나님의 사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을 심판하셨다면 우리 중 최소한 1/3 정도는 이미 심판받아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큰 인내와 사랑과 소망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57절을 보십시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전문직종을 가진 전도가 유망한 젊은이였습니다. 부족할 것 없는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하였을까요? 그 사람이 서기관이었던 것을 볼 때에 매일 연구실에 앉아서 연구만 하는 일에 어느정도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평생 서기관으로서 열심히 일했지만 자기 때문에 삶이 변화되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참 생명을 얻었다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현장을 누비면서 병든 영혼을 치유하며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사역을 통해 악질 세리가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고 창기와 같던 여인이 하나님의 순결한 황공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단순히 책을 읽고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신령한 성령의 은혜가 흘러넘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며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그는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와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5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것이 없도다 하시고” 이는 참으로 문학적이고 시적인 멋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감내해야 할 실제적인 삶의 불안정함, 불편, 고난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여우도 광야에 밤이 찾아오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자기 굴이 있어서 그곳에 들어가 안식과 평안과 쉼을 얻습니다. 또한 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공중의 새도 날개에 피곤함이 몰려오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 쉼을 얻습니다. 남북전쟁 때 모든 남군, 북군이 사랑했던 노래가 Home, Sweet Home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집은 하루 동안의 모든 수고와 때로 경험하는 고통과 아픔을 다 내려놓고 쉼을 얻는 곳입니다. 제 윗 세대 선배님들의 경우 마룻바닥이든 어디든 그저 몸 누울 곳이 있으면 감사하고 잤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아무데서나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청년들은 침대가 있어야 잘 수 있습니다. 그것도 늘 자기가 눕던 그 침대여야 합니다. 매트리스 안에 있는 스프링의 강도가 적절해야 하고 이불의 촉감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그날 그날 누군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 주면 그곳에서 주무셨고, 만약 없으면 그냥 노숙하셨습니다. 방금전 사마리아 마을에서도 예수님을 거부하므로 거처할 곳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또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루살렘에 계실 때에는 감람산에서 노숙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죽어가던 영혼이 살아나고 세리와 같던 자들이 변화되는 삶의 현장에 있으므로 기쁨과 은혜와 보람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겉보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남모르는 고충이 있고 또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높은 바위 위에 서서 홀로 푸르름을 유지하는 낙락장송이 겉보기에 아름다우나 한 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싸우고 또 외로움과 싸우며 보이지 않는 치열한 투쟁을 하는 것처럼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의 삶은 아름답지만 보이지 않는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양이 별 생각이 툭 던진 매몰찬 한 마디에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밤새 아파하기도 하고 단단한 바위처럼 깨어지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양들을 보며 깊은 절망에 빠지는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수고해도 양들이 잘 오지 않는 한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경험할 수 있고, 함께 신앙투쟁하던 동역자들이 떠나가 깊은 외로움 가운데 슬퍼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삶의 아름다운 면만 보고 환상에 빠져있는 청년에게 제자의 삶에 따르는 아픔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실제 어려움에 닥쳐서 후회하거나 제자의 삶을 포기하는대신 처음부터 그 어려움과 아픔에 대해 충분히 숙고해보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그러한 각오와 결단이 되어있어야 여러 어려움을 당할 때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59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그가 실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라는 견해와, 곧 돌아가실 때가 가까운 아버지를 두었다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현재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온 것을 볼 때에 후자 쪽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에게는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장례를 다 치룬 후 그 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대해 예수님이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6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사람의 목숨처럼 질긴 것이 없다고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의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처럼 보이지만 몇 년, 심지어 10년 이상 더 사실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현재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기간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든 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것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때 말할 수 없는 유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는 아이도 나중에 어른이 되어 교회 내에 매우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사역의 말기에 그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길에 예수님과 함께 했다면 얼마나 큰 권위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은 자들 곧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도록 하고 너는 지금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는 가족이나 지인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례식장은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장소입니다. 