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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고린도후서 제 8 강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고린도후서 10:1–11:15)2018-01-28 10:24
작성자

2017년 고린도후서 제 8 강

 

주 안에서 자랑하는 바울

 

말씀 / 고린도후서 10:1–11:15

요절 / 고린도후서 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권면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 안에서 자랑하는 비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NIV 성경을 보면 본문의 “유순하고”와 “담대한”이란 단어에 인용부호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바울을 대적하는 이들이 그를 비난할 때 사용했던 표현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직접 사람과 만나 대면할 때는 순한 양처럼 유순하고 멀리 떠나 있는 상태에서 편지를 쓸 때면 매우 담대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본래 그가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거나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대놓고 못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얼핏 그렇게 보이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깊이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2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세상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예수님께 올 때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마음이 한없이 겸손하고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도 바울은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거칠고 도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배웠을 때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7-8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반면 양들을 해치는 거짓 사도들을 대해서는 바울은 매우 담대한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악함을 지적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만약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끝까지 바울의 권면을 듣지 않고 거짓 사도들의 말에 귀기울일 경우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도 담대한 태도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구한다고 말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다음으로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별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비해 그들은 비범한 능력을 갖춘 탁월한 사역자, 준비된 사역자라고 자랑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루살렘의 랍비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았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도 교수 밑에서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헬라 웅변술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빼어난 웅변 능력을 가진 이가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테네의 10대 웅변가 중 한 사람인 데모스테네스는 본래 지독한 말더듬이었습니다. 또 호흡기가 약해 몇 마디만 해도 숨이 찼습니다. 그는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 서서 천둥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빼어난 웅변가가 되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뛰어오르며 발성연습을 했습니다. 또 은유 비유 직유 등 여러 헬라 수사학에 정통하기 위해 유명한 수사학자의 책을 여덟 번이나 베껴 썼습니다. 긴장하여 어깨가 올라가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어깨 위에 칼을 대고 연습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아테네 10대 웅변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 중에는 이처럼 빼어난 웅변 실력을 갖춘 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치면 의사 면허증이나 변호사 면허증을 받은 사람처럼 전문가적 능력을 갖춘 것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았습니다. 또 헬라 문화권에서는 외모도 중요한 능력으로 받았습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깨끗하고 몸의 비율이 황금비율일 경우 특별 대접을 받았습니다. 헬라 문화권의 아테네 교회 성도들이 그들에게 매료된 것을 볼 때 그들 중에는 다비드 상처럼 빼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바울 목자님은 외모부터 볼품이 없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체구가 작고 대머리였고 다리가 굽은 안장다리나 오다리였다고 합니다. 또 목소리도 웅변술을 하는 이들에 비하면 평범하게 들렸습니다. 또 메시지에 귀가 확 열리고 눈이 번쩍 뜨일 새롭고 놀라운 내용이 없었습니다. 매번 들었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타난 거짓 사도들은 얼굴부터 현빈 같고 장동건 같았습니다. 입에서 멋진 헬라 수사학과 당시 정치 경제적 현안에 대한 수준높은 식견이 줄줄줄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사모님들, 목자님들, 형제 자매들까지 완전히 맛이 갔습니다. 거짓 사도들에게 매료되었고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처럼 그들에게 열광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그가 의지하여 싸우는 무기는 외모나 헬라 수사학 등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과 전쟁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지에 올라가 견고한 진을 만든 사람과 같습니다. 