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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33 강 '새언약' (누가복음 22:1-23)2017-10-08 10: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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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누가복음 제 33 강  


새 언약 


말씀 누가복음 22:1-23

요절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가르침 중 가장 중대한 것이며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새롭게 우리 심령에 새기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때는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임박한 때였습니다. 유월절(逾越節)에서 ‘유’는 ‘넘는다’는 의미인데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유월이장(逾月而葬)하면 그 달의 그믐을 넘겨 장례를 치룬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월’은 많이 사용합니다. ‘초월’, ‘탁월’, ‘추월’과 같이 사용하는데 역시 ‘넘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유월절은 ‘The Feast of Passover’입니다. 


이제 처음 신앙을 갖게 된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유월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먼 옛적 이스라엘이 400년간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노예생활로 고통하던 이스라엘은 하늘의 하나님께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9가지 기적과도 같은 재앙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침실이 개구리로 가득했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곡식을 메뚜기가 다 갉아먹고 짐승과 사람들에게 악성 종기가 생겼고 해가 그 빛을 잃고 캄캄한 어둠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재앙에도 불구하고 파라오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예고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장자는 다 죽으리라는 무서운 장자 재앙의 예고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고를 듣고도 파라오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한 가족 당 흠없고 일년 된 수컷 어린 양 한 마리를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문을 지탱하는 좌우 기둥)와 인방(기둥을 연결해주는 윗쪽 나무)에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잡은 양을 구워 먹고 함께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쓴 나물과 먹도록 하셨습니다. 무교병을 먹도록 하신 것은 그날 밤 곧바로 이집트를 떠나야 하므로 떡을 발표시킬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누룩은 영향력을 의미하므로 이집트에서 받은 세속의 영향력, 죄의 영향력을 떨어버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쓴 나물은 이집트에서 받은 고통과 아픔을 잊지 말고 기억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같이 유월절에는 무교병을 먹었기 때문에 무교절(無酵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날 밤 죽음의 사자가 이집트 온 땅에 임하였습니다. 모든 장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날 밤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사자는 그 문에 어린 양의 피가 있는 집은 유월(passover) 하였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그 집 안에 있는 사람이 유대인인지, 혹은 착한 사람인지, 학벌이 좋은지, 잘 생겼는지를 전혀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집 문에 어린 양의 피가 있는지 그것만을 보았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있으면 그 집을 넘어갔고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하나님은 이것을 기념하여 매년 유월절 - 유대 종교달력으로 1월 14일 저녁(양력으로는 대략 4월경)이 되면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성전이 만들어진 이후는 성전에서 양을 잡아 성전 제단에 피를 뿌림) 이를 통해 유월의 은혜와 그 의미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도록 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한편 이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월절이 되면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수백만명에 달하는 순례객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는 성전에서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때 가장 바쁜 사람은 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을 총지휘하는 대제사장입니다. 또 백성들에게 유월절의 의미를 가르치는 서기관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전혀 엉뚱한 것에 골몰하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반발을 사지 않고 예수를 죽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은 언제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망각하고 엉뚱한 것에 골몰할 때 생겨납니다. 부모는 마땅히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학생은 겸손히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목자는 마땅히 양무리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는 마땅히 예배에 집중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하지 않고 엉뚱한 일에 골몰할 때 거기에서 온갖 흉악이 악이 생겨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가룟 유다는 비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배신의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그가 어쩌다가 이렇게 배신의 아이콘이 되었습니까? 이는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꿈과 계획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자기를 변화시키려하기보다 자기 생각을 밀어붙여 예수님을 변화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진 능력이라면 그가 꿈꾸는 여러가지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기대와 달리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고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점차 실망과 분노의 감정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맹렬히 미워하는 하나님의 대적자로서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이 미움과 분노의 마음을 내려놓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탄이 들어가면 악한 쪽으로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갑니다. 또 어떤 도덕적인 선을 과감하게 넘어설 용기가 생깁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기면 예수님도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자신의 기적적인 능력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실 것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유다의 제안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은 크게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약조했습니다. 유다는 종교 지도자들의 부탁대로 무리가 없을 때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마침내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날이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 가장 수제자 급인 베드로와 요한을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은밀히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9-12절을 보면 성내에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의 집에 들어가 집 주인에게 선생께서 유월절 만찬을 하기 원하시는데 객실이 어디 있느냐 물으면 큰 다락방을 안내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007 첩보작전같은 유월절 만찬 계획을 하신 것은 가룟 유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예수님이 힘이 없어, 혹은 가룟 유다가 배반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고난을 받기 전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3년간 공생애의 삶을 살면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이 시간이 오기만을 참으로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유월절 만찬 때 예수께서 왜 참혹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지에 대한 그 진정한 이유와 의미를 가르쳐주실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룬다는 것은 영어 성경을 보면 “I will not eat it again until it finds fulfillment in the kingdom of God(NIV).”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의 그 진정한 의미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 성취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포도주 잔을 받으시고 감사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자들에게 서로 나누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이 유월절 만찬 이후 그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시는 유월절 무교병의 떡이 곧 그들을 위해 내어주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보고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당시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은 세례 요한의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곧 구원자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씀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마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신비한 방식의 영적인 의미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목에 날카로운 칼이 들어와 양의 살이 찢기고 뜨거운 붉은 피를 철철 흘렸던 것처럼 예수님의 두 손과 발목에 시커먼 녹슨 대못이 들어와 살이 찢기고 붉은 피가 솟구쳐 오르게 됩니다. 문설주에 발린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그 집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보존하였던 것처럼, 우리 마음 문의 문설주에 뜨거운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을 때 우리의 죄가 아무리 흉악하고 크다 할지라도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고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는 것은 성만찬의 의식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성만찬할 때에 모든 성도들이 모여 떡을 떼어 먹고 포도주 잔을 마십니다. 이때 성도들이 먹는 떡은 곧 예수님의 살입니다. 성도들이 마시는 포도주 잔은 곧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피입니다. 여기에는 화체설(토마스 아퀴나스, 천주교), 기념설(쯔빙글리, 침례교), 공재설(루터, 루터교), 영적 임재설(칼빈, 장로교)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할 때에 떡과 포도주의 본질(essence-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데아적인 그 본질이 변한다고 생각함)이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이 화체설입니다. 성만찬은 다만 기념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라는 것이 기념설입니다.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만찬할 때 그 떡의 안 혹은 위나 옆에 그리스도의 몸이 정말로 임재한다(루터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교류하여 그리스도의 몸도 우주만물 어느 곳에나 보편편재할 수 있다고 생각함)는 것이 공재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성만찬 때 실제 임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성령으로 임한다는 것이 영적 임재설입니다. 


