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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룻기 제 1 강 /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기 1:1-22 )2017-03-11 09: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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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겨울방학 특강 1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부제 : 룻의 믿음의 결단)

 

말씀 룻기 1:1-22

요절 룻기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라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은 부끄러운 출생의 모압족속입니다. 모압족속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압 여인 룻이 어떻게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이 되었습니까? 이시간 우리가 룻의 인애와 믿음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21:25) 오늘 말씀에는 이런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없는 모습을 대변하는 한 가정이 나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그들이 모압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약속의 땅에도 흉년이 오는 가?” 라는 책 제목을 본 적이 있는데 약속의 땅에도 흉년은 옵니다. 신명기적으로 볼 때 약속의 땅에 흉년이 오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또한 죄가 아니더라도 흉년이 올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던 때에도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흉년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 때는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든지 아니면 시련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 가정은 어떤 방향을 잡았습니까? 베들레헴은 떡집 이란 뜻인데 이곳이 풍요로울 때는 이 곳을 잘 누리다가 곡간이 빌 것같자 흉년이 든 베들레헴을 조기에 떠나 모압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모압 땅은 가나안 땅과 달리 거의 흉년이 없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모압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시킨 모압족속들이 살고 있는 곳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제를 금지시킨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이런 곳으로 이주하면서 깊은 고민도 기도도 없이 움직였습니다. 그는 믿음이나 하나님의 뜻보다 현실적인 유익을 따라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가 왕이 되어 자기의 판단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오늘날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중요한 일을 결정함에 있어 자신이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현대 크리스천들과 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약속의 땅을 버린 엘리멜렉 일가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년 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 뒤에 남았더라 당시는 가장이 집안의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모압 이주결정은 엘리멜렉이 주도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아마도 처음에는 막아볼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남편의 뜻을 꺾을 수 없었고 하나님이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으니 순종할 수 밖에 없다고 합리화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엘리멜렉이 발빠르게 삶의 터전을 옮긴 결과는 그들의 뜻과는 달리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하늘처럼 의지하던 엘리멜렉이 어떤 이유로 죽고 말았습니다. 나오미는 과부가 되었습니다. 얼마 있어 두 아들은 장성하여 결혼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결혼했습니까? 모압 여자들과 사귀더니 어느날 결혼하겠다고 대상자들을 어머니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때 나오미는 율법에 따라 모압여자와는 안된다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들들이 현실적인 대안이 없쟎아요!!” 따지고 들자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첫 애를 낳기도 전에 큰 아들 말론은 몸이 점점 말라가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작은 아들 기룐도 점점 기력이 쇠하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셈이었습니다. 서구인들은 첫 번째로 배우자를 잃었을 때, 다음으로는 자녀를 잃었을 때 가장 슬프다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첫 번째로 자녀를 잃었을 때, 둘째로 배우자를 잃었을 때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둘 다를 잃었습니다. 나오미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몇 년이 흘렀는 지 모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습니다. 나오미가 풍족했다가 모든 것을 잃고 있을 때 그 사이에 약속의 땅은 반대로 흉년에서 풍요한 환경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더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때 나오미는 어떤 결심을 했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가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때 고향사람들이 그를 손가락질할 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이는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주려 죽게 되었을 때 양식이 풍족한 아버지 집을 생각하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굳게 결심한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 나오미는 생각없이 며느리들을 데리고 유다 땅으로 오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모압과 유다 땅의 경계쯤에 와서 며느리들을 생각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인간적인 행복과 장래를 걱정했습니다. 오르바와 룻은 모압 여자들로서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면 이스라엘 남자들과 결혼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자가 남편도 없이 평생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20대 청상과부들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그동안 너무 고마웠고, 감사하다. 그러나 이제 모압 땅으로 돌아가 다 재가를 하라권면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나오미의 말을 들은 두 며느리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9b, 10절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그들은 시어머니를 사랑했고 그 처지를 잘 알았기에 시어머니와 함께 하며 그녀를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1-13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가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나오미의 말을 들으면 며느리들을 인간적으로 매우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며느리들을 내 딸들이라고 세 번이나 부르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말의 요지는 그들이 자신을 따라오면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요 행복의 조건중 하나인 남편을 얻을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형제들은 모압여인과 결혼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과 전통 때문이고, 또 남편 잡아먹는 여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시집가는 가능성있는 시나리오는 시어머니가 셋째를 낳아서 율법에서 허락하는 계대결혼을 하는 것인데 어느 세월에 셋째가 태어나 장성한 단 말입니까? 셋째 가지고는 안되고 넷째도 태어나야 하고, 딸이라도 태어나면 도루묵입니다. 우리자매님들, 결혼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없는 데 계속 주님을 따를 처지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형제님들, 장래방향이 불투명한 데 계속 주님을 따라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주님을 따를 형제자매들이 몇이나 될까요?

