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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요한복음 제10강 '실로암 예수님' (요한복음 9:1-41)2018-05-20 16: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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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요한복음 제 10 강

실로암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9:1-41

요절 / 요한복음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장과 9장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세상의 빛 예수님은 8장에서 정욕과 불륜의 어둠속에 살던 한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 9장에서는 운명주의의 어둠속에 살던 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실로암’으로 증거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진정한 베데스다라고 배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실로암’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시간 우리가 ‘실로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때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한푼 주이소, 저는 날 때부터 이 모양으로 태어났심더” 8절을 볼 때 그는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맹인을 장애인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봅니다. 그만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맹인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보다가 어떤 이유로 시력을 잃게 된 맹인이 있고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가 더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정말 깜깜한 흑암중에 태어나서 일생 그런 어둠속에서 살아갑니다.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할까요? 우리가 한 시간만 눈을 감고 살아도 보통 답답하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런 사람을 보고 고뇌하는 철학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고뇌하며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죄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유대인들은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에서 죄를 불행의 원인으로 말씀하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조상이나 부모의 죄나 실수로 자손들이 불행한 인간조건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후손들은 조상을 원망하고 부모 탓을 할 것입니다. 조상탓, 부모 탓이 한국인들의 고질병이었습니다. 조상이나 부모탓이 아닌 경우, 자기 죄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경우, 자기 죄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엄마뱃속에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짓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죄라고 보는 견해는 업보 곧 전생의 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전생의 죄 때문에 불행한 인간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또 성경은 전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인간조건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운명주의입니다. 운명주의는 마음을 어둡게 하고 삶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떤 운명주의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약소국에 태어났다는 것, 이스라엘에서 가장 낙후되고 멸시받는 곳에 태어나 관직에도 등용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방끈도 짧았고 대체적으로 흙수저들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보다는 좀 나았지만 제자들에게도 자신들의 타고난 인간조건에 대한 어두운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사모님들에게 물어보니 몇 분이 여자로 태어난 것으로 어두운 생각이 있었답니다. 특히 딸 많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서 더욱 그러했다고 하셨습니다. 요새는,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어두운 생각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여성에 비해, 군대에도 가야하고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국가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반도국가여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으로부터 끝임없이 침입을 받은 점이 있습니다. 이런 지리적 조건도 운명적인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요새 우리 목자님들에게는 양치기 어려운 시대에 목자생활한다는 어두운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말재주가 없어서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고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타고난 인간조건에 대해서 어두운 생각을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예수님은 그 부모의 죄나 자신의 업보 때문에 그가 그런 인간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이유와 목적으로 그가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셨습니다. 불행한 인간조건을 보는 제자들의 시각은 어둡고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아주 밝고 긍정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일부러 장애를 주셨다고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불행한 인간조건을 보는 관점은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인간조건은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그 인생에 개입하실 여지를 더 많이 제공합니다. 대부분 끝까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조건이 좋아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신뢰하며 사는 이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인간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인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진 셈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우리가 낮에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낮은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있을 때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해가 중천에 떠 있으면 청년이나 장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낮에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밤이 오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목자님과 통화를 해서, 제가 요새 힘겨울 정도로 여러 일을 하고 있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일을 할 수 있을 때 일을 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일하고 싶어도 일할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이 “영감님, 영감님은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노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 우리는 특히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우리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 저 일 하기 포인트없이 일하기 쉽습니다. 세상 일만 하기 쉽습니다. 또는 자기 일만 잘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일이 무엇인가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8장에서는 일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욕때문이었습니다. 정욕에 이끌려 다니느라고 젊음의 에너지를 다 허비해 버려 일하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청년들이 일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두운 생각 때문입니다.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태어나서 안돼, 절대 안돼” 라는 생각이 우리를 주저앉게 만듭니다. “현재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이런 생각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합니다. 우리가 일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것보다 먼저, 내면의 어둠을 밝혀야 합니다. 마음에 주님의 빛이 임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는 태양을 떠올립니다. 태양이 떠도 어둠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빛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면 모든 어둠이 물러갑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회개하게 되고 모든 어둠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어려운 인간조건가운데도 하나님의 일을 시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추진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려운 인간조건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빛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마음에 세상의 빛 예수님을 모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상황과 형편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새 외대가운데 하나님의 일이 힘차게 일어나서 감사합니다. 많은 학생, 청년들이 주일에 소감발표를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최윤혁 목자님의 소감으로 예배가 아주 밝아졌습니다. 한 사람 소연 목자님이 센터에 온 뒤부터 외대가 밝아지고 10:30 예배도 밝아졌습니다. 외대가 하나님의 일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목자님들의 마음에 빛을 주셨습니다. 목자님들에게 세상의 빛 예수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운명주의의 어둠을 이겨내신 외대목자님들을 존경합니다. 저도 최근에 어두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새벽마다 30분 씩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음에 빛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밝은 태양으로 빛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현재 복음역사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앞에는 통일제사장나라의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세계를 섬기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상황을 보면 앞이 어둡습니다. 깜깜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면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심으로 현재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긍정적인 생각으로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런 밝고 긍정적인 말씀들을 하신 다음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왜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까? “네 눈이 뜨여질지어다”라고 하면 간단할 텐데 말입니다. 침과 진흙에 무슨 어떤 의학적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은 어떤 가운데도 믿음으로 일하는 법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침은 누구나에게 있고 진흙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누구나에게 있는 침과 어디에나 있는 진흙은 오병이어처럼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어, 환경이 너무 안좋아서 일 할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일을 아예 시도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깨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기도의 침과 말씀의 진흙을 이겨 양들의 눈에 바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양들이 여름수양회에서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믿음과 순종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맹인이 육적인 눈을 뜨지 않고 믿음과 순종의 비밀을 알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도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칠 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방향을 줌으로서 그에게 믿음과 순종을 가르치셨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을 찾아갑니다. 맹인은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거부감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더러운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붙이고 실로암을 찾아가는 것은 자존심도 상하고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어디서 예수님을 만났는지 모르지만 실로암을 찾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실로암으로 내려가는 계단만 34계단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순종의 길을 갔고 드디어 실로암 못에 내려가 눈을 씻었습니다. 이 때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의 깜깜하던 눈이 밝아졌습니다. “와, 보인다 보여, 내 눈이 보인다”그는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맹인에게 왜 하필이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맹인에게가까운 근처 아무 집에 들어가서 장독대 물통에서 씻으라고 할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실로암 못으로 보내셨습니다. 실로암은 어떤 연못입니까? 성밖 기혼 샘에서 수로를 통해서 물을 받아 저장하는 연못입니다. 성밖에는 예루살렘의 식수원인 기혼 샘이 있습니다. 기혼 샘은 ‘솟아나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 샘인데 풍부하게 물이 솟아났습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왔을 때 유다 왕 히스기야는 기혼 샘에서 성안으로 물을 끌어 들이는 지하수로를 팠습니다. 이것을 히스기야의 터널이라고 부릅니다. 이 터널을 통해 기혼 샘에서 물이 533미터 떨어진 성안의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졌습니다. 이 지하수로를 만드는 데 얼마나 석공들이 고생을 했겠습니까? 이 수로는 양쪽에서 파와서 어느 지점에서 만났는데 서로가 만나게 될 때 기쁨을 기록한 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수로를 흘러 실로암으로 오는 물은 차가울 정도로 시원하고 맑은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이 실로암이란 연못의 이름에 주목했습니다. 이 연못의 이름,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보냄을 받았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 데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로서 약 25번 나옵니다. 그러니 사도요한은 실로암 연못과 예수님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베데스다로 오신 것처럼 예수님은 진정한 실로암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곧 진정한 ‘실로암’이십니다.


