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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26 강 '무익한 종' (누가복음 17:1-19)2017-08-27 08: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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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누가복음 26강 


무익한 종 


말씀 누가복음 17:1-19 

요절 누가복음 17:10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가져야 할 믿음과 자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자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본문에서 작은 자를 실족(스칸달론-덫에 걸리게 하는 것,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하게 한다는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시험에 들게 하여 믿음을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목자님이 평소에는 그렇게 인자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운전대만 잡으면 험한 표정이 되거나 심지어 욕설을 하는 경우 옆에 앉아 있던 형제가 그 모습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축구공만 잡으면 축구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상대팀 형제가 어린 양이든 말든 개의치 않고 거친 플레이를 함으로 형제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모임이 다 끝난 후 어지럽혀 놓은 것들을 하나도 정리하지 않고 심지어 선풍기도 그대로 켜놓은 채 자리를 뜨는 일,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 연구실에서 음란물을 보다가 후배에게 들킨 경우, 직장 회식 후 만취한 상태에서 양을 만난 경우 형제를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 알지 못하는 사이 자녀들이 실족하게 됩니다. 


제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족하게 해도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형제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법관이나 의사와 같습니다. 법관이 사형판결을 내리고 형이 집행되었는데 만약 그 판결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판명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수 있습니까?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술 과정에서 중대한 실수가 있어 환자가 죽음에 이르렀다면 누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이와같이 예수님의 제자는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중한 일을 맡고 있으므로 법관이 재판할 때 긴장하는 것처럼, 의사가 수술할 때 긴장하는 것처럼 늘 영적으로 긴장하는 가운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목자가 자신의 허물로 인해 형제 한 사람이 실족하게 되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길로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한강으로 가야 합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이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일이 있으면 한 영혼을 실족하게 한 죄를 주님 앞에서 애통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이제는 영혼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한경직 목사는 일제시절 십계명을 어기고 일본 귀신을 섬기는 제단 앞에서 절하는 중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을 때 죄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국 교회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한 영혼을 실족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한 책임이 따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남은 삶을 헌신할 때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그를 용서하시고 은혜주실 것을 믿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상 경고는 ‘에피티마오(영어의 rebuke)’로 이는 그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왜 잘못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말해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헷갈리는 것이 형제가 나를 비방하고 나에게 죄를 범할 때 그와 맞서 싸우기보다 구약의 다윗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침묵하는 것이 더 성숙하고 성경적인 자세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네 맞습니다. 부당하게 비난받고 욕을 들을 때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하며 오히려 나를 비방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베드로전 3:9절에도 보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는 경고해도 전혀 돌이키거나 회개하지 않을 것이 명백한 이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경고할 때 충분히 알아듣고 회개할 수 있는 형제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경고를 해 주어야 합니다.


형제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돕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돕는다고 직설적인 말을 하였다가 형제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혹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자님은 잘하고 있느냐?’는 역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버려두자니 공동체 전체에 악영향이 되므로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섣불리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급히 경고의 말을 내뱉기보다 먼저 그 형제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충분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죄를 지적하는 말에 짜증이나 분노 등 개인적인 감정이 전혀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애타는 목자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묻어나게 됩니다. 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지적하는 말을 할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언제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잘 나가다가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형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의 지혜로 다 커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형제가 회개하였을 때에는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용서는 원문상 ‘아피에미’로 이는 ‘멀리 보낸다, 한 사람의 잘못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을 멀리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forgive입니다. Forgive란 나에게 범한 죄에 대해 내가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그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더 나아가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멀리(for) 보낸다(give), 다 내려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용서라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나에게 죄를 범하였는데, 나의 명예를 훼손하고, 나에게 실제적 또 영적 손해를 끼치고, 나의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주었는데 어떻게 그에 대한 모든 권리를 다 내려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심지어 그에 대해 분노하거나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까지도 다 멀리 내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러한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이는 조건없는 용서, 무한한 용서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제자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크신 용서의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비참하게 못박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용서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면 그의 제자들도 마땅히 이러한 용서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용서는 상대방보다 실상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추억의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가 원수 멧살라를 용서하지 못했을 때 그의 마음은 지옥과 같았습니다. 전차 경기를 통해 멧살라가 자기 꾀에 빠져 비참한 죽음을 당한 후 그의 마음은 평안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죽었어도 여전히 그의 마음은 이글거리는 분노와 증오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그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체험했을 때 비로소 분노와 복수심이 눈녹듯이 사라지고 하늘의 평화와 기쁨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 날마다 조금씩 독극물을 부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신앙인은 참된 신앙이 주는 신령한 기쁨과 행복을 조금도 맛보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신앙인은 성경을 읽어도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평안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잔인한 복수를 하는 복수 영화나 소설을 읽을 때 더 통쾌함을 누립니다. 기도보다 증오에 가득한 독설을 퍼부을 때 속이 더 후련하고 잠시나마 평안을 누립니다. 그의 영혼은 날이 갈수록 말라가고 파리해져가며 죽어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른 무엇보다 용서의 사람이 되도록 도우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너무나 엄청난 수준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합창하듯이 동시에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사도들은 왜 “우리에게 사랑을 더하소서”라고 하지 않고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하였을까요? 이는 믿음은 신앙생활에서 모든 것의 출발점이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에 기초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소망을 가질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장으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전 13:7) 


