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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요한복음 제7강 '나는 생명의 떡이니' (요한복음 6:1-40)2018-04-29 21: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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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요한복음 7강


나는 생명의 떡이니


말씀 요한복음 6:1-40
요절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자기계시와 선언이 많은 복음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며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우리가 이시간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때는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4). 예수님이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자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표적이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기적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10절을 볼 때 5000명 정도의 큰 무리가 예수님께 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중 빌립을 특별히 지목하시며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6절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빌립의 머리를 빌리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답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단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
 
시험을 치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그 점을 보완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장, 단점을 잘 아셨습니다. 빌립의 장점은 머리가 좋아 계산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단점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200일 품삯이니까 2,000만원입니다. 빌립은 군중 숫자가 5,000명인 것을 금방 파악했고 한 사람에게 4,100원짜리 도시락을 제공할 때 2,000만원도 부족하다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그는 수학경시대회출신처럼 빨리 계산했습니다. 그의 계산은 정확했지만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때 누가 등장하여 무슨 말을 합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는 그렇게 똑똑한 제자는 아니고 여기서도 그저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머리를 굴린 것이 아니라 발을 굴렸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을 먹일 음식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도, 어른 들에게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찾다보니 어느 아이가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외에는 누구에게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그 아이를 설득했습니다. “아이야, 너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리자, 그러면 예수님이 그것을 귀하게 쓰실 거야” 안드레는 어떻게든지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무리를 먹이고자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오병이어를 찾아왔다는 점에서 믿음의 사람입니다. 9b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도 자신이 주님께 드린 것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가를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받으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5000명의 무리를 음식을 받을 대형으로 나눠 앉게 하셨습니다. 잔디밭에 사람들이 50명씩 100명씩 앉았습니다. 무리들이야 멋모르고 앉았겠지만 그들을 앉힌 제자들에게는 믿음의 훈련이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다” 제자들이 순종하여 먹을 대형을 만들자 예수님은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셨다는 것은 감사기도를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멸시치 않으시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를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도없이 계속 오병이어가 나왔습니다. 이렇게해서 예수님은 빌립의 말대로 조금씩 이 아니라 원대로 사람들을 풍성히 먹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도록 하신 이유는 뭘까요? 환경오염을 염려하심입니까? 이는 믿음의 기념물들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공교롭게도 남은 조각은 열두 바구니가 되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한 바구니씩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무엇을 배웠을 까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면 긍정적인 답을 낼 수 있습니다. 요새 우리나라에 문재인 보유국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통령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재인 보유국이 아니라 예수님 보유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진 가정이고 챕터이고 목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한 아이가 가진 오병이어로 오천 명도 먹일 수 있습니다. 나의 오병이어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상황은 어렵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 가진 작은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경제 메시야로 옹립하여 빵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숨으셨습니다.


16-21절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큰 바람과 파도를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 제자들이 바다로 내려가 배를 탔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때는 이미 어두웠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평온하던 갈릴리 바다에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파도가 크게 치면 약 6미터 정도로 높이 친다고 합니다. 사람 키의 3배가 넘는 파도가 일면 어떻게 됩니까? 파도에 의해서 배가 솟구치고 내려앉으면서 사람들은 배 멀미를 하고 침몰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바다에 빠지는 게 제일 무섭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노를 저어 10여리(4km)를 갔습니다. 큰 바람과 파도중에 4km나 전진하는 데 얼마나 힘들고 많은 시간이 걸렸을 까요? 


