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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요한복음 제3강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님' (요한복음 2:1-25)2018-03-18 10: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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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요한복음 3강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2:1-25

요절/ 요한복음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이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사흘 되던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난지 사흘 째 되던 날입니다. 예수님이 빌립과 나다나엘을 만나셨던 곳은 유대 요단강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역에서 만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로 가는 길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욱 인격적으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갈릴리 가나에서 열린 결혼식장에 가 계셨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결혼식 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 결혼식은 여러 아픔과 근심, 염려, 슬픔, 고난, 애통함과 수고로움이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치 그런 세상을 잠시 떠나 천국에 와 있는 것 같은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중대한 결혼을 위해 신랑과 신부는 먼저 약혼을 하였고 약 1년간 결혼을 준비했습니다. 신랑측 아버지가 마침내 모든 결혼준비가 다 끝나 혼인날짜를 잡으면 신랑은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왔습니다. 이때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마지막 총각 파티를 한 다음 보통 저녁 시간이나 때로는 밤늦게 신부집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신부는 그때까지 신부 친구인 들러리들과 함께 깨어 있다가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신랑을 따라나갔습니다. 이때 들러리들이 미리 준비한 등불로 신랑 집으로 가는 어두운 밤길을 밝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미리 등불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와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 비유가 바로 이 풍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랑 집에 도착한 신부는 마침내 신랑과 함께 결혼식을 올리고 1주일간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잔치에는 반드시 미리 초청장을 받고 참석하겠다고 응답한 사람들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최측에서는 미리 그 수만큼 필요한 음식과 포도주를 넉넉히 준비하고 또 하객들이 입을 예복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혼인 잔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의 비유와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잔치에 왔다가 쫓겨난 사람의 비유가 이 풍습에서 나왔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당시 유대인 결혼잔치에서 포도주는 절대로 떨어지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잔치의 흥을 돋구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조선시대 때 잔치집에서 흥을 돋구는 음악이 중단된 것과 유사합니다. 갑자기 음악이 중단되면 잔치분위기가 사라지고 왁자지껄한 시장 한 복판에 와 있는 것 같은 썰렁함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수군대기 시작하고 잠시 후면 ‘하객 대접이 이게 뭐야!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고 중요한 약속을 다 취소하고 산넘고 물건너 왔는데 무슨 준비를 이따위로 했어? 아 이 사람아 나는 배타고 바다 건너왔어! 그런데 이게 뭐야’ 하는 거친 말이 나올 것이 뻔했습니다. 당시 미리 와서 잔치일을 돕고 있었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깜짝 놀랄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말씀은 NIV 성경에 “Why do you involve me?”로 왜 이 일에 저를 끌어들이십니까? 라는 뜻입니다.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는 지극히 사적인 문제인데 왜 나를 끌어들이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매몰찬 거절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메시야로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 메시야가 가진 능력을 사용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오늘날 현직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어머니나 일가친척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을 이용하여 사적인 요구를 들어주도록 청탁하면 안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몰찬 거절의 말씀 뒤에 또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한복음에서 “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복음에서 “때”는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이 이루어져야 할 때를 가리킵니다. 이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십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지금 마리아의 요청은 거절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말함으로 하인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마리아는 만약 예수님이 이 문제를 도와주기로 결심하셨다면 하인들을 통해 무슨 지시를 내리실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때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즉각 순종하지 않거나 거부한다면 일에 중대한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단단히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낙심하지 않고 필요한 준비를 하는 마리아를 통해 귀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어머니인 자기를 “여자여” 부르시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매몰차게 거절하실 때 소위 “삐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배가 아파서 낳아놓았더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가’ 못내 섭섭해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과부였습니다. 마리아는 어떤 점에서 예수님을 가정의 가장이요, 남편처럼 의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쌀쌀맞게 친절한 설명도 없이 단 칼에 거절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니 뭐여, 여자라고, 내가 여자라고, 또 나하고 뭔 상관이 있느냐고?” 하며 부엌에 가서 대성통곡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단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천사가 수태고지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윗 왕국의 영원한 왕이신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또 그 예수님이 지난 30년간 조용히 목수의 아들로서 헌신하다가 얼마 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제자를 부르시는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거절하셨지만 때가 되면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일, 곧 하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일을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위험한 때가 영적으로 삐지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해 보이지만 나에게는 절박하고 절실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내 능력과 지혜로 도저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한계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문제를 도와주시도록 주님께 들고나갑니다. 