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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요한복음 제6강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5:1-29)2018-04-22 09:5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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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요한복음 제 6 강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 / 요한복음 5:1-29
요절 /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세계 4대 문학가를 든다면 호머, 단테, 셰익스피어, 그리고 괴테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일리야드, 오디세이를 쓴 호머를 단연 뛰어난 작가로 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전쟁 중에도 늘 일리야드를 애독하였습니다. 속편으로 쓴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고향 이타케로 돌아오는 여정을 그린 작품인데 이 책은 그 이후 인류 역사와 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책들이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다시금 깨닫고 말씀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그라!" 하시며 자신을 그리스도로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여인은 큰 놀라움 가운데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와서 보라!"고 간증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4:42).


예수님은 4장 후반부에서 갈릴리 가나에 계실 때 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유대인의 명절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3대 명절(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1절의 명절이 2:13절에 나오는 유월절 이후 오십 일째인 오순절로 보기도 하고 또는 그 다음 해의 유월절로 보기도 합니다. 명절은 기쁜 축제일입니다. 우리가 설이나 추석을 맞으면 고향에 가듯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 명절을 지냈습니다. 예루살렘에 온 모든 순례자들은 기쁨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당시 예루살렘 성에는 여덟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감람산을 향하는 동편에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황금문과 양문이었습니다. 양문은 성전에서 제사할 때 바칠 제물이 들어가는 문이었는데 대표적인 제물이 양이었기에 양문(Sheep gate)으로 불렸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이 문을 통해 끌려 나갔다고 하여 스데반 문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양문을 통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오른 쪽에 베데스다 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그 뜻이 '자비의 집'입니다. 최근에 발굴한 결과 그 못의 크기가 약 60m X 100m 규모로 밝혀졌습니다. 그 못 주위에는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은 긴 정자 같은 것으로 지붕이 있어 뜨거운 햇빛이나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행각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한 마디로 그곳은 중증 장애인 보호소 같은 곳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물의 움직임을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 먼저 못에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불치의 병이 나았던 사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증 장애를 가지 사람들은 실날같은 희망을 붙들고 이곳에 몰려들어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베데스다에 언제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는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38년이면 얼마나 긴 기간인지요! 우리 신입생들 보통 19살이죠? 두 번 살아야 되는 세월입니다. 그는 아마 베데스다 최장수 병자였을 것입니다. 그런 오랜 기간 중증 장애를 앓고 있으니 3년 병에 효자 없다고 가족들도, 친구들도 다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오늘도 베데스다 못가 행각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외로웠고 절망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 모든 소망을 잃고 더 이상 갈 곳도 없어 그저 그곳에 놓여진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먼저 찾아가시는 예수님은 은혜로운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도 돌아보면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받은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 자격도, 아무 잘한 것도 없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섬겨주셨습니다. 은혜로우신 우리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예수님이 그를 주의 깊게 보셨을 때 그의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버림받은 상처, 그의 외로움, 그의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긍휼히 여기고 그를 돕고자 하십니다.


6b절을 보십시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아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낫고 싶으니까 여기까지 와서 누워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결코 헛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마음에는 오랜 병으로 인해 자기는 나을 수 없다는 부정적인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도 상실하였습니다.


소원이 없다는 것은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기 어렵습니다. 소원이 있는 곳에 믿음의 통로가 열리고 믿음이 있는 자는 예수님을 알고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마음에 소원을 불러일으키신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Do you want to get well?) 이 말씀은 병자로 하여금 오래 전에 가졌던 낫고자 하는 소원을 꿈틀거리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떠올리며 서러움과 원망이 북받쳐 오르게 했습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도 않음으로 그저 절망의 돗자리에 누워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 네 처지가 딱하니 내 제자 중에 힘이 제일 센 베드로가 너를 업어서 물에 데려다 주도록 하겠다” 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38년 병자는 낫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등으로 못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의 틀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베스트셀러는 이런 책들이었습니다. "물이 동하기 전에 반드시 나타나는 징조", "남보다 물가에 더 가까이 돗자리를 까는 방법", "베데스다 처세술, 부제: 협력과 배신". 예수님은 그러한 고정관념에 도전하신 것입니다.


며칠 전에 쎈터에 들어오는 데 제 앞에 한 목자님과 석대열 형제님이 현관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그 목자님이 2041.. 를 쳤는데 문이 안 열렸습니다. 다시 한 번 하는데 삐 소리가 나며 잘 안 열렸습니다. 그가 다시 시도하려고 할 때 석대열 형제님이 갑자기 오른쪽 유리문을 팍 밀었습니다. 그때 마침 오른쪽 문에 락이 걸려있지 않았습니다. 문이 바로 열렸습니다. 저는 뒤에서 그것을 보면서 "오, 천재다! 패러다임 쉬프트!" 탄성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는데 그 형제님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을 한 것이었습니다.  

