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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 봄학기 특강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도서 11-12장)2017-03-11 09: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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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봄학기 특강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말씀/ 전도서 11-12장 
요절/ 전도서 12:1a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서는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살았던 솔로몬이 기록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많은 방황을 하였습니다. 긴 방황을 끝내고 노년이 되어 그는 본 전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전도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주는 메시지요, 특히 청년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전도자의 애타는 전도의 메시지를 듣고 삶의 방향을 잡는 귀한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1:1-8절은 모든 인생들에게 주는 전도자의 메시지입니다. 11:1절을 보십시오. 예전에는 떡이 귀했습니다. 떡이 생기면 먹을만큼 먹고 남은 것은 부엌에 넣어두고 곳간에 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떡을 물 위에 던지면 어떻게 됩니까? 물을 먹은 떡은 흐물흐물해져 잠시 후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드넓은 강물 위에 떡 몇 개 던졌다고 해서 물고기들이 배불리 먹는 것도, 혹은 강이 변하여 육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차라리 내 부엌에 넣어두었다가 배고플 때 나 혼자 먹는 것이 나아보입니다. 이와같이 내가 가진 시간, 물질, 능력으로 선을 행하고 남을 섬기는 것은 물 위에 떡 하나 던져넣은 것처럼 별다른 가치나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여러 배로 다시 찾게 됩니다. 우리 학생들이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친구를 위해 기도해주고 후배를 위해 말씀을 준다면 누가 압니까? 그 친구가, 그 후배가 나의 그 잠간의 섬김을 통해 삶이 바뀌고, 인생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 시대를 섬기는 위대한 주님의 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것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풍성하게 베푸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나눠 줄 수 있을 때 나눠주어야 합니다. 뜻하지 않은 재앙이 닥치면 더 이상 나눠주고 싶어도 나눠줄 수 없습니다. 그 때에는 내가 이웃의 구제와 섬김을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곧 땅에 쏟아질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가수 서유석 씨가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이와같이 인생에는 뻔히 알면서도 결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무는 어느날 갑자기 쓰러지면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습니다. 남으로든 북으로든 한 번 쓰러지면 그 자리에 썩어서 흙이 될 때까지 그대로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인생도 한 번 쓰러지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러한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겸허한 자세로 인정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삶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씨뿌리는 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습도와 온도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추수의 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자기가 일하기에 완벽한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다소 열악하더라도, 어떤 때는 도저히 일할 상황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생산적인 일, 창조적인 일, 더 나아가 위대한 일에 도전해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사를 성취해가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룻기 말씀을 통해 그것을 잘 배웠습니다. 룻기의 하나님은 ‘우연히’와 ‘마침’을 통해 룻과 나오미의 삶을 그 뜻대로 인도해가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에 무엇이 잘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이성, 또 어떤 직감은 주셨으나,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능력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정확하게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의 선물이 아닌 큰 혼란과 고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나의 자녀가 몇 년 후에 죽을 것을 안다면 그 자녀를 제 정신으로 키울 수 있을까요? 내가 하는 이 일이 망할 것을 안다면 마음을 다해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를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하였습니다. 눈으로 이 아름다운 빛을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은,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의 필요충분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지금 현재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이 우주 최고의 기적이요, 경이요, 신비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엄한 그랜드캐년 정상에 올라가서 딱지치기하며 딱지를 잃은 것 때문에 분노하고 슬퍼하다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랜드캐년을 내려오는 어린아이와 같이 인생을 살다가 갑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군대 경험을 한 형제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군대에서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된 훈련이나 기합을 받을 때에는 1분이 1시간, 아니 하루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람이 80년을 살아도 늘 기쁘고 행복한 일만 가득했다면 80년이 8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단 30년을 살아도 온갖 삶의 질고와 역경과 고난으로 점철되었다면 30년이 3천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으로 가득한 긴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항상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캄캄한 날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곧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시간과 나의 생애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인생이 긴 것 같아도 하루살이처럼 짧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루살이의 인생은 짧지만 정작 하루살이 본인에게는 그것이 기나긴 한 평생입니다. 