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글보기
제목2018년 로마서 제4강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아브라함'(4:1-25)2018-08-27 08:32:55
작성자

로마서 4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아브라함

 

 

말씀 로마서 4:1-25

요절 로마서 4:2,3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바울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논증했습니다. 사람은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고 어떤 사람도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이 진리를 믿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진리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혹시라도 사도바울만의 가르침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 가르침이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것임을 말합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어 그들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그들의 훌륭한 행위 때문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1절부터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민족의 조상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일견, 그런 것도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 받았을 때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할례의 원조인데요. 할례가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런 고통스런 일을 행했습니다.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소득의 1/10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 풍성한 음식과 발 빠른 섬김으로 종처럼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하여 그를 구원했습니다.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대단한 행위들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으로 유대인들은 생각했고 그런 생각은 타당한 듯 보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정말 행위로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다며 그는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2절 하반 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보는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머뭇거리는 아버지 데라에 대한 정 때문에 곧장 가나안 땅으로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머뭇거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그를 도우심으로 그가 약속의 땅에 겨우 올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머물다가 기근이 찾아오자 그 아들 이삭처럼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약속의 땅을 떠나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은 애굽 땅에 와서 하나님보다 애굽 왕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멀쩡한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결국 아내를 바로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내랑 산책을 하는데 깡패들이 나타나 이 여자 누구냐물을 때, “잘 모르는 여자니, 알아서 하세요라고 하는 남편이 있다면 어떻게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은 결국 하나님을 따른 지 10년이 되었을 때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애굽여인 하갈을 첩으로 받아들여 영적 혼혈아,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이상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랑스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 투성인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정하신 근거는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이유를 창세기 15:6절에서 찾고 있습니다. 창세기 15:6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당시 상황이 이랬습니다. 아브람은 유일한 피붙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참전했습니다. 사병들을 동원하여 연합군을 쳐서 롯을 구해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여 소득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고 소돔 왕이 주는 불의의 재물은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원수들에 대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또 하나님께 순종하여 약속의 땅에 온지 10년이나 지났지만 자식이 없는 것으로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와 손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아,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그는 시큰둥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도 다 생각이 있다며, 똑똑해 보이는 다메섹출신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고자 하는 합리적인 계획을 피력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를 만류하시며 그 사람이 아니라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별이 유독 빛나는 중동의 하늘을 보여주며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현실과 너무나 괴리가 큰 약속이었습니다. 황당하며 희망고문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좀 전까지 투덜거리며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피력하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그는 곧이곧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습니다. 상황은 전혀 아니고 그대로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시니 어린아이처럼 그냥 믿었습니다. 이것을 본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어떤 훌륭한 행위나 업적들 때문에 그를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믿음이란 행위가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마음의 현상입니다. 그가 믿음을 가진 순간 그의 삶에 어떤 행위의 변화가 온 것이 아닙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버스 탈 때 와 내릴 때 그 어떤 행위의 변화가 없지만 버스타고 있을 때 마음에 믿음의 역사가 있으면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하나님께 평가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브라함이 인정받은 것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표시로 언약체결식을 하였고 장구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웁니다. 그는 행위나 율법의 조상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율법이 있기도 전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믿음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가 행위나 공로나 업적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업적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믿도록 도우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만 높이고 그 하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일한 자에게 삯을 주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보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의롭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누구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까? 바울은 아브라함에 이어 다윗의 케이스를 말하고자 합니다. 왜 다윗을 이야기 합니까? 다윗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처럼 훌륭한 행위들을 많이 하여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인물이 다윗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다윗을 제시합니까? 바울은 한마디로 다윗을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으로 말합니다. 다윗이 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골리앗을 쳐서 물리친 영웅적 행위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이 전쟁에서 백전백승하게 했습니다. 성자처럼 사울을 사랑과 인내로 섬겼습니다. 통일 이스라엘 건국이란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영토를 넓히고 조공을 바치게 했습니다. 성전건축 위해 수많은 재물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다윗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복누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실 많은 일을 한 것처럼 보이나 바울이 볼 때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은 그가 행한 불의한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아주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자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졌습니다. 경건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삼가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건을 상실하고 불의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대낮에 다른 남자의 부인을 왕궁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누구처럼 지위와 위력에 의한 성폭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이를 안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고자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그 여인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불러들여 그 아내와 동침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충직한 장군 우리야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왕궁에서 자므로 다윗의 술수는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 충신 우리야를 죽이고자 전쟁의 선봉에 내보내고 군사들을 퇴각시켜 적들의 화살에 우리야가 맞아죽도록 살인교사행위를 했습니다. 