장로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영적 임재설입니다. 성만찬 때 먹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만찬할 때 그리스도께서 특별하게 그 자리에 임하십니다. 그 살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 찢어 내어주시고 그 피를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성만찬할 때에 주님은 특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치 부부가 늘 함께 살지만 결혼 기념일 날 결혼의 서약을 기억하며 특별한 의미로 그 날 하루 함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만찬할 때에 주님은 우리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가득 부어주십니다. 로마서 5:5-8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현재 우리는 1년에 한 번 년말에 성만찬을 하고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하니 다소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성만찬을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찬송을 부르고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가운데 개인적인 성만찬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소감을 쓰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그 보혈의 은혜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같이 개인적인 성만찬의 시간을 가질 때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딸은 아이를 낳아 길러보면서, 산고의 그 모진 고통과 출산 후 여자로서 몸매가 다 망가지고 개인 시간과 자유가 사라짐으로 인한 산후 우울증을 겪어보면서 어머니의 자기를 향한 그 희생과 사랑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아들은 가정을 책임지고 부양하는 그 무거운 가장의 십자가를 져 보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두 자녀를 책임지고 키워보면서 세 자녀들을 위해 새벽부터 8톤 트럭을 몰고 일터로 나가시던 아버지를 기억하며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것은 오직 십자가 앞에 설 때입니다. 나를 위해 온 몸의 살이 갈기갈기 찢기고 나를 위해 온 몸의 물과 피를 십자가 위에서 다 쏟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심지어 악한 영들까지도 경악하게 만들었던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조금씩 알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의 아픔은 낮은 자기 존재감입니다. 요즘 취업이 잘 안되자 많은 청년들이 알바 전선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알바 전선에 뛰어들면서 편의점 알바에 자기 소개서와 이력서, 졸업 증명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곳이 생겼다고 합니다. 심지어 1차 서류 심사를 하고 2차 면접까지 한다고 합니다. 알바 한 명 뽑으면서 대기업급 서류 제출을 요구하고 면접까지 본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힙니다. 또 어렵게 취업을 하지만 기대보다 훨씬 적은 월급은 그렇지 않아도 낮은 자존감을 한 없이 더 낮아지게 만듭니다. 월급도 적게 주면서 요구사항은 많고 심지어 일을 잘 못한다고 질책까지 할 때 급기야 자기 존재감은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맙니다. 당장 때려우치우고 싶지만 편의점 알바자리마저 구하기 힘든 시대에 또 한 동안 백수로 살 것을 생각할 때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감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길을 걷다가 바람이 불면 훅 날아가고 누가 나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하면 훅 날아갑니다. 사는 것이 불행하고 힘겹습니다. 이런 우리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자기 살을 다 찢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비록 내가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으나 그리스도께는 온 우주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사람들의 나에 대한 이런 저런 평가에 더 이상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누구한테 한 마디 듣고 이불 속에서 눈물 흘리던 연약함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사자처럼 포효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자기 몸을 찢어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연약해 질 때마다,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을 때마다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거기에서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을 마음에 흠뻑 받아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새 힘을 충만히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은 도장이나 사인을 사용하지만 고대에 언약을 세울 때에는 짐승의 피로 하였습니다. 짐승을 둘로 쪼개고 언약의 두 당사자가 그 짐승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만약 그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쪼개져도 좋다는 의미였습니다. (창 15:10,17)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제자들과 새 언약을 맺겠다고 하십니다. 새 언약이란 옛 언약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벗어나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말씀을 받을 때 맺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곧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의 말씀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세계에 대해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가나안의 여러 우상을 섬겼습니다. 심지어 우상숭배를 회개하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 결과 언약은 파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31:31-3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 새 언약이 체결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새 언약은 어떤 점에서 옛 언약과 차이가 있습니까? 


