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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로마서 제1강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로마서 1:1-32)2018-08-05 23: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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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로마서 1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 / 로마서 1:1-32

요절 /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AD 58년경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는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그의 삶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7절은 편지의 서문으로, 바울이 로마 성도들을 문안하는 내용입니다. 8-15절에서 그는 로마 성도들을 방문하기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16,17절은 그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18-32절은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에 대한 확신과 삶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은 자’.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종. 여기서 은 원어로 '둘로스'인데 노예를 의미합니다. 로마시대 당시 주인에게는 세 종류의 물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말 못하는 물건으로 농기구 같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반쯤 말하는 것으로 가축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말하는 물건으로 노예를 의미했습니다. 노예는 인권도 없고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하는 존재였습니다. 그와 같이 바울은 자신의 신분이 오직 예수님께 절대 복종하는 종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도.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전권대사를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종이라는 신분의식으로 겸손하였지만, 또한 자신이 세상에 보내진 예수님의 대리자라는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 여기서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은 'set apart'로 특별한 일에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15절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겸손했고, 오직 자기를 보내신 분의 뜻을 섬기고자 애썼습니다. 또한 보내신 분이 이루실 것을 믿고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면 그는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운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이는 그의 정체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분명한 정체성이 필요함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이 땅에 보내진 것입니까? 미세 먼지의 움직임 하나까지도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벗어남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의 생애를 인도하시고 오늘에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대 한국과 세계캠퍼스의 제자양성을 위해 택정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을 굳게 하며 흔들림 없이 이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1절에서 말하는 복음은 무엇에 관한 내용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로마시대에 복음(‘유앙겔리온’)은 황제의 즉위나 전쟁에서의 승리 등의 좋은 소식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내용 중에서도 구체적인 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는 구약성경에 이미 여러 번 예언된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 온 우주를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으실 수 있는 광대한 분이 여자의 몸에 잉태되어 나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말구유에 누이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예수님은 바벨론 포로 이후 대가 끊어져 마른 그루터기같이 되어 버린 이새의 줄기에서( 11:1) 나셔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 우주의 막강한 권세인 죽음을 꺾는 능력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이십니다. 믿는 자로 하여금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면 바울의 구체적인 사명이 무엇입니까? 5,6절을 보십시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바울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예수 믿는 자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당장 처단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를 오래 참으시고 사랑으로 섬겨주셨습니다. 그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마치 원수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물을 주는 것보다 더한 사랑이었습니다. 서구 기독교 역사를 보면 윌리암슨이라는 경건한 신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박해자들을 피해 도망 중에 있었습니다. 한 추격자가 얼음이 깨져서 강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윌리암슨은 수풀 속에 숨어 있었는데, 얼른 뛰어 나와 그 핍박자를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추격자들에 의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바울을 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 심령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2:15). 그는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of who I am the worst). 그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할 때 마다 끊임없이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감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대속의 은혜만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함께 받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만 받고 끝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를 받고, 그것이 큰 은혜인 것을 알면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 곧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함께 주십니다. 이것이 또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때 주님의 은혜가 더욱 깊어지고,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는 특권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어떤 자세로 감당했습니까? 5b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과거에 바울은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머리로만 이해하도록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믿고 순종하도록 도왔습니다. 순종함으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복음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바울은 이를 위한 모든 수고를 감당하였습니다. 6,7절에서 바울은 이방인 중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8-15절에서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방문하고 싶은 소망을 피력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당시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습니다. 로마는 제국의 중심지요 온 세상의 수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로마에 가고자 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사업에 성공하고, 정치에 뛰어들어 자기 이름을 내고자 했습니다. 최신 문화와 유행을 누리기 위해 로마로 몰려들었습니다. 로마는 오늘날 뉴욕이나 런던 같은 세속주의의 멜팅 포트였습니다. 로마 성도들이 그런 곳에서 살면서 믿음을 지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황제보다 예수님을 주로 모시며,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섬긴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졌습니다. 바울이 볼 때 이런 그들이 너무나 귀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9). 그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했습니다(10).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길 원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견고히 세우기 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에게는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빚진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빚을 지면 늘 마음에 부담을 느낍니다. 잠이 잘 안 옵니다. 빨리 갚아버리고 자유함을 누리고 싶습니다. 로마시대 당시 빚을 지는 것은 단지 심적인 부담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개인파산제도가 없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자기 몸을 팔아 노예가 되었습니다. 빚을 갚을 때까지 종으로서 일을 해야 되었습니다. 영국에는 100여 년 전까지도 채무자 감옥’(debtors’ prison)이 있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고대 세계에 빚을 진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런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 대해 이러한 빚진 자의 심정이 충만하였습니다. 바울은 스승 가말리엘이나, 아나니아 목자, 또는 바나바에게 사랑의 빚을 진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성도들을 본 적도 없고 그들로부터 무엇을 받은 것도 없습니다. 그가 로마 성도들에게 도대체 무슨 빚을 진 것일까요? 이는 바울이 예수님께 진 사랑의 빚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원수된 자기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너무나 큰 빚을 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천 번을 드려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주님께 "주여,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죽어가는 영혼들이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의 예수님께 대한 빚진 자의 심정은 예수님이 구원하기 원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내고자 로마에 가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큰 선교역사를 이루고 로마 중심부에 대형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야심이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께 조금이라고 빚을 갚고자 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나아가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그가 이렇게 어찌하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나미스’(dunamis)인데 영어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어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강력한 힘이라고 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 내가 구원받았다!"라는 말은 어떤 때 쓰는 말인가요? 이는 내가 큰 재앙에 빠졌는데 갑자기 누가 나타나 건져줄 때 쓰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언덕길에서 브레이크가 파열된 트럭이 달려 내려옵니다. 그 앞에 어린아이 하나가 놀고 있습니다. 누가 쏜살 같이 달려들어 그 아이를 건져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또는 소방대원이 불타는 집에 뛰어 들어가 어린아이를 안고 나옵니다. 사냥꾼의 덫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는 사슴을 누가 가서 덫을 열고 풀어줍니다. 이런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해 주던 안 해주던 별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냥 두면 파멸하는데 그 파멸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질병이나 가난, 세상에서의 억압이나 폭력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육신의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로부터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영혼의 구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무신론자들은 기독교가 괜히 있지도 않는 죄와 심판을 말하여 죄의식과 두려움을 심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것이요 객관적인 진실입니다. 인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준엄한 심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명에 제사 제도가 있어왔습니다. 인류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며 죄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여러 종교와 철학, 도덕과 윤리를 통한 자기 향상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수준에 이르고자 애를 써왔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실패하였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 자체가 타락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율법과 도덕의 기준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사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도록 하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여 그를 의롭다 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16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누구든지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 복음의 능력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믿는 자들은 영혼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경험합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자에게 그 무서운 형벌에서 벗어났다는 내적인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형제들을 주 안에서 참가족으로 여겨 사랑하게 하시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기도 응답을 받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스토아적 성품을 위대하게 보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자세, 슬픔과 두려움을 나타내지 않는 강인한 절제력을 높이 샀습니다. 이런 그들은 복음을 비웃고 부끄러워했습니다. 요즘도 사람들은 복음을 비웃습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한 런던대 학생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니 그가 말했습니다. "아니, 막대기 두개와 거기서 죽은 사형수를 구주로 믿으라고요?"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21세기는 인공지능 시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없이도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있습니다. 화성을 오가는 셔틀 관광우주선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지성으로 못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실존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이 많은 것을 발명하였지만 여전히 전혀 새롭게 발명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죄입니다. 현재 사람들이 짓는 죄는 구약성경에 이미 나타나 있는 죄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인간의 실존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할 때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엄중한 실존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시는 이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인류의 소망은 과학 문명의 발전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철학과 지성에 있지 않습니다. 복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복음의 능력을 믿고 힘써 증거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이라는 것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의로운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가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의로 결코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He who through faith is righteous shall live’-RSV.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입니다’-공동번역) 이는 사람이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참된 의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재발견한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루터는 가톨릭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적은 음식을 먹고, 남루한 옷을 입으며 수도원 생활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자주 금식했습니다. 그는 죄의 소욕을 이기고자 자기 몸을 괴롭히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수도원의 규칙을 매우 엄격히 지켰다. 만약 수도사가 그의 수행에 의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이 루터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의 근본적인 번뇌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당시 교황청이 있었던 라테란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Scala Sancta 라고 불리는 28계단을 손과 무릎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올라가면 연옥에서의 형벌이 감해진다고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가 계단마다 입을 맞추면서 28계단을 다 올라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나중에 십자가를 묵상하던 중 문득 로마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루터의 깊숙한 영혼으로부터 울려나는 밝고 강한 외침이었습니다. 사람이 의인이 되는 길은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단지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십니다. 이러한 큰 은혜를 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from first to last)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의 노력, 의지, 공로에 기초하여 생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비교 경쟁하고 시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보면 판단하게 되고 자신은 우월감을 갖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점점 행위신앙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갈라디아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이렇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우리의 마음에 은혜와 사랑이 식어져 있다면, 감사가 메마르고 교만이 들어와 있다면 이는 벌써 은혜로 시작하였다가 행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개를 숙이고 주님의 그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를 뿐입니다. 나의 허물을 언제나 먼저 보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으로 섬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큰 업적을 이루고도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죄인된 심정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도 끝까지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기초한 신앙생활 해 나가길 기도합니다.

