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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요한복음 제13강 '한 알의 밀 예수님' (요한복음 12:1-36)2018-06-10 2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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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요한복음 13강


한 알의 밀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12:1-36
요절 /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인류를 위한 죽음을 앞두고 계십니다.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은 번민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죽음을 결단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무수한 열매를 맺게 한 밀알의 진리와 그 진리대로 죽으신 예수님을 이시간 잘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2-3km 정도 떨어진 마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가난한 이들의 집입니다. 현재는 1000명의 주민이 사는 데 아랍어로 엘 아자리예 곧 ‘나사로의 마을’로 불리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곳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6:6-8절을 보면 문둥이였다가 나음 받은 시몬이 자신의 집에서 주최한 것이었습니다. 시몬이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았다면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벌일 만 합니다. 그러나 사실 마르다와 마리아 입장에서는 오빠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그보다 더 은혜를 입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어야 하는데, 아마도 가난하여 집이 협소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마르다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일을 하며 잔치를 거들었습니다. 부활한 나사로는 예수님 옆에 앉아있었고 사람들은 부활한 나사로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맞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예수님 앞에서 말씀듣기를 좋아하는 마리아가 안 보입니다. 그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3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그 가격은 가룟유다가 평가한 데로 현 시가로 3000 만 원 정도에 해당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순전한 나드 600g 이었습니다. 나드는 향기로운 동인도산 식물로 날카로운 모양의 잎과 붉고 탐스러운 꽃이 곧은 줄기에 달려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매우 값진 향유를 준비할 때 이 즙을 사용했습니다. 마리아가 형편이 좋지 못한 소년가장의 집에서 자랐기에 이 향유를 구입하는 데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모은 물질을 다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이 향유를 어떻게 주님께 드렸습니까? 그녀는 이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선물형식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것을 필요할 때 물질로 바꾸어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마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그 비싼 향유를 그냥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당시 귀한 손님이 올 때 하인들이 그 손님의 발에 물을 붓고 발을 씻어드렸는데 먼지를 씻어내고 피곤을 풀고 마음껏 잔치를 즐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귀한 손님에게는 발을 닦은 후에 향유를 한 두 방을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3000만원 상당의 향유를 다 붓고 수건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귀한 머리털로 발을 닦아 드린 것입니다. 향유를 한 두 방울 떨어뜨리면 그 사람만 냄새를 맡을 정도인데 한 병을 다 부으니 향유냄새가 강렬하게 온 집안에 퍼졌습니다.