본문에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청년들이 먼저 공부를 하고, 먼저 학위를 따고, 먼저 안정된 직장을 얻고, 먼저 결혼을 하고, 먼저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고, 먼저 노후대책이 된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먼저 자기 할 일을 하고 난 후 주님은 이미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 청년의 때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외대 가운데 청년들이 중간리포트, 기말고사, 알바 등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빼뜨리지 않고 성경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고 발표하고 전도크류 모임에 동참하여 황금같은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전도크류하느라 금쪽같은 금요일을 드리고, 소감모임 영어성경공부하느라 토요일을 드리고 예배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느라 주일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남들 놀러다니고 술마시고 게임하는 시간에 공부도 하고 알바도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각 캠퍼스 별로 이와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아름다운 청년들을 많이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61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겠지만 먼저 가족과 작별하게 허락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6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이 자꾸 뒤를 돌아보면 쟁기질이 잘 될 리 만무합니다. 쟁기질이 꾸불꾸불하게 될 뿐 아니라 쟁기에 걸려 넘어져 본인이나 주변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사람은 뒤를 돌아보서는 안됩니다.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한편 구약에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를 주님의 종으로 부를 때에 그가 가족과 작별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예수님의 제자는 가족과 작별인사도 해서는 안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본문의 청년이 귀가 얇고 가족의 정에 잘 매이는 문제가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가 가족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안녕히 계시라고 인사하러 간 다음 눈물로 만류하는 노모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과 애정을 끊어내지 못하고 결국 제자의 삶을 포기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도록 방향을 주신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정에 매이는 마음은 그 자체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눈 앞의 정에 매여 대의를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또한 정에 매일 때 결국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가족의 마음에 작지않은 아픔과 상처를 남긴다 하더라도 내가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가족들도 살리게 하는 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가 현재 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일에 집중(전심전력)해야 합니다. 내가 이 시간 놀러갔으면 재미있게 놀고 있을텐데 하는 잡생각에 빠져있거나 세상 여러 유혹에 곁눈질을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공부하는 시간에는 성경공부에, 소감쓰는 시간에는 소감쓰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하는 시간이나 논문쓰는 시간, 일하는 시간에는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논문쓰는 것이 어렵다고 내가 대학원에 왜 왔을까 하면서 뒤를 돌아보서는 안됩니다. 양치는 것이 어렵다고 내가 왜 목자가 되었을까, 동역하는 것이 어렵다고 왜 신앙생활을 시작했을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 가정생활에 어려움이 있다고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했을까 뒤를 돌아보아서도 안됩니다. 혹은 지난 날에 대한 후회를 하며 뒤를 돌아보서도 안됩니다. 지난 날에 대한 아쉬운 점이나 부족한 점, 잘못했던 것들은 회개를 하면 됩니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가 있습니다. 후회는 때마다 순간마다 그 순간을 돌아보며 아쉬워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후회는 뒤를 돌아보지만 회개는 힘차게 앞을 향해 새출발을 합니다.


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면서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어려움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커다란 바위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어려움 앞에서 그는 포기할까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강물을 타고 넘어가면 된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믿음이 생겼을 때 그는 다시 힘차게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는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을 타고 넘어가면 됩니다. 이런 바위가 있는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오지 말걸 뒤를 돌아보며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앞만 보고 나아가면 태산같은 바위가 있다 할지라도 다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의 삶의 끝자락에 있는 저 죽음의 강물마저도 믿음의 배에 승선하여 건널 수 있고 우리 주님께서 해보다 밝은 미소로 맞아주시는 저 천성에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앞만 보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식하고 주님을 간절히 의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인식하고 큰 은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중심이 되지 않고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하며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일체의 인내와 관용과 사랑의 마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제자의 삶에 따르는 어려움을 알고 결단해야 하며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인간의 정보다 대의를 좇아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앞만 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가 끝까지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젊은 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끝까지 그를 따름으로 저 천성에까지 이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