제자들이 배 멀미를 하고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19b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예수님이 바다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즉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4km를 가는 동안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주위는 깜깜하고 파도는 높고 제자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두 번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신 방법입니다. 즉 바다위로 걸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구해서 배를 타고 오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방법대신에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물위를 걸을 수 없고 물위로 걸어올 수 있는 존재는 유령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내니 두려워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기뻐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바다는 평온해지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예상을 초월하여 일하심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도우실 때 예상치 못하는 방법으로 오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에 큰 바람과 파도를 허용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주님께서 속히 도우시지 않으므로 우리는 믿음의 삶에 대해서 회의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해변에서 물위로 4km나 떨어졌으니 이제 주님은 도우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오사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제한이 없으신 예수님을 믿는 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 절망적인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고도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더 크시고 더 놀라우신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환난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좀 더 크신 주님께 눈뜨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두시거나 절망적인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할 때 신앙적인 회의에 빠지거나 불신의 바다에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크신 주님을 만나는 좋은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2-40절 말씀은 떡을 찾은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찾도록 도우신 내용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해변에 배가 한 척 밖에 없고 그 배를 타고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제자들이 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보니 예수님이 안 계셨습니다. 그건 예수님이 무리들 몰래 밤에 물위로 다른 곳으로 가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마침 디베랴에서 온 배들을 나눠 타고 바다건너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에서 와서 예수님을 만났고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그들은 예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동분서주 하면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표적이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나타냅니다. 표적을 행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 관심 갖고 예수님을 얻도록 함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얻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수단입니다. 우리도 관계에서 내가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만약 친구관계, 부부관계, 모든 관계에서 내가 단지 상대방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할 때 관계에 배신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신앙의 목적이 되는 가, 수단에 불과한 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열렬하고 간절히 주님을 찾습니다. 그것만 보면 신앙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더 많은 물질, 더 좋은 배우자, 더 나은 자녀교육, 자기실현과 성취감, 자기영광 등을 얻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방향을 주십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은 두 가지 양식을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은 썩을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부차적으로 추구되는 것이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목적이고 방향이 되면 그 인생은 참으로 헛되고 무가치한 삶이 됩니다. 썩을 것이란 영원하지 않는 것인데 이런 것만을 추구하고 이런 것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심지어 바다를 건넙니다. 신앙생활도 썩을 것을 위해서 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썩을 놈, 썩을 여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썩지 않을 양식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살 때 우리 안에 영원한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절히 주님께 구하여 많은 떡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떡이 그 영혼을 썩게 하고, 허무와 무의미가운데 무기력하게 살게 하고 있습니다. 그 영혼에 생명력이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떡이 부족한데 그 영혼에 썩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썩을 양식을 구하는 삶은 반드시 한계에 이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 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는 주님의 책망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8절입니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9)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일만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시간을 바쳐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아주 힘든 일임을 실제 삶에서 깊이 절감합니다. 표적이 일어날 때 주님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표적도 없고 절망적일 때 변함없이 주님을 믿는 것은 정말 애써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30-34절은 다시 떡을 요구하는 무리들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 표적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많은 표적 중에서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을 끄집어 냈습니다. 가능하면 떡에 관한 표적을 보여달라는 가이드라인을 은근히 제시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변함없이 떡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참 떡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나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셨지만 ‘썩을 양식’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신앙 안에서도 여전히 썩을 떡만 구하는 그들에게 ‘참 떡’을 소개하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러자 무리들은 항상 그런 떡을 자신들에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34).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방향을 주십니까? 3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오면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떡은 양식의 대명사 입니다. 양식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먹으면 생명이 유지됩니다. 그것을 먹으면 만족과 기쁨이 생깁니다. 그것을 먹으면 에너지가 넘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입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먹으면 어떤 사람도 참 생명이 풍성하여 집니다. 경주 최씨는 사방 100리의 사람들을 풍성히 먹였지만 예수님은 온 세상사람들을 풍성히 먹이기도 남음이 있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는 가가 중요합니다. junk food는 몇 번 먹으면 맛있고 좋습니다. 크게 해악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쌓이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부실한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명력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썩을 것만 추구하고 썩을 것만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께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오는 것은 예수님을 먹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그림의 떡이 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하는데 생명력이 충만합니다. 만족과 기쁨이 넘치며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고 활력과 에너지가 넘칩니다. 그것은 이분이 우리가 보지 않는 가운데 예수님께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잘 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생명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굴에는 기쁨이 없고 힘이 없습니다. 혹은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이분은 실제로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집을 나갈 때는 쌩쌩했는데 들어올 때 보니 떡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이유는 돌아다니면서 하루종일 썩을 것을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문 폴린 선교사님은 생명력과 기쁨과 만족과 에너지의 대명사였습니다. 이분이 계신 곳에는 큰 웃음소리가 있었습니다. 큰 웃음소리가 들리면 이분이 근처에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이분의 영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세계 곳곳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사셨던 이유는 예수님께 나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호랑이와 눈싸움을 할 정도로 스피릿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썩을 것들만 찾으면 눈이 퀭하고 몸과 마음이 떡이 되어 집에 돌아옵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과 기쁨과 에너지를 나눠 주는 활력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예수님은 실망하셨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으신 것은 그가운데도 아버지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36,37)


끝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리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39,40).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이 세상의 썩을 양식들도 주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진정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마지막 날 부활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썩을 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 썩지 않을 것을 추구하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얻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풍성하고 영원한 만족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