그런데 아무런 주님의 응답도 도우심도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반응이 없으십니다. 마치 주님께서 “남자여, 여자여, 그것은 너의 개인적인 문제이니 너가 알아서 해야지, 왜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느냐”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때 영적으로 팩 토라져 “네 알겠습니다.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신 주님도 제 일에 절대 간섭하지 마십시오.” 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주님께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비록 나의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이것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다면 이것은 더 이상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인 것으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주님께서 지금 나의 기도와 간구를 거절하시는 것 같아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낙심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절실한 나의 이 문제를 주님께 들고 나아가 이 문제를 도와주심으로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고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시도록 간구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 목자님들은 마리아 사모님의 스피릿을 배워 영적으로 토라진 양들을 찾아가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부지런히 준비시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유대인의 결례는 구약 시대의 의식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곤충이나 벌레 등은 부정한(unclean)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제사에 쓰이는 그릇이 혹 이런 것으로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이 밖으로 외출하였다가 이런 것으로 부정해질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부정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정해질 경우 공적인 예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 곧 깨끗한 물로 손이나 몸을 씻는 정결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정결해졌습니다. 거기에 그런 정결의식을 위해 사용하는 물이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돌 항아리 한 개 당 물이 두 세 통 든다고 하였는데 한 통은 성인 한 사람이 우물가에 가서 한 번에 길어올 수 있는 물의 분량입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그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자 지금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하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도주를 구해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이 일은 포도주 떨어진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또 오늘날처럼 수도 호스를 사용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우물가까지 가서 한 통씩, 한 통씩 힘들게 길어와야 합니다. 만약 마리아가 미리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연회장과 신랑에게 찾아가 그렇게 해도 되느냐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순종으로 옮겨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랬더라면 물이 포도주로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사모님에 의해 마음이 잘 준비된 하인들은 기다렸다는듯이 Yes, Sir 하며 돌항아리에 아귀까지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물을 다 채웠다는 보고를 받으신 예수님은 이제는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셨습니다. 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그냥 시킨대로 하면 되니까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애타게 찾고 있는 연회장에게 맹물을 갖다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잘못하면 대노한 연회장이 물을 하인의 얼굴에 쏟고 바가지로 하인의 머리를 두들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 해요. 꼭이요.” 한 마리아 사모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래 이왕 순종한 것 끝까지 가보자.” 결심한 하인들은 마음을 담대하게 먹고 포도주를 담는 항아리에 물을 가득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맹물을 연회장에게 갖다주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저자 요한은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불러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며 칭찬까지 하였으나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고 반면 물 떠온 하인들은 알았다고 멘트하고 있습니다. 하인들은 포도주를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저자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중요한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상식적으로나 혹은 이성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실제 삶에서 순종해보면 그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보면 성경의 말씀들이 대부분 실제 삶에서의 순종을 요구하고 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기 계획과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안드레와 요한에게 “와서 보라” 하셨습니다. 와서 보기 위해서는 하루나 이틀 스케쥴을 완전히 비워야 합니다. 또 집중해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 학생들에게 있어 주말에 시간을 내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늦잠을 푹 자거나 혹은 날씨도 좋은데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 가서 마음껏 놀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일날 “와서 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와서 말씀을 듣고 신앙 선배님들과 교제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게 됩니다.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요한복음의 말씀들은 계속하여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겸손히 하늘 일을 직접 보고 증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목마른 사마리아 여자에게 내가 마르지 않는 영생의 샘을 선물로 준비했으니 그 선물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38년 동안 불평만 하면서 누워있던 병자에게 불평을 중단하고 지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들은 때로는 나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 때문에, 때로는 부끄럽다는 생각 때문에, 때로는 지금까지 하던대로 하고 싶은 관성의 법칙 때문에 순종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봄학기 요한 복음 말씀을 공부하면서 전에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공부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한 번 순종해봄으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봄학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저자는 본문의 사건이 가진 의미를 11절 말씀으로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사건은 예수님이 행하신 첫 표적입니다. 