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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고린도후서 제1 강 '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린도후서 1:1-24)2017-10-15 10: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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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고린도후서 제 1 강


모든 위로의 하나님


말씀 / 고린도후서 1:1-24

요절 / 고린도후서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공식적으로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반도 남부에 있는 도시입니다. 지금 고린도는 작은 도시이지만, 1세기에는 로마제국 아가야주의 행정수도로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AD50년경 고린도에 들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1년 6개월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회심자들을 얻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에 고린도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당시 고린도는 매우 음란하고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서 교회 내에 많은 문제, 예를 들어, 분쟁의 문제, 음행, 법정소송, 제사음식, 은사문제 등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돕기 위해서,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 있을 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것이 AD55년경인데, 그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보낸 것으로 문제 해결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있는 동안 시간을 내어 친히 고린도를 방문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바울의 반대파와 그들을 동조하는 많은 성도들로부터 박대를 받습니다. 별 소득 없이 관계성만 악화된 채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통스러운 방문(‘a painful visit’)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바울은 다시 방문하여 그들을 엄히 다루고자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고 많은 눈물로 그들의 죄를 책망하는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냅니다. 이 편지가 ‘눈물의 편지’라고 하는데, 현재 분실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이 편지를 받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바울과 다시 사랑의 관계성 맺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더 완악하게 된다면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여 개척한 고린도교회가 사탄의 손에 넘어갈 위기였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의 결과를 노심초사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떠나게 될 때 당초 계획에 있는 것과 달리 고린도에 먼저 가지 않고 디도를 만나기로 한 드로아로 건너갑니다. 거기서 그를 만나지 못하자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거기서 디도를 만나고 디도가 가져온 좋은 소식을 듣습니다. 편지를 읽고 고린도 성도들이 깊이 회개하고 범법자들을 징계하였고, 이제 다시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며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바울 편에 섰습니다. 이에 바울은 기쁨으로 그들에게 이 편지 곧 고린도후서를 쓰며 또한 남은 일부 대적자들에게 대항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강력하게 변증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기쁨의 서신, 화해의 서신이라고도 하며 여기에는 바울답지 않게 걸러지지 않은 사도바울의 감정표출과 개인간증이 많이 나옵니다. 주요 포인트는 바울의 사도권 변증이며 이는 10장부터 13장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공부를 통해서 첫째, 사도 바울의 복음신앙과 둘째, 그의 양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2절은 인사입니다. 3절부터 11절은 바울이 받은 위로와 그 위로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12절부터 24절은 바울이 고린도 방문계획을 변경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인사와 비슷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번 고린도후서는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에 바울의 마음에는 1절의 자기소개는 아주 내적인 무게를 갖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볼펜으로 썼다면 꽉꽉 눌러서 썼을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입니까?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때 교회는 건물이나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교회를 건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신자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내고 있지만 또한 아가야 지역에 있는 성도들 즉, 아덴교회나 겐그레아교회에서도 읽혀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무엇을 기원합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요즘 북핵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참된 평강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진정한 은혜와 참된 평강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나라를 은혜와 평강으로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인사를 마친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바울은 그의 서신들 초두에 항상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랑과 자비,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다른 열두 개 서신에 전혀 나타나지 않고 오직 여기서만 나타난 표현이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는 3,4절에 ‘위로’가 네 번 나오고, 3절부터 7절까지는 무려 열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만큼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깊이 내적 외적으로 많은 고난가운데 있다가 디도가 전해준 소식으로 큰 위로를 얻고 쓴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디도를 통해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위로를 얻었지만 그 위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계속해서 위로의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4절에서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환난이라는 말은 ‘in all our troubles’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고린도후서 11장을 배우면 그가 받은 엄청난 고난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많은 고난을 감당하고 이겨낸 바울을 보고, “아, 바울은 7전 8기의 위대한 영웅이야, 불사조 같은 사도야”라고 바울을 영웅시할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런 고난을 능히 이겨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환난 중에 그를 위로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와 함께 하사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영웅시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좀 쓰임 받아도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었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4절에서 배울 수 있는 둘째는, 고난 중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위로로 우리는 고난 받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고난을 깊이 받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얻어서 그 고난을 이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가 다른 고난 받는 자들을 깊이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늘에서만 계시면서 ‘자, 내 계명이 여기 있다. 이것 다 지켜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셔서 우리 인간이 받는 모든 고난보다 더한 고난을 친히 받으셨습니다. 이로써 말로만이 아니고, 이론만이 아니고, 실제로 깊이 고난 받는 자들을 이해하고 위로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찾아올 때 두 가지를 명심해야 됩니다. 첫째, ‘아 하나님의 위로도 오겠구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반드시 나와 함께 하여 나로 이 고난을 능히 이기게 하시겠구나하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고난 받는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성숙한 목자로 빚고자 하시는 구나’ 하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바울이 받은 고난과 위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사 인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멸시를 받으시고 조롱과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바울은 이 고난이 그에게도 넘쳤다고 합니다. 이 고난은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그는 이 고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데 그 고난을 충분히 다 받지 못하여서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이단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불완전하여 우리가 뭘 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지만, 이제 우리가 그 완전한 속죄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끔 하는 이것이 우리의 남은 고난이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고난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 그거는  열두 사도에게만 하신 말씀이야’, ‘아, 그거는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지’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8장 35절을 보면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하고 이 말씀을 하시고, 또 누가복음 9장 24절에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됩니다. 이것이 아주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제자로 사는 것은 고난이 있습니다. 실제적입니다. 손해도 당하고 억울함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5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받는 고난과 위로는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말미암아’ 받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그와 연합하여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연합하여 부활합니다. 즉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태어납니다. 이런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집니까?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이 주어집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이 주어집니다.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받는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면서 편하게, 쉽게, 낙을 누리며 살고자 합니다. 스트레스프리 라이프를 원합니다. 고난 없기 원합니다. 즐거움만 있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고난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우리가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fallen world’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고난은 누구나 어차피 당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의미 없는 고난을 받느냐, 의미 있는 고난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고난은 우리를 망가뜨리고 그 인생을 추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열매가 없게 됩니다. 의미 있는 고난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성결하며 그 인생의 열매를 풍성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고난 중에 위로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의미 있는 고난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기쁨을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기쁨의 고난’, ‘즐거운 고난’, 고난을 상쇄하고도 남는 ‘행복한 고난’을 누리게 됩니다. 