오직 물에 1등으로 들어가야 나을 수 있다는 베데스다의 세계에 예수님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냥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9a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수님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 사람이 곧 나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다리가 죽 펴지고, 몸에 힘이 들어오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능력임이 드러났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그 병자는 즉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 하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빛이 생겼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빛이 있으라" 말하는 것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말하고 나서 벽으로 가서 스위치를 눌러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기록된 형태로든지, 혹은 읽음으로든지, 들음으로든지, 언제나 능력으로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창조하며, 보존하며, 심판하며, 죽이며, 살리며, 회복하며, 새롭게 하며, 헛되이 돌아가는 법이 없이 언제든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신 주님의 말씀은 큰 능력으로 그에게 나타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건강하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은 그가 안식일에 매트리스를 들고 걸어갔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11)하며 예수님께 책임을 돌렸습니다.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지배하는 폐쇄적인 공동체에서 축출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큰 은혜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는 육체의 병은 나았지만 내면적인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남을 원망하고 핑계대는 의존심의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16절과 같이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더욱 박해를 받게 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게 된 이유는 안식일에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내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두려워 대체어로 '아도나이'(주님)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님만의 특수한 관계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요, 둘째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그 주장을 분명히 알았기에 신성모독죄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일하십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창조행위를 다 마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하신 세계를 유지, 보존하시며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일하시되 스스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이시고 행하시는 일을 그대로 행하십니다.


특히 예수님이 하시는 주된 사역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심판을 받아 죽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원하시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심판권, 곧 일부를 살리시고 일부를 심판 받은 상태로 놔두시는 권세를 그 아들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공경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대사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입니다. 예수님 없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 만든 헛된 이론이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길이 전혀 없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저 음악 감상하듯이 가볍게 듣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을 듣고 믿음에 이르게 되는 들음을 말합니다. 곧 말씀을 마음으로 겸손히 영접하는 들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되어 있지 않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말미암습니다.


24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믿는 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는 모두 완료형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믿는 그 순간에 구원과 영생을 확정적으로 얻은 것입니다. 장래에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은 이미 되어진 일을 시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유일한 표준은 유일한 심판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나무 가지를 붙잡았으면 그것만이 살 길인 것을 알고 그것이 가시나무라 하더라도 총력을 다 해 붙듭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믿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엡2:1)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그 때가 이미 왔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영적으로 살아나 거듭납니다. 중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사람을 살게 하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성어거스틴은 자기의 정욕을 이길 수 없어 오랫동안 고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서 13:13-14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말씀을 듣고 죄의 사슬을 끊고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스펄젼은 이사야서 45:22절 “땅 끝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허드슨 테일러는 요한복음 19:30절 “다 이루었다” 말씀으로 중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듣는 자를 거듭나게 하고, 변화되게 하며, 새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저는 대학3학년을 마칠 때까지 예수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군 광야 훈련으로 인도하시고 70년대 말 험악한 군에서 정말 빡센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부대에서 잠시라도 도피하기 위해 주일에는 근처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를 좀 살려주세요~"절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도 들으셨습니다. 어느 날 낮 내무반에서 누워 그 전날 군 교회에서 가져온 잠언서 소책자를 꺼내어 읽었습니다. 첫 페이지의 마지막 구절이 1:7절이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 말씀은 불과 같고 방망이와 같았습니다(렘23:29). 가슴이 뜨거워져서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갔습니다. 맨 땅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땅에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였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저는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군대교회에 더욱 신실하게 나가 말씀을 겸손히 듣고 성경을 열심히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전역 후에 우리 모임에 나와서 영적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모든 중생 운동, 곧 새 생명이 창조되는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지식, 신학적인 논쟁, 과학적인 증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심겨져 믿음을 발생시킵니다. 세상의 교훈이나 사상도 우리의 사고와 가치관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거듭나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고 그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화되어 나가는 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마음으로 잘 듣고자 해야 되겠습니다. 주일 메시지를 겸손한 마음으로 들으면 큰 유익이 됩니다. 소감모임에서 간증과 함께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는 큰 힘이 있습니다. 소감모임에 와서 부랴부랴 소감을 쓰기보다, 미리 쓰고 와서 다른 사람이 발표할 때 배우는 마음으로 잘 듣는 것이 아주 유익합니다. 또한 우리가 목자님을 통해 성경을 배우기도 하지만 평상시에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면 성령께서 직접 깨닫게도 해주십니다. 그러한 깨달음도 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통로는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일으켜주시고 영적 통찰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일꾼으로 만들어주십니다(딤후3:17).


우리가 말씀만이 사람을 구하는 길임을 알고 힘써 배우고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날마다 말씀으로 인하여 생명이 살아나고 우리 모임이 더욱 거룩해지며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영원 전에 아들을 중보자로 세우시고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을 나눠주시는 역사를 시작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인류 역사 최후의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천사장의 호령과 함께 하늘로부터 오십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 신자로 살다 죽었던 자나 불신자로 살다 죽었던 자나 모두,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선한 일, 악한 일은 세상에서의 윤리적, 도덕적 선함과 악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악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자를 믿은 자요 그 믿음으로 행한 자입니다. 반면에 악한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의 본성과 욕심대로 살던 자들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이 봄학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 날마다 생명력이 충만하며 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절대적인 자세로 전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