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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4 강/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누가복음 3:1-22)2017-03-11 1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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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4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말씀/ 누가복음 3:1-22

요절/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희망차고 밝은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데 오늘 메시지는 회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것도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과연 회개의 메시지는 어둡고 부담스럽기만한 메시지일까요?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고 진정으로 삶을 희망차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시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메시지를 기쁨으로 잘 경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디베료 황제가 로마의 황제로 재위한지 15년 째였습니다. 그 때 유대는 헤롯 아켈라오를 이어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헤롯 안디바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은 헤롯 빌립이, 갈릴리 북쪽 아빌레네 왕국은 루사니아 라는 사람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는 대제사장이 최고 지도자인데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였습니다. 원래 제사장은 종신직입니다. 그런데 로마황제가 임의대로 임명하고 폐하였습니다. 이로인해서 1년도 못하고 잘리는 이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런데 안나스와 가야바는 비교적 오랜 기간 대제사장의 자리를 유지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보다도 로마황제에게 잘 보이며 불의를 행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하나님의 말씀이 명목상의 종교지도자인 안나스나 가야바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제사장 관저가 아닌 빈 들에 있던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평제사장인 사가랴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타이틀도 지위도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그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은 비결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가 빈들에 있었다는 것 입니다. 빈들은 어떤 곳입니까?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아무 볼만한 것도 없습니다. 컴퓨터도 없고, 스마트폰도, DMB도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소리가 차단된 곳입니다. 대신에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소리나 재미보다 하나님께만 집중했던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자신만의 빈들에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십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받은 요한은 일어나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이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 처에 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요한은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요한의 일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회개 인증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 사함을 받게 하려고입니다. 죄 사함이란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살아온 모든 불신의 죄와 기타 도덕적인 죄들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생들의 행복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과 관계가 파괴된 가운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죄 사함이 우리 인간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최대의 관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병 고침을 목적으로 나온 중풍병자에게 병 고침보다 죄 사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말라기 이후 400년동안 하나님 말씀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많은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죄는 알게 모르게 사람의 마음에 독처럼 고통과 어둠을 주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떤 분은 죄짐의 무게가 지구보다 더 무거웠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죄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죄 사함입니다. 이 죄 사함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죄 사함을 받기위해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요한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요한의 사역은 성경 이사야서의 성취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선지자 이사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원래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귀환하는 것을 예언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때뿐 아니라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내다보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각 사람의 심령에 오실려면 우리 측면에서도 마음의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골짜기 같은 마음에 주님이 오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다가 푹 꺼져버릴 것입니다. 산과 같은 마음은 인생에서 승승장구하여 주님이 필요함을 도무지 느끼지 못하는 교만과 자기 의가 충만한 마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맨날 패배만 하는 삶을 살면서도 절대로 주님앞에 마음을 낮추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여간 이런 분들도 주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굽은 길은 죄의 길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거친 길은 감정과 혈기에 기초한 내면입니다. 우리가 이상과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평탄하게 하여 오시는 주님을 만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6).

 

우리 목자의 역할이 바로 세례요한의 역할입니다. 인본주의 교육과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강에 돌던지듯 꺼진 내면을 평탄케 하는 작업을 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죄의 길에 헤메는 사람들에게는 죄의 독소에 대해서 알려주어 죄를 피하게 돕습니다. 감정과 혈기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무던히 참으면서 섬깁니다. 이런 일은 참으로 힘들고 수고스럽습니다. 이 일이 가장 힘든 이유는 언제 평탄작업이 끝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작업을 통해 한 사람이나 몇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한 사람의 내면을 섬기고 그 작업을 하는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은 우주를 얻는 것보다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이런 작업이 된 사람의 심령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세례요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17학번 새내기들 내면에 세례요한이 했던 그 내면작업을 다시 사명감을 가지고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온 무리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례받으러 나오시다니 감사드립니다. 훌륭하십니다.” 라고 말하였나요? 7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말은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같은데 왜 나온 사람들에게 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세례를 받음으로 다가올 진노만 피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중심에서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를 품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들은 독을 품고 있는 독사들과 같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형식적인 회개에 절대 속지 않으시며 형식적인 회개로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또한 우리는 죄가 독과 같다는 것도 배웁니다. 죄는 달콤해 보이지만 독입니다. 결국 남도 죽이고 자신도 죽입니다. 우리의 삶이 살아나려면 깊은 곳에 있는 죄의 독을 토해내어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토해내는 것이 좋습니다.

 

