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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룻기 제 3 강/ 기업을 무른 보아스(룻 4:1-22)2017-03-11 09: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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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룻기 제 3

 

기업을 무른 보아스

 

말씀 / 4:1-22

요절 / 4: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룻기는 짧지만 아주 아름다운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어떤 분은 룻기 소감을 쓰는데 '도깨비'같은 재미있는 TV 드라마 한 편 보고 인터넷에 후기 올리는 기분이라고 하더군요. 룻기의 키워드가 무엇일까요? '기업 무름'입니다. 요즘 용어로는 '회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시련을 만나 텅텅 빈 두 과부 나오미와 룻이 아름답게 회복되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회복이 가능했던 이유는 구속주 보아스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도 재난을 당해 텅텅 비어 버린 사람들과 같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인생들을 회복시키는 구속자가 누구일까요? 본문을 통해 나의 구속자, 나의 고엘 되시는 예수님을 깊이 만나길 기도합니다.

 

지난 내용을 잠간 회고해봅니다. 나오미는 룻의 얘기를 다 듣고 보아스가 심정적으로 룻에게 끌리고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으로 하여금 매우 적극적인 의사 표현 방식으로 보아스에게 청혼하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순종했고 보아스는 룻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공명정대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기업을 무를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원칙대로 그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책임을 거절하면 자기가 책임을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3:13b). 오늘 본문은 보아스가 그 더 가까운 친족에게 묻기 위해 그를 찾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는 남에 눈에 안 뜨이게 룻을 이른 새벽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문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성 안에 살았고, 아침이 되면 성문을 통과하여 들이나 밭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성문에 올라가 있으면 그 아래로 누가 지나가는지 잘 볼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성문 밑으로 지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세히 주목했습니다. 드디어 그가 찾던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어이, 아무개! 거기 잠깐만! 이리 와요. 여기 잠깐 앉게나." "보아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중요한 일이 하나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요". 그리고는 그 성읍의 장로들 열 명을 불러 앉게 했습니다(2). 장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자켄''턱수염'이라는 뜻입니다. 턱수염이 났다면 나이가 제법 된 분들을 의미하죠. 이 말은 점차 덕망 있는 연장자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열 명의 장로면 공식적인 거래나 재판을 할 수 있는 증인의 수를 만족시켰습니다.

 

이제 보아스는 그들을 부른 이유를 설명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했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아무개 친구~, 모압 땅에서 돌아온 나오미 알지? 모압 며느리 한 명을 데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온 우리 친족 나오미 말이야. 그가 남편 엘리멜렉 소유의 땅을 팔려고 하는데 자네 관심 있어? 내가 등기를 열람해보니 자네가 영순위더라고. 자네가 우선권이 있으니 원하면 사도록 하게. 만일 자네가 안사겠다면 내가 사겠네."

 

지난 시간에 배웠지만 고대 이스라엘에는 가까운 친족들이 어려운 형편에 처한 다른 친족의 기업을 무르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룻기에는 '기업을 무르다'(고엘)라는 동사가 20번 반복되는데, 그 뜻은 '되찾다', '구속하다'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할당받은 땅을 보존하고, 가문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보상받도록 하는 상부상조 장치였습니다. 가까운 친족이 어려움을 당한 다른 친족을 도와서 구제해야 된다는 사랑의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업 무름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 고엘(구속자)은 혈육 관계가 있는 친척이어야 했습니다. 둘째, 경제력이 있어야 되었습니다. 셋째,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 기업을 무르는 것은 곤궁에 빠진 친족을 구하기 위해 손해를 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제성이 없었습니다. 사랑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자원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기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 그 아무개의 의사 표현이 필요했습니다. 보아스의 제안에 대한 그 아무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르리라". 자기가 그 땅을 사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지파별, 가족별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 본래 그 땅은 사고 팔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땅의 원주인은 영원히 하나님이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할당해주신 땅에서, 소유권이 아니라 농사를 지어 소출을 얻는 경작권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형편이 어려우면 땅을 사고파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오십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the year of Jubilee)이 되면 조건 없이 원주인에게 그 땅을 돌려주어야 했습니다(27:24). 그래서 희년이 가까울수록 땅 값이 내려갔습니다. 희년이 1~2년 밖에 남지 않은 땅은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의 땅은 어떤 특징이 있었습니까? 희년이 와도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멜렉도 죽었고, 두 아들도 죽었고, 후손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땅을 돌려줄 적법한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 땅을 사면 영원히 자기 가문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무개는 자기가 무르겠다고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무개가 계약서에 도장을 막 찍으려고 하는 순간 보아스가 말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보아스는 ", 잠깐! 그 땅을 무르겠다고 하는 것은 좋은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뭔데?" ", 그 땅은 패키지야. 자네가 그 땅을 사면, 그 모압 여인도 같이 취해서 후손을 이어주어야 돼. 그리고 룻이 아들을 낳으면 자네 후손이 아니고, 죽은 말론의 아들로 호적에 올리는 거야. 물론 자네가 지금 사려고 하는 땅도 그 아들의 재산으로 되고, 결국 그 땅은 엘리멜렉 가문으로 되돌아가는 거지. 그래도 사겠나?" 보아스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그는 말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그 아무개는 이해타산이 매우 빨랐습니다. "아니, 그러면 내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네. 돈을 주고 땅을 일단 사지만, 후손을 낳아주고 그 땅까지 돌려준다면 나는 뭐지? 내게 아무 유익이 없네! 나는 못해! 보아스 자네가 무르려면 무르게나!" 그 아무개는 자기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하신 고엘 제도의 도덕적 의무를 이행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그 아무개는 자기 신발을 벗었습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룻의 기업을 무를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 같아 달려들었다가 손해를 볼 것 같으니까 금방 물러섰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사람이요 율법의 근본정신인 친족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친족 나오미가 굶어죽든 말든, 젊은 룻이 과부로 평생을 살든 말든, 자기 친족 엘리멜렉의 대가 끊기든 말든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사사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신앙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의 이름이 끝까지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아무개'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명씨' '홍길동'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물질에만 관심이 있었고 룻이 얼마나 귀한 믿음의 여인인지 깨닫지 못한 자로 그 이름도 기억될 만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제 엘리멜렉의 땅과 룻을 구속할 권리와 의무가 보아스에게 넘어왔습니다. 보아스는 장로들 앞에서 무엇을 선언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보아스는 나오미의 손에서 그 유산을 다 샀습니다. 룻도 함께 취하여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습니다. 율법대로 순종하여 첫 아들은 죽은 룻의 남편 말론의 기업을 잇게 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장로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일에 증인임을 밝혔습니다.