당시 견고한 진은 가파른 곳에 위치하여 그곳을 점령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참호를 파고 모래주머니를 쌓아둔 견고한 진은 점령하기 어렵습니다. 전쟁영화를 보면 고지전이 얼마나 치열하고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과 인본주의의 고지 위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쾌락과 향락의 고지 위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 지역으로 왔을 때 그곳 사람들이 그 어떤 지역보다 높고 험한 고지 위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 어떤 철학이나 사상으로 저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견고한 진 앞에서 복잡하고 현란한 철학이나 사상을 전하는 대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으며 그것은 바로 너희의 죄 때문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실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 죄로부터 벗어나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장차 죄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라고 담대하게 전파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고린도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마치 견고한 진을 한 순간에 폭파시키는 스커드 미사일과 같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파도로 견고한 진을 한 순간에 덮어버리는 쓰나미와 같았습니다. 그의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 마침내 견고한 진이 무너지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전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지금 이 시대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다고 폄하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인간적인 매력, 지식, 철학, 세상의 학위가 훨씬 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이에 편승하여 ‘아, 바울 목자님이 전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너무 많이 들었어, 바울 목자님은 십자가와 부활밖에 아는 것이 없으셔. 이젠 그만 듣고 싶어.’ 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요즘 정체 상태인데 새롭게 성장하려면 저렇게 말을 잘 하고, 헬라 철학에 능통한 분들을 초빙해야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세상 철학이 사람의 마음과 귀에 순간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을 화목시킬 능력이 그 안에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죄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의지하여 힘차게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우리 모임은 지난 세월 똑똑하고 메시지를 잘 전하는 스타 목회자를 중심으로 성장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의 핵심 메시지인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젊은이들의 마음에 증거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 복음이 놀라운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주의, 이기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의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사상을 다 내려놓고 회개하며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 복음에 복종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은 뭔가 좀 다르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아이돌 스타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아이돌 스타같은 매력적인 설교자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 시대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많이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대적하여 고지에 견고한 진을 쌓은 젊은이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유일한 길임을 배우게 됩니다. 2018년 새 학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캠퍼스에 자기 생각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의 견고한 진을 갖춘 젊은이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그들과 말싸움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들보다 더 똑똑하고 더 젊고 더 잘생긴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들고 나갈 때, 그 복음의 메시지가 강력으로 역사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풍성하게 체험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7-8절에서 바울은 화려한 외모를 보지 말고, 또 자신의 볼품없는 면만을 보지 말고 그가 전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또 그가 유순하여 유모처럼 행하는 것이 사도의 권세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가 담대하게 사도의 권세를 가지고 심판을 선포하면 그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멸망에 이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죄사함과 생명에 이르기를 원하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런 사랑의 동기를 자랑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9-1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과거 그가 보낸 준엄한 편지들을 읽고 바울이 그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려 한다는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거짓 사도들은 그의 편지는 무게가 힘이 있으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편지를 쓸 때나 몸으로 대할 때나 같은 바울입니다.