표적이란 원문상 sign으로 기적(miracle)과 의미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곧 표적은 기적을 동반한 사건을 통해 그 안에 주님이 가르쳐주시려는 교훈이나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본문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 기적을 통해 주님께서 나타내시려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어떤 존재가 가진 아름다움이나 능력, 위대함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에서 피겨 스케이팅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그가 가진 피겨 스케이터로서의 능력이 100% 가까이 발휘됨으로 아름답고 감탄을 자아내며 전 세계에 자신의 영광, 조국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에서 저자인 사도 요한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영광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저자 요한은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그 주님께서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대화를 나누었던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의 독생자의 충만한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떠한 낮아짐과 심지어 십자가의 수치와 모멸까지 다 참으신 주님을 생각할 때 그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11절에서 주님께서 나타내신 영광은 요한복음 1장의 영광과 비교하여 반대입니다. 현재 주님은 본래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저 평범한 유대 청년으로 보입니다. 나이가 30이니까 40대 후반이나 50대 사람들이 볼 때 아직은 풋풋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요, 메시야로 선포하고 그 증거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은 온 세상이 깜짝 놀랄 큰 기적은 아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고도로 발전한 현대 과학과 모든 첨단 기술을 동원해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H2O가 C2H5OH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곧 본래 없던 탄소가 생겨났기 때문에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사건을 통해 아주 잠간 창조주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를 통해 요한복음 1장에서 저자 요한이 증거하고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예수님 자신이 증거한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메시야시라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을 주님이요,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그 순종의 결과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능력이 나타나는 결과 주님의 영광이 선포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영광이 선포될 때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2천년 전 유대 사회와 비교해 볼 때 오늘날 현대 사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물질문명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배고프고 가난하였지만 2천년 전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 더 나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은 동네 마을에서 작은 기술 하나만 배워도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대학까지 나오며 머리가 터지게 공부해도 번듯한 직장 하나 잡기가 어렵습니다. 한 번 수치스러운 일이 생기면 SNS를 통해 전국에 알려지기 때문에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살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능력을 나타냄으로 자기 영광을 선포하고 그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1,000명이 도전하면 한 두명 성공할까 말까 할 정도일 것입니다. 90%, 아니 어쩌면 99%에 까까운 사람들이 깊은 실패의식과 좌절감, 절망감 속에 고통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삶에 현장에 오셔서 기쁨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들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또 그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느낄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을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할 때 얼마나 기쁨이 사라지고 불안과 초조가 가득합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여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가운데, 믿음으로 사는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내 삶에 충만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12절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 또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갔습니다. 13절을 보면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유월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총 3번의 유월절이 나오는데 13절은 그 첫 번 유월절입니다. 


14절을 보면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매년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로 통용되던 로마 화폐에는 가이사를 신으로 여기는 글과 형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는 성전세로 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것이 없는 다른 동전으로 환전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성전, 구체적으로 성전 안 이방인의 뜰에는 이런 환전상들이 있었고 환전 수수료로 약 12.5%를 부과했다고 합니다. 이런 환전상들은 대제사장들에게 비싼 자리세를 지불했고 이는 대제사장에게 막대한 부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또 성전 안에서 드려야 할 희생의 제물의 경우 흠이 있으면 안되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온갖 핑계를 대며 사람들이 직접 가져온 희생제물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자신들이 지정한 장소에서 제사장 KS 마크가 붙은 제물을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사도록 유도했습니다. 이로 이해 성전 안은 기도하는 소리, 말씀을 읽고 선포하는 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시장터처럼 시끌벅적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분노하신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상인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고 상을 엎으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하셨습니다. 성전은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이요,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곳은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곳이요, 또 주님께 나의 죄문제를 아뢰고 죄사함받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시편 69:9절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한편 유대인들, 특히 막대한 이권을 독점했던 제사장들은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지금까지 46년간 지었고 그럼에도 아직 반밖에 짓지 못했는데 삼일 동안에 일으킬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전된 예수님의 육체를 의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성전이 하는 모든 기능을 십자와 부활의 복음으로 대체하셨습니다. 중보자되신 예수님을 통해 죄인이 죄사함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전을 사흘 동안에 일으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23-25절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여러 표적을 보고 사람들이 믿었으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으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가진 믿음에 대해 다른 이의 증언을 들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사건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도 각자 가진 절박한 문제를 주님께 들고 나아가는 가운데 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 능력의 주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