왜 마리아가 이런 행동을 하였을 까요? 이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 곧 VVIP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가장 귀한 분, 가장 귀한 손님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단지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의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고 비난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제자중 하나로 곧 예수님을 잡아 줄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 그의 말은 어떤 면에서 타당성이 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가난한 학생 10명에게 300만원씩 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제자공동체의 돈궤를 맡아서 거기에서 자신이 필요할 때마다 공금을 훔쳐간 자로서 물질욕심 때문에 마리아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물질은 귀하게 여겼지만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룟 유다에 대해서 마리아를 변호해 주셨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7절 말씀은 KJV 한글번역본에 보면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 나를 장사지낼 날을 대비하여 그녀가 이것을 간직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묻히실 날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6일이 지나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양 손과 발이 못 박히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가운데 예수님이 세상에 왜 오셨고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지를 알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발을 보았을 때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실 그분의 발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어떤 손해의식과 자의식도 없이 이 예수님의 발에 가장 값비싼 향유를 부으면서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구제를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지기 엿새 전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자신의 죽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그 죽음에 걸맞은 감사와 경배의 헌신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 경배와 헌신으로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을 보러 베다니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뿐 아니라 죽은 자가운데서 부활한 나사로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인기절정이었고 그리스도로 확실하게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은 나사로를 죽이고자 모의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다음 날이었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종려나무는 승리와 번영을 상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해 주십시오” 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의 왕으로 믿고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것을 타셨습니다. 보통 왕들은 성으로 입성할 때 가장 크고 화려한 백마를 탑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신을 한껏 높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백마보다는 높이가 낮은 노새를 탔습니다.(왕상 1:33)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말씀은 스가랴서 9: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이유는 자신이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는 나귀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까? 이는 예수님이 평화의 왕, 겸손의 왕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나귀는 평화 시에 사용되는 이동수단입니다. 예수님은 그 백성에게 공포와 위협이 아닌 평화를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나귀새끼를 탄 모습은 평화스럽지만 초라해 보이고 안스러워보이기까지 합니다. 나귀새끼를 타면 발이 땅에 끌리는 정도입니다. 주위 사람들보다 눈높이가 낮아집니다. 예수님은 범접할 수 없이 우러러 보이는 왕, 우리와 동떨어져 우리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백성들 가까이에 계시며 그들보다 더 낮아져 그들을 섬기시는 겸손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자신을 실제보다 더 포장하여 높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지만 자신을 낮추고 낮추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서 인생들을 섬기시는 겸손의 왕이십니다. 한국 UBF 대표이신 이 모세 목자님은 겸손의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지난 모임에서 자신이 아들을 잃는 등 많은 시련을 겪고도 아직도 교만한 죄인임을 회개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겸손한 회개 앞에서 얼마나 철없이 교만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부끄러웠습니다. 목자님은 겸손의 왕 예수님을 배워 겸손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감동을 주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겸손한 분들의 모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겸손할 때 관계에 평화가 옵니다. 교만한 사람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의 왕 예수님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신 사건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다가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16).

당시 예루살렘에는 270만 정도가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특별히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 그리스도로 증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말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예수님은 명실상부한 대세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문 대통령의 70% 지지도를 훨씬 뛰어넘어 종교지도자들을 빼면 거의 98%의 거의 모든 백성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20,21절을 보면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입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맞다고 생각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통인 빌립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 좀 뵙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빌립은 난생 처음 “선생님”으로 불리자 우쭐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보다 인정을 받고 있던 안드레에 부탁하여 이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까지 인정을 받는 만민의 구주가 될 비전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인기절정의 때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한 알의 밀알의 죽음과 그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역사 이래 농사가 시작된 후부터 매 계절마다 입증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한 알의 밀알은 작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한 알의 밀알에서 한 철에 120개의 열매가 맺힙니다. 다음 해가 되면 120개의 밀알은 14,400개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가 되면 1,728,000 개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리고 다음 해가 되면 207,360,000개가 맺히게 됩니다. 그 다음 해가 되면 24,883,200,000 개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한 알의 밀알은 이렇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한 알 그대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피라미드에서 3000년이 된 한 알의 밀알이 발견되었는데 정말 한 알 그대로 였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차이는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땅에 떨어지는 것은 사람에게는 겸손을 의미하고 죽는 것은 최고의 희생을 뜻합니다. 밀알이야 땅에 떨어지고 죽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합니다.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겸손과 희생이 마음의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갈등과 번민을 가져옵니다. 사람이 낮아지고 희생하기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겸손과 희생이 단지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의 결과가 역설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역설적인 선택의 결과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우리는 본문에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번민을 읽습니다. 예수님도 낮아짐과 죽음의 길이 쉽지 않으셨습니다. 누구에게든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수님이 성육신과 죽음의 길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밀알의 진리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아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결과를 바라보셨습니다. 이 밀알의 진리는 단순히 자연속의 진리가 아니라 이사야 53:10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라”에 기초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밀알의 진리를 인생요절로 붙드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랬을 때 자신이 붙드신 그 진리대로 예수님은 무수한 열매를 맺으셨고 존귀와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사야 53:11절처럼 자기 영혼이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한 알 그대로 살다 죽을 것인가,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 것인가?” 입니다.