실로암이신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맹인이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맹인이 눈을 뜨는 표적이 없습니다. 이 표적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일어나는 표적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사 35:5). 그래서 실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많은 맹인들이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보면 주님의 관심은 우리가 육신의 눈을 뜨는 것이 아닙니다. 39-41절을 보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인가’ 하는 질문에 그들에게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이 육신의 눈보다 영적인 눈을 뜨는 것에 있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눈을 뜬다는 것은 사람이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사물의 원리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을 보고 그 세상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더듬어 삽니다.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상태에서 가장 불행한 삶은 무작정 무엇인가를 향해서 열심히 달려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매우 위험하고 막연한 삶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하든지 분명한 확신가운데 바르고 정확한 길을 걷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눈은 도대체 어떻게 뜰 수 있다고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실로암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님없이는 절대 우리는 영적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참 실로암 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영적인 눈을 뜬 날이 우리 삶에서 가장 감격스런 날입니다. 저는 1986년 천마산 여름수양회에서 요한복음 21:15절 말씀을 듣고 개울가에서 눈을 씻었는 데 그 후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저는 시력이 2.0인데 꽤 멀리있는 것까지 잘 봅니다. 몽골사람들은 눈이 3.0-4.0이라고 합니다. 독수리나 매는 그 눈이 8.0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눈이 밝으면 멀리보고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참 실로암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이미 영적인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시 세상을 사랑하여 시력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영적 맹인이 되어 하루하루를 더듬어 살고 있지 않으십니까?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사도바울은 영적인 눈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도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는 자신이 달려갈 길이 항상 분명했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우리가 말씀공부를 진지하게 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다시 분명히 보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나의 달려갈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의 열정과 시간을 바쳐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보아야 할 게 많습니다. 우리가 시력이 2.0 정도 밖에 안됩니다. 8.0, 10.0 더 멀리, 더 넓게, 더 깊이 보아야 합니다. 눈이 더 밝아지는 사람의 특징은 신앙생활에 기쁨과 감격이 있다는 것이니다. 우리가 눈 떴다고 자족하지 않고 날마다 실로암못에서 눈을 씻어 영적 세계를 더 잘 보는 기쁨과 감격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맹인이 눈뜨는 것은 믿기 어려운 표적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눈뜬 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다”, “아니다. 장동건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당사자가 자신이 그 사람이 맞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눈이 어떻게 뜨여졌느냐는 질문에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사람들은 맹인이 눈뜬 표적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확인하고자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로 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에게 예수라는 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또 부모들을 참고인들로 불러 물었습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들이 과거에 맹인이었던 것을 인정하였지만 출교를 두려워하여 그 이상은 대답을 회피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당사자를 불러 그가 눈을 뜬 것은 예수님과 무관하고 하나님의 일방적 역사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며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눈뜬 맹인은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 그는 받은 은혜를 지키기위해 출교를 각오하고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받은 은혜를 어찌하든지 지키고자한 그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찾아오시고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주시고 그의 그리스도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영적인 맹인으로 보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깜깜한 흑암가운데 사는 영적 맹인들을 위해서 오신 진정한 실로암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통해서 눈을 씻고 더 밝히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공부하는 분들이 이번 여름수양회에서 영적인 눈을 뜨는 감격을 맛보도록, 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로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