11-16절에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자기를 자랑함으로 권위를 인정받고자 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의 자랑의 기준은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이었습니다. 그들은 헬라 수사학이 가득 담긴 메시지를 전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 빼어난 메시지를 전했다고 이른바 ‘자뻑’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뻑하는 자기를 열광적으로 따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보며 계속하여 자기를 높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개척되었는지를 언급합니다. 13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나누어주신 그 범위의 한계에 따라 개척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15절을 보면 바울에 대해 하나님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은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남이 닦아놓은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곧 다른 사람이 이미 개척해 놓은 교회에 가서 사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롬 15:20) 이는 개척자로서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이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는 얼마든지 이미 개척된 지역에서 제자양육하는 사역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세계 선교의 방향, 개척자의 방향을 좇아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거짓 사도들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눈물과 땀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세워진 교회입니다. 실상 거짓 사도들이 전한 헬라 철학과 수사학이 가득한 메시지를 듣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믿고 의지한 바울의 수고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은 이런 고린도 교회를 인간적인 매력과 거짓말, 자기 자랑을 통해 자기들 것으로 접수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태는 오늘날 신천지에서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신천지는 교회 안으로 파고 들어가 여러 거짓말과 자기 자랑으로 환심을 삽니다. 그리고 새 양을 데려오는 척하면서 신천지 신도들을 교회로 끌어옵니다. 그리고 그 신천지 신도들을 핵심 멤버로 세운 후 마침내 그 교회를 신천지 교회로 접수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이와같은 영적인 강도들이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미혹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바른 분별력을 갖기 원합니다. 참된 사역자는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인정과 칭찬만을 바라며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합니다. 그런데 간혹 사역자 중에 은근히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를 듣고, 그가 인도한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나서 결과적으로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나지 않고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면 그는 참된 사역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메시지나 특강을 듣고 난 후, 자꾸 그 사람의 탁월함이 생각나고 그 사람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다면 그는 수상한 사역자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은밀하고도 교묘한 방식으로 그리스도 대신 자기를 자랑한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자기가 얼마나 다른 사역자에 비해 탁월한 사역자인지를 은근히 사람들의 마음에 심은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 수양회에서도 특강을 하셨던 박영돈 목사님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은밀한 방식으로 자기를 자랑하는 사역자가 한국 교회를 망치는 주범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기보다 눈과 귀와 마음을 매료시키는 인간적인 매력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없이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기 지식을 자랑합니다. 돈을 자랑하고 자기 외모를 자랑합니다. 명품 가방과 구두, 명품 옷을 자랑합니다. 명품 가방과 옷이 곧 나의 생활 수준이고 이런 명품 제품을 살 수 있는 나의 실력이고 정체성이며 자랑입니다. 또 해외여행 다녀온 것을 자랑합니다. 해외여행을 즐길만한 삶의 여유와 멋과 낭만이 있음을 자랑합니다. 유명한 사람과 지인인 것을 자랑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자랑합니다. 새로 사귄 여친 남친을 자랑합니다. 이런 멋진 남친 여친을 사귈 수 있는 능력을 자랑합니다. 맛집에서 맛있는 음식 먹은 것을 자랑합니다. 이런 맛집을 찾아낼 수 있는 정보력을 자랑합니다. 이런 자랑거리들을 전부 개인 SNS에 올려 널리 자랑합니다. 부러워하는 댓글에 일일이 답변을 달아주며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자랑하는 사람을 깃털처럼 가벼운 사람, 속물같은 사람이라고 비판하는대신 오히려 부러워합니다.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세상에서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장차 주님으로부터 전혀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무게를 저울로 재어본다고 하였습니다. 그 저울로 재어볼 때 자기 자랑으로 가득한 사람은 깃털처럼 가벼워 저울 추가 전혀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무게가 나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시 한 번 17-18절을 보십시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사람은 주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자랑은 삶의 보람이요 열매입니다. 시골 동네에 가보면 노인네들이 정자에 모여 앉아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이런 자식 자랑을 듣다가 열을 받으셔서 우리 아들은 서울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고 뻥을 치셨습니다. 와 하는 친구들 앞에서 이왕 뻥을 친 김에 서울대 영문과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뻥을 치셨습니다. 이렇게 자식 자랑을 하는 이유는 자식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기까지 본인이 수고하고 헌신한 그의 모든 삶이 그 자랑 안에 다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 자랑이 그의 삶의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런 자랑이 있습니다. 그 자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 하늘과 땅과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광대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영혼들을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저 하늘에 영원히 거할 처소를 예비해두신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설령 시험과 어려움 가운데 있을지라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나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은 때로 주변 사람을 몹시 부담스럽게 만듭니다. 또 과장을 하거나 거짓말을 함으로, 또 다른 사람을 깎아내림으로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자랑하는 것에는 과장이나 허풍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충분히 다 자랑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 자랑은 자기에게 잠시 만족감을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주님 자랑은 나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은혜와 감동을 줍니다. 자기 자랑은 바벨탑을 쌓지만 주님 자랑은 나의 삶을 꽃처럼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열매맺게 합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의 인정과 칭찬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자랑이 있습니까?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갑니까? 올 해에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 주님을 자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과 우리를 향한 그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힘써 자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그가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가 어리석다고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의 말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현혹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미혹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그가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열심을 낸 것은 중매장이처럼 그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사랑의 다리를 놓아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와가 뱀에게 미혹당했던 것처럼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당하여 바울이 전파하지 않은 다른 복음을 영접하였습니다. 실상 바울은 스스로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보수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은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현재 바울을 비난하고 있는 이들은 거짓 사도들입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 자기 자랑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 여러 지식을 쌓았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은 이제는 주를 자랑하고 복음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본문을 준비하면서 제가 과거 자기를 자랑하는 일에는 특별한 열심을 내었는데 주를 자랑하는 일은 미적지근하게 하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올 한 해 자랑스러운 나의 주님을 힘써 자랑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견고한 진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뿐입니다. 또한 주님을 높이고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는 자에게는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2018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붙들고 나의 주님을 힘써 자랑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