우리는 장수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래 오래 자신의 삶을 누리면서 가늘더라도 길게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는 낮아지고 희생하는 것에 대해서 손해의식을 갖습니다. 희생하더라도 적당히 하고자 합니다. 희생할수록 자신만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전폭적으로 낮아지고 죽는 삶은 어리석은 삶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죽기보다는 최대한 즐기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이런 삶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예수님을 배우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신을 섬기려면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이는 진정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실제적으로 주님의 삶을 뒤따르라는 명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지만 실제적인 삶은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실제로 뒤따른 사람들만이 주님이 계신 곳에서 영광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양 다니엘 선교사님 부부는 은행에서 고위직에 근무하셨던 분으로서 얼마든지 편하게 노후를 사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땅에 나아가 생명구원역사를 위해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분들의 성육신의 정신과 희생정신을 받으시고 르완다 의대가운데 많은 생명의 열매들을 맺게 하고 계십니다. 의대 양들이 일주일 동안 바이블아카데미를 하고 소감을 쓰고 발표했다고 들었습니다. 


성동센터의 손성필 목자님은 어렵사리 삼성 SDI에 취업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과장에 진급했습니다. 그는 대기업의 명찰을 목에 걸고 다닐 때 자부심이 느껴지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야근이 잦고 캠퍼스 목자로서 양들을 섬길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는 캠퍼스 목자로서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 삼성과장의 직을 내려놓고 캠퍼스 근처에서 불안정한 창업을 시작했습니다. 선배 상사들은 회사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봉급을 올려 줄 테니 좀 더 남아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이 말에 흔들렸습니다. 또 특별히 식당 밥이 맛있기로 소문난 삼성 SDI를 떠나고자 할 때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캠퍼스 영혼들을 위해 한 알의 죽는 밀알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결단을 축복하시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창업에 성공하게 하시고 김준환 형제님을 비롯하여 여러 형제들이 수양회에 참석하고 제자후보로 자라게 하셔 목자들의 기쁨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국교회에 무수한 영적 열매가 맺힌 비결이 뭘까요? 이것은 한국이란 미지의 땅, 가난하고 불편하고 위험한 땅에 와서 자신들의 삶을 바쳤던 선교사들의 희생과 죽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의 묘역 양화진에는 145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 총 417명이 묻혀 있습니다. 이들은 15개국에서 온 한 알의 밀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배우고자 당시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이 안락하고 편안한 선진국들을 버리고 대한민국 땅에 왔습니다. 그중에 헐버트 박사의 묘비에 쓰인 그의 말은 늘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한다” 그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영광과 존귀를 선택한 분들이요 자기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존한 분들입니다.


우리 중에는 여지껏 낮아지고 죽는 삶을 살았는데 별로 열매가 없었으니 이제는 새로운 방식의 살을 살아야 하는 가 고민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자님이 많은 열매를 맺고자 요회 이름을 ‘밀알’이라고 짓고 나름대로 썩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정말 자신과 요회가 썩어서 없어져 버리나 걱정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소망’ 요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서 얼마 후에 생명의 열매들이 맺혔습니다. 이름을 바꾸어서 일까요? 열매맺을 시기가 도래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매는 때가 있습니다. 열매는 내 다음 대에 맺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노력에 비해서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는 여기에 대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기도하다가 죽으셨는데 열매를 못맺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죽는 삶은 예수님을 배우는 것 자체에 감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불신과 회의가운데 빠지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의 겸손과 죽음의 삶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은밀하게 썩지 못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찍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밴드에 올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주도하길 좋아했으나 다른 이들을 build up 하지 못했습니다.  듣기보다 가르치기를 좋아했습니다. 본을 보인다는 명목에서 앞장 서서 1:1 역사를 섬기고자 했으나 목자들을 잘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는 거칠어서 종종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제가 언제가 들은 안요셉 선교사님의 “썩는 거름이 되겠습니다” 라는 소감이 기억이 납니다. 제가 표면을 굴러다니는 밀알이 아니라 은밀한데서 썩는 거름같은 존재가 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한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열매들입니다. 밀알의 진리를 가르치기만 하지 않으시고 그 진리대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진정한 한 알의 밀알 예수님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을 잘 배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