새벽 밤하늘에 해가 뜨는 장엄한 모습은 하루살이가 인생에서 단 한 번 경험하는 일입니다. 정오의 따가운 햇살과 늦은 오후의 산들바람, 석양의 저녁노을과 함께 지는 태양 -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살이에게는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합니다. 우리네 인생도 그와 같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합니다. 고난과 역경이 클수록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 고난이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또한 다가올 일은 다 헛되다 하였습니다. 헛되다는 단어는 원문상 ‘안개와 같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안개와 같이 잠시 있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비유하자면 영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내 가방에 넣어둘 수 없습니다. 그저 보면서 경험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감으로 고통하는 것은 무언가를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개와 같은 세상에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영원한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도, 가족도 잠시 그와 함께 머무는 그 순간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지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것을 깨달을 때 삶 앞에서 겸허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욕심, 사람에 대한 기대나 요구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고 그와 함께 하는 순간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늘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11:9-12:8절은 전도자가 청년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9절 말씀은 성경을 읽는 이들의 눈을 의심케 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사람이 자기 마음에 기뻐하는대로, 원하는대로, 눈이 원하는 대로 행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민 15:39) 요한일서 2:16절을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9절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먼저 이는 일종의 반어법으로 이해하는 해석입니다. 마치 고3 수험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고3 시간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지내라. 100%의 자유를 주겠다. 다만 수능 시험의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라.” 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 안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죄를 짓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음껏 즐겁게 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요리사가 정성을 다해 차려놓은 메인 요리와 여러 반찬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것이 지혜입니다. 꼭 요리사가 차려놓은 음식은 버려두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버섯이나 바다의 복어 등을 잡아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찌개로 끓여먹기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 자기에게 해로운 것이요, 어리석은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청년의 때는 모든 것이 불안정합니다. 그러므로 근심과 염려가 많습니다. 또 아직 다듬어지지 못한 죄악된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미래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악을 몸에서 물러가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2:1a절을 보십시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서 저자는 명석하고 열정과 재능이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공부를 많이 하는 것에 참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지혜서, 철학서, 식물학, 동물학, 천체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 결과 이어령 선생, 또 버틀랜드 러셀, 노암 촘스키같은 위대한 지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마음에 근심과 고통이 더 많아졌습니다. 위대한 철학자나 노벨상을 수상한 세계적 문호들이 스트레스성 불면증, 우울증 등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것처럼 그의 마음에 공부할수록 삶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인한 번뇌와 고통이 커졌습니다. 그는 방향을 바꾸어 큰 건축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수십년간에 걸친 대형 건축사업을 통해 멋진 건물을 세웠고 예루살렘의 외관과 지형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그가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켰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건축을 완성하고 나자, 외적인 사업이나 대형 건물이 사람들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성취를 추구하는 삶을 중단하고 감성을 추구하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여인과의 연애를 통해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껴보았습니다. 그러나 감성을 추구하는 삶은 정서적 불안정을 가져왔습니다. 롤러코스터같은 감정의 청룡열차를 타고 나면 그의 영혼은 심한 어지러움증과 구토증세를 느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것도 허무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인생의 시간은 다 지나가고 이제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잡지 못한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내가 무엇을 할 때에 가장 기쁘고 행복할까, 무엇을 해야 내 존재가치가 가장 살 수 있을까를 찾아 방황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비유하자면 어렵게 휴가를 얻은 후, 어디로 갈지 조사만 하다가 휴가기간을 다 허비해버린 회사원과 같았습니다. 또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지 못한 채 무작정 비행기를 하늘로 이륙시킨 조종사와 같았습니다. 문제는 그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를 자기 스스로 찾으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하나 자신이 경험해봄으로 찾으려 했습니다. 그가 간과했던 것은 그러기에 인생의 시간은 너무 짧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청년의 때에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에게 여쭈어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제 그는 인생의 후배들인 젊은 청년들에게 자신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곡한 권면을 합니다.“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그러면 사람이 왜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해야 합니까? 