세례요한은 진정으로 회개치 않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촉구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근본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열매는 뿌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즉 회개할 때 뿌리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뿌리채 뽑아내고자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죄를 뿌리 뽑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만 회개했습니다. 어떤 분은 항상 회개합니다. 그러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뿌리뽑으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뿌리뽑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분명하게 부정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죄가 달콤하지만 독이며 죄가 사기꾼처럼 나를 속이는 것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죄를 근본적으로 미워하고 뿌리뽑고자 합니다. 둘째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열매는 가지가 나무에 지속적으로 붙어 끊임없이 양분과 수분을 공급받을 때 맺습니다. 회개의 결단을 했다고 금방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끝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날마다 죽고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씨름을 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씨름과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무엇보다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의 양분을 빨아드리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때 마음에 거룩한 소원이 생기고 내면의 힘이 생기는 것을 체험합니다. 셋째로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결단하고 지속적으로 죄와 싸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약중독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깊이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연약하여 넘어질 지라도 점점 변화되게 하십니다. 마침내 중심이 변화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아름답고 거룩한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을 힘입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위의 내용중에서 무리들이 철저히 회개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조상이라는 헛된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구원은 받겠지, 설마 우리가 심판을 받겠어?”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헛된 자부심에 기대어 철저한 회개를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태크리스천이야, 세례도 받았어”, “나는 UBF에 나오고 있어” “나는 2세야”, “크리스천 네임을 가지고 있어” “나는 시니어 목자야, 스탭 목자야라는 생각으로 회개를 철저히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헛된 자부심 버리라 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 듯, 요단강가에 구르는 수많은 돌로 당장 무수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들어 내실 수 있으십니다. 당장에 시니어 혹은 스탭 목자도 한 트럭 만들어 내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이외에 어떤 타이틀도 기댈 수 없습니다. 오직 진실한 회개외에 우리를 하나님앞에 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타이틀을 내려놓고 회개한 분이 바로 한국초대교회의 길선주 장로였습니다. 그는 장로였지만 성도들앞에서 공개적으로 회개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존경했던 옥한흠목사님도 이 놈이 죄인입니다.”라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셨습니다. 다윗은 심지어 왕이었지만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무릎을 꿇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a)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지푸라기만도 못한 헛된 자부심에 잡혀있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철저히 회개하는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회개치 않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심판의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심판의 긴박성과 회개의 절박성을 보여줍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의 유명한 설교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귀 안에 있는 인생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임의대로 손을 놓는 것을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손을 놓는 그 순간, 죄인들은 영원한 지옥불로 떨어집니다. 아무도 지옥 불에 떨어지는 죄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옥불로 떨어지는 죄인을 막는 것은 무거운 바윗돌을 거미줄로 막으려는 것과 같이 헛될 뿐입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무릎을 꿇거나 꼬꾸라져 죄를 토해내며 회개했습니다. 언제든지 찍혀 영원한 심판에 던져질 수 있는 실존 앞에서 믿을 것은 철저한 회개밖에 없습니다. 어떤 타이틀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은 철저한 회개뿐입니다. 우리가 거미줄 같은 헛된 타이틀과 신분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요한의 무서운 책망과 도전에 무리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그들은 베드로의 회개촉구에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했던 무리들과 같이 반응했습니다.(2:37) 이런 그들에게 세례요한은 무엇이라 답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옷 두벌 있는 자나 먹을 것이 있는 자는 중산층이나 보통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입니다. 엄청난 부자는 아닙니다. 옷 한 벌도 없는 자, 먹을 것도 없는 자는 최대빈민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좀 더 큰 부자가 되고난 후에 누굴 돕더라도 돕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조금 여유있을 때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실천 시간은 지금입니다. 현대인들은 여유있는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물질을 좀 더 여유있게 쓰는 것이 여유있는 삶이 아니라 남을 돕고 있는 것이 진짜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조금이라도 여유있게 살면서 남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회개해야 할 죄로 보십니다. 야고보서 5:1-5절을 보면 사용하지 않는 재물이 있는 것이 심판의 증거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항상 통장을 제로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사십니다. 아름다운 빈손이 되고자 합니다. 콩 한 조각이 있어도 나누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데 내가 여유 있게 사는 것이 죄임을 깨닫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웃과 형제들을 돕는 일을 힘써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12-14절은 세리와 군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세리들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하였고 군인들에게는 폭력을 써서 백성들의 것을 빼앗거나 무고죄를 짓지 말며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문제는 모두 물질문제와 연루되어 있습니다. 물질이 범죄의 온상이기도하고 진정한 회개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은 지갑이 회개하여야 진정한 회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은 우리 삶의 생존의 수단이기에 절실합니다. 이런 물질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분명한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요한이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할 때 사람들은 반발하며 요한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구체적인 회개를 위해 질문했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는 언뜻 사람을 무안하게 하고 힘드게 하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회개하고 말지 남보고 회개하라고 말하기는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회개촉구 메시지는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할 뿐아니라 세례요한처럼 다른 사람을 회개시키는 일도 사명감 가지고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강력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 특별히 잔인하고 강포한 세리와 군인들까지 순한 양처럼 되어 회개했습니다. 이런 세례요한을 보고 사람들은 이 분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고 우러러 볼 때 세례요한이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요한은 사람들이 미천한 자신보다 자신뒤에 오시는 크신 주님을 바라보도록 도왔습니다. 자신은 회개시키는 물세례밖에 줄 수 없지만 자신 뒤에 오시는 분은 죄를 사하고 소멸시키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위대한 인간정도가 아니라 심판의 기준이요 심판장으로 인생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분이십니다. 이런 주님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할 수 없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주님을 잘 알았기에 인기에 부하뇌동하지 않고 겸손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명에 충실했습니다.(18)

 

19,20절을 보십시오.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요한은 사람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절대권력자 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윗 왕을 책망했던 나단 선지자와 같이 했습니다. 하지만 헤롯 안디바는 다윗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겸손히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지 않고 사람의 말로 여겼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백성들 중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데 왜 받으신 것입니까? 첫째로 요한으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죄인의 자리에 서셨음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공생애 첫 출발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막힌 인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렸습니다. 성령이 주님을 돕기위해 강림하셨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겸손과 순종의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인정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철저한 회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삶을 회복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회개시키는 일을 사명감가지고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할 때는 형식적으로 하지 않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