 

18-32절은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기서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godless’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행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은 불의를 행합니다.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이 악하다는 것을 알고도 행합니다. 18절은 그들의 고의성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suppress the truth: 진리를 억누른다)는 표현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어로 ‘is being revealed’로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내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진리에 대한 거부가 고의적이라는 사실이 19,20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주어졌습니다. 이를 생득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아이가 태어나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엄마 젖을 빠는 법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계심을 압니다. 누구나 영원을 사모하고 누구나 절대자를 섬기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인류 문명에 나타난 제사 제도와 종교의식에 잘 나타납니다.

 

생득적 지식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다른 측면에서도 드러내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인간은 만물을 볼 때 하나님이 그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자연의 놀라운 신비와 지혜는 위대한 창조주가 계심을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기 손으로 해를 가리고 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물을 볼 때 하나님의 계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득적 지식과 일반계시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은 특수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밝히 계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고의적인 죄를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나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삽니까? 21-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면 지혜로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해집니다. 인간보다 열등한 피조물인 새나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것들을 섬깁니다. 돌과 나무로 만든 것들 앞에 절을 합니다. 24,26,2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그들의 정욕대로, 부끄러운 욕심대로, 상실된 마음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욕심과 상실된 마음대로 살도록 내어버려두시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임하는 진노입니다. 죄를 짓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이는 자기 힘으로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인생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며 구원을 주시는 능력의 복음을 힘써 전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