 
첫째, 청년의 때는 인생의 기초를 놓고 삶의 방향을 잡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배가 출항할 때에 목적지를 분명히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배의 크기를 보고 제주도까지 가기에 적합한지,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까지 갈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태평양을 건널 계획이라면 필요한 모든 연료와 음식, 나침반, 숙련된 1등 항해사와 선장, 선원들, 비상의약품 등을 리시트를 만들어 빈틈없이 꼼꼼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계획과 뜻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성경을 특히 청년의 때에 읽는 가운데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무슨 목표를 향해 인생의 항해를 시작해야 할 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며 그의 영광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존재로 지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사람이 자기자신을 위해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세상적으로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처럼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음이 가까워서야 그것이 잘못 된 삶이요 평생을 헛된 것을 좇아왔다는 사실을 그때 깨닫게 됩니다. 또 많은 청년들이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고 또 내가 사랑하는 이성을 만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젊은 시절 이성의 사랑을 좇다가 사랑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더 심한 목마름이 찾아오는 것을 깨닫고서야 참된 사랑과 경배의 대상을 찾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것들을 다 경험해 보면 인생의 깊이가 깊어지지 않겠는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시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에도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경험하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제목은 수십년 전이 지난 다음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실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는 나무를 심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젊은 날 심어놓은 기도의 나무가 어느 날 거목이 되고 열매를 맺습니다. 젊은 날 마음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노년의 때에 그 열매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젊은 날 헛된 것을 좇아 방황할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둘째, 청년에게는 순수함과 열정이 있습니다. 청년은 세상을 잘 모르고 어리숙하여 사기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고 별을 보는 이상이 있고 불을 뿜고 달리는 기차와 같은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할 때 최우선으로 공략하는 대상이 젊은 청년입니다. 순수한 청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평범한 청년이 위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이순신과 선조에 관한 글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선조는 이순신을 시험하기 위해 큰 공을 세운 그를 상을 주는대신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비밀작전을 수행했다는 구실로 그를 좌천시켰습니다. 말하자면 대령을 대위로 좌천시킨 것입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몸이 좋지 않거나 노부모를 공양해야 한다는 핑계로 사직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좌천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이순신을 보며 선조는 그를 파격적으로 높은 자리에 승진시켰습니다. 또한 그가 자기보다 큰 그릇인 것을 깨닫고 한편으로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비록 성경은 공부하지 않았으나 사람이 어떤 직분을 맡았던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하는 가치의 소중함을 잘 알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라”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이가 든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주면 세상을 모르는 소리라고 일축하며 거부합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갑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훌륭한 청년도 속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평범한 청년을 이순신같은 위대한 영적 장군으로 변화시킵니다.
 
셋째, 청년의 때가 곧 지나갑니다. 청년에게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열정이 있습니다. 밤샘 공부를 하고 시험을 쳐도 다음 날 잠간 눈을 붙이고 나면 피곤이 곧 풀립니다. 무언가 한 가지에 빠지면 몇 날 밤을 새도록 그것에 열중합니다. 뇌도 싱싱하여 한 두 번 집중해서 보면 다 이해가 되고 심지어 외워지기까지 합니다. 청년들은 원래 사람이 다 그런 줄 압니다. 그러나 30대만 되어도 밤을 새는 것이 몸에 큰 부담을 줍니다. 커피를 벌컥벌컥 마셔주지 않으면 정신이 나지 않습니다. 뭔가를 봐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후 40대가 되면 어떤 느낌이냐면 천천히 느긋하게 가던 인생의 차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차창 밖의 풍경이 휙휙 지나가는 느낌입니다. 겨울이다 싶었는데 벌써 봄입니다. 초등학생이던 아이는 훌쩍 커서 벌써 대입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50대, 또 60대가 되면 오래 사용하여 이제 여기저기서 고장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자동차가 된 느낌입니다. 그때그때 수리해서 쓰다가 언젠가는 폐차할 날이 다가옴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들면 성경을 몇 페이지만 읽어도 눈이 시리고 머리가 띵합니다.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으면 무릎이 시리고 목 디스크 증세가 나타나 오래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려 해도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습니다. 휴대폰 메뉴도 복잡해서 귀찮은데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 힘들어 그저 늘 하던대로 반복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청년은 밤새 성경을 읽어도 감동이 있기만 하다면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밤새 기도를 해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만 있다면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깊이 생각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친구들에게 전할 때 사마리아 여인처럼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말씀합니다. 우리 젊은 청년들이 청년의 때에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청년의 때 나를 지으신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 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세우는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4절에서 전도자는 청년의 시절이 곧 지나간 후 어떻게 되는지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보니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먹구름 뒤로 사라져 어두워졌습니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니 집을 통채로 날려버릴 정도의 큰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청년의 때가 지나가면 죽음의 먹구름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집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거대한 먹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집을 지키는 자들이 두려움으로 떨게 됩니다. 힘 있는 자들이 몸을 구부리며 숨습니다. 마당에서 맷돌질하던 자들이 맷돌질을 멈춥니다. 창밖을 내다보는 자들은 안색이 어두워집니다. 저자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집을 우리 몸으로, 집 안에 있는 자들을 몸의 여러 기관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키는 자는 우리 몸을 지키는 손입니다. 노인이 되면 수전증이 찾아와 손이 떨립니다. 힘 있는 척추 혹은 다리가 구부러집니다. 이가 빠져 음식을 힘차게 맷돌질할 수 없습니다. 시력이 약해져 돋보기로 책을 봐야 하고, 컴퓨터 모니터는 조금만 들여다봐도 눈이 시립니다. 