 

재차 현실상황을 들은 며느리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유다와 모압 경계선에서 세 여인의 통곡과 흐느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연민, 난감한 상황으로 울었습니다. 그러더니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현실적인 조언을 받아들이고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에게 절대로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를 접착제로 붙듯 뒤따랐습니다. 얼마를 걸은 후에 나오미는 다시 룻에게 강권합니다. 15절입니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나오미는 젊은 과부인 룻의 미래를 책임질 수도 없고하니 제발 돌아가라고 강권했습니다. “너도 동서처럼 해라사람이 어떤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반대의 결정을 한 다른 사람을 보면 마음이 움직여지기 쉽습니다. 우리도 영적 선배나 동료중에 믿음보다는 현실적 유익을 따르는 이를 보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룻은 시어머니의 연이은 권면에 뭐라고 답했습니까? 못이기는 척하고 떠났습니까? 요절 말씀인 16,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것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지라이 룻의 말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룻의 인애와 우정입니다. 인애는 어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룻의 이름은 우정이란 뜻입니다. 룻은 인애와 우정으로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시며 시어머니의 삶의 동반자, 친구가 되고자 했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잃고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안고 사는 시어머니를 봉양하고자 했습니다. 참다운 우정은 친구가 어려울 때 증명됩니다. 시어머니를 남편이 있을 때만 마지못해 섬기기 쉽습니다. 또한 시어머니가 물려줄 유산이 있을 때만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룻의 사랑과 우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니에게서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을 때, 가장 섬김이 필요할 때, 시어머니의 동반자요 친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달콤한 자기만족적인 삶보다 시어머니를 섬기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젊은 여인으로서 참 놀라운 인애와 우정입니다. 룻의 말에 나오미는 얼마나 감동을 받았을까요? 정말 일곱 아들보다 나은 며느리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유익이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현실적인 유익이 있을 때만 누구에게 들러붙는 기회주의적,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존재자체를 깊이 사랑하고 특히 섬김이 필요할 때에 봉양자가 되어주는 참다운 사랑과 우정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 룻의 믿음의 결단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르려고 한 것은 시어머니에 대한 우정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백성과 어머니의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백성이 하나님이 뜻두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어머니를 통해서 배운 어머니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은 헛된 우상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니 룻의 선택은 단지 우정과 의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우정과 의리의 선택은 한계가 있습니다. 조폭이나 정치인들도 검은 의리를 지키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가 단지 인륜 때문에 사람을 따르고 섬긴다면 순장당하는 사람들처럼 마음 깊은 곳에 손해의식과 슬픔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의 선택은 믿음에 기초한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보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장차 그녀의 남편이 될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의 선택과 유사합니다.

 

룻의 선택은 인간적으로 볼 때 어리석습니다. 여인으로서 결혼의 소망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땅에 가면 이방여인이라고 멸시와 천대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과 그 백성을 선택했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순간까지 그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룻의 믿음은 놀랍습니다. 이런 룻의 믿음은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에 비하면 놀라운 정도로 대조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의 유익에 따라 때마다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성경공부는 많이 했지만 선택의 순간에는 자기생각대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방여인으로 상대적으로 성경공부도 적게 했습니다만 그녀는 믿음의 가치를 알았고 매우 중요한 순간에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이런 룻의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오고가는 세대에 빛나는 별같은 모범이요 믿음의 경종을 울립니다.