첫째, 새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옛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곧 이스라엘이 십계명과 율법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할 때 그 언약의 효력이 유효합니다. 이에 비해 새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곧 내가 무언가 행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이요, 은혜로 주신 것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선물과 은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내가 죄사함받고 영생과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체 사람의 자기 의나 자기 공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의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분은 믿음도 일종의 행위이고 자기 공로가 아닌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어떤 왕이 그 백성의 어마어마한 빚을 다 탕감해 주었고 그 사람이 그 탕감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의 의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일방적인 호의로 준 선물을 상대방이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받아들임이 그 사람의 의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와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의나 공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다만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임이요,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의 행위나 나의 공로를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의지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난 날의 삶이 부끄러워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큰 죄인이 주께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더 큰 은혜를 그에게 부어주실 수 있고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 있으십니까? 주를 위해 헌신하고 많은 열매를 남긴 훌륭한 주님의 종이나 주님께 나아갈 수 있지, 나같은 별볼일 없는 사람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가 생각하십니까? 주님께 내어놓기에 내 삶이 너무 보잘 것 없고 나의 죄가 너무 부끄러워 주님께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오는 의인 아흔 아홉 사람보다 부끄러워 주님을 멀리 떠나 있던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이 기나 긴 방황 끝에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 날 너무 기뻐 하늘에서 천군천사들과 함께 큰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그의 자비하심과 크신 은혜를 의지하여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밤새 문열어놓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지금 이 시간 담대하게 나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며 그리스도의 의의 예복을 입히시고 자녀의 표식인 금가락지를 손에 끼워주시고 아름다운 신발을 우리에게 신겨 주실 것입니다. 


둘째, 새 언약은 믿는 자의 마음에 새겨진 언약입니다. 예레미야 31:33절을 보면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옛 언약은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또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 언약은 내 마음은 어떻든지 기록된 율법의 내용대로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그들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언뜻 겉보기에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습니다. 이전에는 성경책을 펴는 것과 동시에 졸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경을 펴기만 하면 눈이 반짝거리고 또 때로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려고 하면 닭살이 돋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 거리낌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일 아침 단잠을 자지도 못하고 어디 놀러가지도 못하고 교회 오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일 아침 일찍 준비하여 주님께 예배드리러 오는 것이 일주일 중 가장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그에게 새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은 그 언약을 깰 경우 당할 무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이 주신 새 마음을 가지고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를 섬기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언약을 맺은 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마음을 이미 받았습니다. 때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내 마음이 전혀 새 마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새 마음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라 세상 죄의 누룩이 우리 마음에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 정욕, 이기심, 욕심과 탐욕의 누룩이 파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눈물과 죄사함의 성령의 비로 이 누룩을 깨끗이 닦아내면 됩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온 마음과 열정을 다해 섬기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서 용솟음치게 됩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혹 시커먼 곰팡이같은 누룩이 내 마음 구석구석 끼어있지 않습니까? 그 누룩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식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열정을 사라지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주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누룩을 제거하는 영적 청소의 시간,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20절을 다시 보면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새 언약이 맺어지게 된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자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기초요, 근거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주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기쁨과 은혜와 힘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우리가 때마다 이 피의 은혜를 기념하고 기억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큰 힘을 얻어 모든 내적 외적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1-23절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이미 알고 계심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으심으로 그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그의 배반의 결과가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예정하신 계획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성만찬과 개인 경건시간을 통해 주님은 이 피의 은혜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힘입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때마다 피의 은혜를 기념하고 기억함으로 승리하는 가을학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