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준에 이르려면 태산처럼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성경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과 모든 말씀에 대한 깊은 체험과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깊은 신령한 체험과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에게 만약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뽕나무더러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할 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중동의 뽕나무는 높이가 무려 15미터에 이를 정도로 키가 크고 또 뿌리를 넓은 지역에 깊게 내리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뽕나무를 뿌리채 뽑는다는 것은 포크레인을 동원하지 않는 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칩시다. 이번에는 뽑힌 뽕나무를 바다에 심어야 합니다. 뽕나무를 어떻게 바다에 심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믿음으로 뽕나무가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심겨져라 말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그런 일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100% 온전한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컵 한 잔에 담긴 물의 99%가 순수한 물이고 단 1%만이 독극물일 경우 그 컵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줍니다. 이와같이 99%의 믿음 안에 1%의 불신이 섞여 있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불신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대충 믿는 것보다 한 말씀을 믿더라도 그 한 말씀을 100% 신뢰하고 절대적으로 믿고 자신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고 순종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믿음의 큰 승리를 체험하신 선교사님들과 대화하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박사수준의 해박한 지식보다도, 한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은 선교사생활 20년 동안 마태복음 6:33절 한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붙들고 학업으로 시간이 없을 때에도, 직장 일로 먹고 살기 힘들 때에도 절대적으로 주일을 지키고 먼저 주의 일을 하기에 힘썼습니다. 또 바쁘다고 아카데미나 수양회 오기 힘들다고 말하는 양들을 늘 이 말씀으로 도왔습니다. 그랬을 때 정말 주님께서 먹고 사는 문제 뿐 아니라 영적인 일까지도 모든 것을 더하여 주셨고 큰 믿음의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손양원 목사님도 무슨 대단한 영적인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같은 학생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딸인 손동희 권사님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딸 손동희 권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동희야 내가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하신 주님의 십계명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일제 시대 때 그 모진 옥고를 치루었는데, 이제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새 계명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지난 날의 그 옥고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내 어찌 주님의 이 말씀은 순종하면서, 동일한 주님의 다른 말씀은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오늘 우리 각자에게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해야 하는 기도제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제자 양성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기도제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을 배워 이 기도제목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이 우리 가운데 많이 나타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9절은 당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당연한 일상의 한 장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어떤 종이 있었습니다. 종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밭에 나가 하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했습니다. 어둑어둑해져 그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하루종일 일한 종은 너무 배가 고파 돼지 한 마리를 잡아 혼자서 통째로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종은 바로 부엌으로 달려가 밥을 남산만하게 밥그릇에 담은 다음 고추에 쌈장을 발라 상추에 싸서 맛있게 먹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먼저 주인의 밥상을 차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은 하루종일 편안하게 있었으면서 밥은 좀 자기가 알아서 차려먹든지 말든지 하지 하루종일 힘들게 일한 나에게 밥상까지 차리라고 하냐’ 하면서 궁시렁거리고 싶은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았습니다. 대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렸습니다. 주인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자 종은 테이블을 깨끗하게 치우고 종들이 식사하는 테이블에 가서 조용히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때 종은 ‘하다못해 식당 웨이터에게도 땡큐라고 하는 시대에 이렇게 하루종일 고생하고 자기를 섬겨주었는데 땡큐 한 마디 안하는거야’ 하면서 속으로 주인을 향해 분을 내는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떤 마음을 품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무익한 종(NIV: unworthy servants)이란 쓸모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칭찬받기에 무익한, 특별히 칭찬받을 자격이 없는(unworthy of praise) 종이란 의미입니다. 종은 열심히 일했지만 그것이 무슨 특별한 칭찬이나 상을 받을 일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은 그가 종으로서 주인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주님을 위해 일할 때 자신이 하는 수고에 대해 사람들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바이블 룸에서 혼자 오랜 시간 기도한 후, 김밥 한 줄로 저녁을 때우고 캠퍼스에 홀로 나와 복음을 전한 후, 동아리 방을 혼자서 열심히 청소한 후, 책임맡은 일이 작지만 절대적으로 충성한 후, 누가 이런 나를 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속에서 서운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제발 나 좀 알아주세요 네?’ 라는 눈빛을 보내고 소감에 암시까지 하였는데 그래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함을 넘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또 어떤 분은 비록 자기 양이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을 잘 도와 연약한 이들을 세우고, 은밀한 죄문제를 회개하도록 돕고, 모임에 잘 담기도록 도왔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잘 알아주지 않고 1대1 목자나 팀목자, 스탭 목자에게만 모든 영광이 돌아가는 것 같을 때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서운한 마음을 많이 경험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위해 남모르는 수고를 많이 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서운할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열심히 일하고 서운한 마음을 가진 주님의 제자들을 보실 때 그를 매우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서운한 마음을 다 내려놓고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라고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늘에서 그의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보상심리를 갖게 되면 장차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하여 매달 적지 않은 액수를 적금했다고 합시다. 