 

룻의 선택은 어리석게 보이지만 믿음과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하나님과 약속의 땅을 택했습니다. 이런 선택을 할 때 그도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큰 민족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되었고 인간적으로도 거부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바로가 되어 모든 세상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현실적 유익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심장을 떼어 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때 그는 잠시잠간의 세상의 부귀영화와 죄의 낙을 누리지 못했지만 영원한 구속역사에 별처럼 빛나는 인물이 되었으며 세계사에서도 100명의 파라오 보다 더 유명하고 존재감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룻을 생각해 보십시오. 결과적으로 룻은 하나님을 얻었고 시어머니와의 우정을 지켰고, 예수님 같은 좋은 남편도 얻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릅니다. 반면에 오르바는 남편밖에는 얻는 것이 없고 인간적으로도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결단할 때는 참으로 막막하고 죽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선택과 결단을 한 사람들이 결코 부끄럽지 않게 해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결단은 가장 지혜롭고 장래성 있는 결단입니다.

 

우리 앞에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모압과 유다 땅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장래보장이 안되는 시어머니로 대변되는 믿음의 길과 곧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남편 사이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이 때 죽는 것 외에는 믿음의 길을 떠나지 않고자 한 룻의 굳은 결심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별처럼 빛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오미는 룻이 절대적으로 자신을 따르려는 것과 자기보다 하나님을 선택했기에 그 결심을 물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그런 믿음의 결단을 한 룻을 대견해 하고 마음으로 축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귀한 며느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드디어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온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와서 왁자지껄하며 말했습니다.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19, 표준새번역) 이 말을 보면 나오미가 못 알아 볼 정도로 너무나 초라하게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정죄성 반응이 있을 것을 나오미도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그들에게 나오미가 뭐라고 합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였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의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신의 인생을 한마디로 괴로움이라고 정의하며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괴로움이란 뜻의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우리가운데도 이 나오미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오미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그녀의 주권신앙, 섭리신앙, 내 탓이오 자세입니다. 그녀의 말들을 보십시오. 매사에 주어가 하나님이고 자신은 목적어입니다. “전능자가 나를.. 여호와께서 나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신 것으로 깊이 영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해 보이는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읽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식과 헤어지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물질을 잃고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게 하신 것만큼 깊은 사랑으로 자신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사랑했던 지난날들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원망과 쓴 뿌리를 갖고 살기 쉽습니다. “약속의 땅 좀 떠났다고 이러깁니까, 이런 속 좁은 하나님 죽어도 안 믿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자신만 깊은 어둠속에 거하게 됩니다.

 

또 나오미가 하나님은 원망할 수는 없으니 사람을 탓합니다. 믿음 없는 남편이나 자식들을 탓할 수 있습니다. 매사에 남을 원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해석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립니다. 부모님 탓, 목자님 탓, 양 탓, 팀목자님 탓, 스탭목자님 탓, 교회 탓, 남편 탓, 직장상사 탓, 나라 탓을 합니다. 이런 인식과 해석을 할 때 그는 자신이 행복하지 못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미움에 잡혀 삽니다. 믿을 수 없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불안하여 신앙생활이 걱정으로 가득 찹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신의 불행에 대해 운명과 팔자를 탓하며 체념과 무기력가운데 드러누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어로, 자신을 목적어로 인식하며 삶을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의 소용돌이가 시작됩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불행해 보이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럴 때 발걸음은 의외로 가볍고 희망찹니다. 모든 것을 감당할 내적인 힘이 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고 겸손하며 다른 사람들의 평판도 개의치 않습니다. 결국 행복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됩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지금부터 나오미의 진짜 인생이 시작됩니다.

 

 

결론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이었지만 시어머니에게 얼마간 배운 말씀에 기초해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순간에 믿음으로 결단할 때 믿음이 한 단계 크게 성장하고 믿음의 세계에 깊숙이 진입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살기위해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룻처럼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현명하고 복된 삶을 살며 영원한 구속역사에 별처럼 빛나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