 
4절을 보십시오. 청력도 약해지고 위장 기능도 약해집니다.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고 옆에서 부스럭거리기만 해도 잠을 깹니다. 또 한 번 잠을 깨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새벽부터 집 안을 왔다갔다 합니다. 목소리도 쇠하여져서 찬양을 부를 때 젊은이들보다 한 템포 혹은 두 템포 늦고 고음을 내려면 온 몸의 기운을 목에 집중시켜야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젊은이들은 고층 건물을 좋아합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꼭대기에 있는 펜트하우스에 사는 것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노인들은 땅에 딱 붙어있는 집을 선호합니다. 놀이동산에 가면 젊은이들은 가장 스릴 있는 놀이기구 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노인들은 그런 놀이기구를 보기만 해도 질색을 하고 조용히 다방에 앉아 커피나 마시기 원합니다. 젊은이들은 축구와 야구를 즐깁니다. 그러나 노인들은 축구공이 근처에만 와도 크게 놀랍니다. 머리는 살구나무 꽃처럼 허옇게 됩니다. 가방에 책 한 권만 넣어도 무겁게 느껴져 웬만하면 빈 손으로 다닙니다. 정욕이 그쳐 남성, 또 여성으로서의 기능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이 큽니다. 그 때가 되면 자기의 영원한 집 곧 무덤으로 돌아가게 되고 조문객들이 장례식장에 찾아오게 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은 줄이 풀리면 금 그릇이 깨지듯 영혼과 육체를 묶어두었던 생명줄이 풀리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면 다시 그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듯이 죽음으로 숨이 끊어지면 그 육체는 다시 사용할 수 없고 땅에 묻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그렇게 되기 전에 너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간곡히 권면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전도자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120% 사용하여 전도서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진리의 말씀을 정직하게 그러면서도 문학적인 아름다운 말로 기록하였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지혜자들이 기록한 말씀은 은밀하게 감추어진 문제의 핵심을 지적함으로 찌르는 채찍과 같습니다. 또한 벽에 잘 박힌 못과 같아서 언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지혜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이지만 근본적으로 한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많은 청년들은 모든 것을 다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보기를 원합니다. 정말 연애가 허무한 것인지 연애를 다 해 보고 내 인생의 연애기를 책으로 써서 출판한 다음 판단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청년의 때는 너무 짧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황과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13-14절은 전도서의 결론입니다. 사람의 본분(the duty of all mankind)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을 겸허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의 명령들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지킨다’입니다. 전도자는 일생 진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진리를 스스로 힘으로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알려주신 진리의 말씀과 그 명령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얼마나 진리를 알아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지켰는가를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이웃을 향한 사랑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우리의 손과 발에 이웃을 위한 섬김이 남아있는지, 우리의 통장에 이웃을 위한 사랑의 지출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지를 보실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청년의 때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청년의 때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발견할 때 남은 인생 가운데 놀라운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년의 때에 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