지난 주 캐시강 자매님이 선교사 파송소감 발표했습니다. 그의 일대일 목자에 대한 긴 감사제목이 있었습니다. 제가 들으면서 그의 목자가 양을 섬기면서 고난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되었습니다. 또한 양이 이 모든 목자의 사랑의 수고를 알고 감사할 때, 그 목자가 받는 위로가 참으로 크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목자님이 소감을 들으며 ‘아 내가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리라’ 했을 것입니다. 영원히 멸망할 영혼들이 구원을 얻고 제자의 삶을 결단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모든 수고는 한 방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막 찾아갈 필요는 없지만 닥쳐온 고난을 피하려고 하기보다 주어진 고난을 기뻐하며 그리스도가 주시는 위로로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고난 받으신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더 사랑하고 다른 동역자들을 깊이 위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6절과 7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누리도록 권면합니다. 6,7절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은 얼마나 고난을 받았습니까? 8,9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아시아에서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습니다. 이제 죽었다. 다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루스드라에서 받은 고난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거의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그를 메어 성 밖으로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심한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9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누구보다 능력이 많고 지식이 많고 열정이 많았습니다. 자기를 의지하기 쉬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극심한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아, 내 힘으로는 안 되는구나’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9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과거에 한번 ‘살리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 중 능력이 많은데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그 분들에게 고난이 보장되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 되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질문제와 질병문제와 가정문제와 자녀문제.. 하나 끝나면 다른 하나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문제에 부딪치면 때로 바울처럼 살 소망을 잃습니다. 이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경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기도를 정말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이 하나님을 믿으면 불가능이 없구나’ 하는 그 믿음을 우리가 덧입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2절부터 24절은 사도바울이 왜 자기가 고린도 방문계획을 변경했는지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를 길게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울을 반대하는 고린도의 일부 성도들이 이에 대한 비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먼저 우리에게 온다고 해놓고 안 왔어’ ‘마지막 순간에 말도 안하고 마게도냐로 먼저 갔어’ ‘바울은 독재자와 같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자야’ ‘믿을 수가 없어’ 이런 비방을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먼저 자신이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증거합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바울은 그들을 자기 나름대로 임기응변식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대했다고 증거합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의미는 바울이 그들에게 보냈던 눈물의 편지는 그 내용 그대로이지 무슨 다른 저의를 갖고 복선을 깔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그 때에 이러한 자신의 진실이 밝히 드러나 그들이 바울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을 바란다고 말합니다. 


15, 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바울은 당초에 먼저 고린도에 들렀다가 거기서 마게도냐를 심방하고 다시 고린도에 와서 그들과 교제하고 고린도에서 유대를 가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계획이 바뀌어서 지금 마게도냐에 있는데, 여기서 고린도에 가서 그들을 방문하고 고린도에서 유대로 가고자 합니다. 즉, 당초 계획은 에베소-고린도-마게도냐-고린도-유대였는데, 변경 계획은 에베소-마게도냐-고린도-유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계획을 바꾼 것은 경솔히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과 그리스도가 신실하신 것 같이 자기는 오직 성령의 지혜로 신실하게 행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17-22). 


2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바울이 먼저 고린도로 달려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아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지난번 고통의 방문처럼 또 매를 가지고 가면 그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기도하며 적절한 방문시점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방문 대신에 디도 편으로 눈물의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이와 같이 매를 가지고 가서 고린도 성도들을 징계하지 않고 기도하며 기다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바울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인정했습니다. 부족하지만 믿음에 선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개인 신앙을 존중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오직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사람들, 기쁨으로 주를 사랑하고 동역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충만한 사람들이 되도록 섬기고자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세 가지로 간단히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 여정 가운데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함께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위로로 인하여 능히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수도승들이 고행을 하듯 하는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를 악물고 참는 극기주의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을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허락하신 것으로 영접하고, 고난 가운데도 주님의 위로를 풍성히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성장하며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물질이나 담요를 덮어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깊은 이해에서 나오는 위로입니다. 미국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뚱뚱한 몸매와 흑인으로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성추행도 당했습니다. 이런 그녀는 어떤 모양의 사람도 깊이 이해하며 공감하며 대화하는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아픔은 사명이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충만한 위로를 누릴 때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며 도울 수 있는 목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자의 삶은 양들의 기쁨을 돕는 삶입니다. 양들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 행복한 삶, 기쁨의 삶을 살도록 돕는 삶입니다. 양들을 주관하여 자기의 통제 아래 놓고자 하거나, 양을 통해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사랑의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믿고 감사하기를 기도합니다. 고난 가운데 위로의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