 

고엘 제도는 곤궁에 빠진 친족을 구제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자기희생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물질적인 손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친족을 책임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결단한 것이었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으로 룻을 영접하고, 그의 보호자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사시대의 전반적인 영적 타락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보아스의 결단은 참으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오갈 데 없는 룻의 고엘(구속자)이 되었습니다. 고엘(구속자)의 개념은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입니다. 시편 19:14절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시인도 하나님을 '나의 구속자'"My Redeemer"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14에서도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자 'Redeemer'이십니다. 이러한 구약의 고엘 사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룻과 같은 이방인으로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룻과 같이 텅텅 빈 인생이었습니다. 율법의 저주 놓여 영원한 심판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고엘, 곧 구속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치르신 대가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피를 흘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의 피로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끊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잇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회복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고엘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대학에 다닐 때, 인생의 허무에 시달렸습니다. 죽으면 끝인데 하는 생각에 그 무엇에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 인생이 빈털터리같이 텅 빈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은 고엘이 되어 주셨습니다. 제 인생에 찾아오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모든 허무가 물러가게 하시고 삶의 의욕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구속주로 만난 사람에게는 더 이상 허무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 여러 가지 인생 문제에서 회복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고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고엘의 정신으로 어려움 가운데 처한 다른 사람을 구속하는 자세로 살아야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희생하며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겠습니다. 요한일서 3:16절도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동역을 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잘 되고 나와 동역하는 상대방이 잘 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희생하며 섬기는 자세로 동역을 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함께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는 근본 자세도 내가 배우자를 섬겨야겠다, 하나님이 이 분을 나에게 일생동안 섬기라고 보내주시는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 제물로 즉, 고엘로 주기 위함이셨다고 하셨습니다. 동역이나 결혼에 있어서 고엘의 정신이 부족하여 서로 요구하고 탓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럼 나는 뭐야? 내게는 남는 게 뭐지?"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으로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귀한,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심판에서 영원히 벗어나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런 우리는 세상의 것을 다 잃어도 이미 최고로 복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인생의 승리자들이 된 것입니다. 또한 그런 자세로 남을 섬기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사 하늘의 복을 쏟아 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를 믿고 특별히 우리가 부름 받은 캠퍼스 양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나의 목숨을 내어주는 자세로 섬기길 기도합니다.

 

보아스가 이제 공식적으로 룻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자 장로들이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장로들은 이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룻을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같이 되도록 축복했습니다. 라헬과 레아는 이스라엘의 족장 야곱의 아내로서, 12지파를 형성한 어머니들입니다. 룻이 라헬과 레아 같이 믿음의 어미가 되도록 축복했습니다.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이 번성하도록 축복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하나님께서 룻에게 임신하게 하심으로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구속을 받고, 아들을 낳음으로, 그 동안의 모든 슬픔과 고통,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 동안의 모든 수치가 사라졌습니다. 이방 여인 룻은 가나안 여인 라합 및 다말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1:5).

 

룻이 아들을 낳자 동네 아줌마들이 가장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여자들로서 나오미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인들은 나오미를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동네 여인들은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룻의 아들의 이름이 유명하게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그 아들이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이며, 노년의 봉양자라고 했습니다. 룻이 낳은 아들을 통해서 나오미의 생명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와 같았던 나오미의 가정 곧 엘리멜렉 가문이 룻이 낳은 그 아이로 인해 생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늙은 나오미를 섬길 봉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룻을 어느 정도로 칭찬했습니까? 15b을 보십시오.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고 했습니다. "일곱 아들"은 이 땅에서 어버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축복을 나오미에게 안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효성이 많은 아들들보다 더 컸다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놀라운 축복을 안겨주는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룻이 이와 같은 복덩어리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녀가 보아스의 구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구속을 받음으로 룻은 모든 저주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늙은 시어머니에게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가문에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을 축복의 땅이 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메시야가 탄생하는 축복의 민족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우리도 모든 저주에서 벗어나 룻과 같은 복을 누리고,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근원이 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정의 복덩이, 우리가 속한 가문에 복덩이요 만민의 복의 근원들로 써 주시길 기도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나오미의 기쁨이 어떠합니까?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했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나오미는 아기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이웃 여인들이 그 손자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었습니다. '오벳'이라는 말은 '섬기다'는 뜻입니다. 늙은 나오미를 봉양하고 섬기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15).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18-22절을 보십시오. 룻기는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고 기록함으로 끝이 납니다. 다윗의 출생을 밝힘으로써 막을 내립니다. 다윗 왕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가문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고엘, 구속주이십니다. 예수님의 구속 덕분에 우리는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났습니다. 허무와 운명, 죄의식과 죄의 형벌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을 나눠주는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고엘의 정신으로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17학번 양떼들을 고엘의 정신으로 섬기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