적금은 본래 가만히 두어야 복리로 이자가 붙어 만기 때 큰 금액을 타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열심히 일한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로 때마다 적금한 것을 야금야금 빼서 사고 싶은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만기 때 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과 박수갈채를 받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참으로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가 남몰래 흘린 땀과 눈물과 피에 대해 온 천군천사가 깜짝 놀랄만한 놀라운 상을 준비해 두셨는데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질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의 자세를 갖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칭찬해주고 인정해주어야 일할 기분이 납니다. 또 두둑한 연봉을 주어야 일할 힘이 납니다. 그러나 종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종은 칭찬이나 인정이 없어도 새벽일찍 일어나 밭으로 일하러 갑니다. 일하고 난 후 누가 와서 너무 수고했어요 하고 안아주지 않아도 다시 주인의 밥상을 차리며 열심히 일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자신이 주인의 종이고 종으로서 주인을 섬기는 것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제자도 과거 죄와 사탄의 노예였던 자기를 주님께서 피값으로 사셨으며 그 결과 내 생명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요, 나를 피값으로 사신 주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의 삶이요,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의 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가득하시며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의 종이 되어 그 분을 섬기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아무리 충성한다 하여도 그 분께서 나를 위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내 생명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그 은혜를 어찌 일만 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에게 이런 은혜받은 종의 자세가 분명할 때 모든 공로의식과 보상심리, 서운한 마음까지도 다 내려놓고 주의 일에 헌신하고 충성을 다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제자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종의 자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5-8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제자들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을 배우는 제자들이 더욱 종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종의 자세를 갖는 것이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공로의식을 가지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별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자기 공로를 배경으로 큰 소리는 것 같고 뻐기는 것 같을 때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또한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사람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공로의식이 레드라인을 넘어 공동체에 큰 분란을 일으키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챈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중한 벌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반면 종의 자세를 가진 제자는 그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하고 향기가 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고 늘 종의 자세를 배우고 갖추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1-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한 마을에 들어가실 때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구를 응답하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그들이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갈 때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물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배울 마지막 제자도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마음으로 알고 인정하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도 본문의 나병환자들처럼 죄로 인해 영적인 나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몸과 마음이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도 계속해서 죄를 지었으며 그 결과 수치스럽고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고 깨끗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모든 것은 이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여기에 어떤 보상심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순수한 감사의 마음, 감사의 눈물, 감사의 헌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 동안 박사수준의 해박한 성경지식을 추구하였지 한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을 배우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저의 믿음은 수박통만하지만 속이 빨갛지 않고 허연 수박과 같이 되었습니다. 저의 믿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에 부족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에 부족하였습니다. 제가 회개하고 작지만 한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 말씀을 실제 삶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시편 126: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한 말씀을 붙들고 비록 눈에 보이는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의 씨를 캠퍼스 영혼들의 마음에 줄기차게 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는 종의 자세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있을 때에는 열심히 일하지만 그것이 없을 때에는 열심히 일하지 못했습니다. 또 내가 최선을 다해 일한 것에 대해 비판의 말이 들릴 때 매우 힘들어 했습니다. 그 결과 로뎀나무 곁에 누운 엘리야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자주 하였습니다. 한동안 로뎀나무 한의원을 다니다가 이제는 믿음 한의원을 다니며 침대에 누워 침을 맞으며 마음까지도 함께 누워 있는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자신의 모습을 깊이 발견하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새롭게 종의 자세를 배워 사람들이 인정해주든 인정해주지 않든 한결같은 자세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또 주님의 은혜를 알고 늘 종의 자세,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가을학기 이러한 믿음과 자세를 가지고 더욱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