이 살인죄를 요압장군과 공모하고 덮어 역사 속에 영원히 묻고자 했습니다. 그는 사울보다 더 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은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에 십계명중 첫 부분 대신계명을 어겼습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증거하고 남의 것을 탐내었으므로 대인계명 모두를 어겼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진면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을 주시고 믿음을 주셨을 때 그의 진상이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영성을 가진 지도자요 모두가 흠모하고 존경하는 위대한 영적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빠지자 바닥을 드러낸 그의 내면과 죄성은 그가 얼마나 사악하고 불의한 자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심판으로 천벌을 받고 아비멜렉처럼 맷돌짝을 맞아 죽어도 시원치 않을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요 세속사와 구속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불법을 사하시고 그의 죄를 가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죄는 죄값으로하면 일반법정에서 사형이나 징역 150년이나 200년을 살아도 시원치 않을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죄를 없이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다윗은 결코 그의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죄의 권세자이신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믿음(회개)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죄사함의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윗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는데 다윗은 훌륭한 사람의 표상이 아니라 위대한 사람의 가면으로 가려진 죄인의 표상입니다. 사무엘서는 위대한 다윗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감추어진 죄성과 그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고 그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실 그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이들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 복은 무엇으로 얻은 것입니까? 그들의 자랑스런 행위나 뛰어난 행동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허물진 죄인들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위대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못나고 더 사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자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여기심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라함과 다윗을 생각할 때 위대한 아브라함과 훌륭한 다윗이 아니라 그들을 감당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자비와 은혜를 말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시점에 주목합니다(9,10).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후에 하나님께 인정받지 않았습니다. 할례받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인정받았습니다. 즉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입니다. 할례의 표는 무할례시의 그의 믿음을 인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세례와 같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공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인정받은 시점이 무할례시인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무할례자로 믿는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의 모델도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들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의로 말미암았습니다. 만약 율법에 속한 사람들만이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들은 더 이상 소용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결국 율법은 범법과 진노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은혜에 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상속자가 율법에 속하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16a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구원의 약속이 견고해지기위해서는 율법에 속한 자뿐 아니라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해야 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고 하신 말씀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그의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무수한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하나 없습니다. 특히 사라는 불임여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 사라는 90세였습니다. 그들이 자녀를 갖는 것은 Impossible and Impossible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들을 갖게 되다니요? mission impossible 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회의적인 생각을 하거나 메주만한 머리를 굴리지 않고 그저 단순하게 믿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때로 그의 믿음이 약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시점에 다시 믿음의 말뚝을 박고 믿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최근에 박요나단 목자님이 손자를 보셨습니다. 목자님은 아들 박이삭 목자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을 때 낙심하지 않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계속 기도하셨습니다. 그럴 때 딱 10년 만에 손자 요한이를 얻으셨습니다. 요나단 목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체험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 기록된 목적이 있는 데 이것은 아브라함만 위함이 아니라 믿음의 후배들, 신약의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을 가르쳐 주기위해서 인 것으로 봅니다. 우리 곧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유사하지요! 아브라함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었는데 우리도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 재창조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줌을 당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을 확증하기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정말 위대하게 보였던 두 믿음의 조상이 사실은 그 행위가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원리는 바울이 주창한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고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성경적인 구원관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자기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는 게 맞을까요? 사람은 결코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존재요 자랑해서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천지가 창조될 때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 사람은 창조주 앞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창조하셨던 하나님이 홀로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도록 구원도 그렇게 오직 믿음으로 얻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을 세우고 그 언약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약대로 오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며 다 이루었다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2%는 너희 몫으로 남겨두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하신 일을 믿기만 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주님이 몸을 찢기시며 피 흘리시며 하신 일에 내가 보태드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찬양합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합니다. 그 어떤 것을 더 주시지 않아도 불평불만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100%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이런 그는 자기 의가 없었습니다. 교만도 없었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어떤 낮아짐도 감당했습니다. 만물의 찌꺼기가 되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판단하지 않고 사랑과 인내, 온유와 겸손으로 섬겼습니다.

 

이런 사람이 한분 더 있습니다. 바로 John Calvin입니다. 그는 27살에 성경다음으로 위대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를 저술했습니다. 이런 그는 영적인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알았기에 교만에 빠지거나 자기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이런 그의 모토는 “In the sight of God!”, “For the glory of God!”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 자기의 무덤 앞에 자기를 나타내는 조그만 비석도 세우지 말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의만이 드러나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의한 자요, 결코 자기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행위나 업적을 쌓고 그것을 자랑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크신 영광이 가리워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자기 의를 쌓고 자기를 자랑하는 삶은 가장 어리석고 매우 위험한 삶입니다. 또한 그렇게 자기 의를 구하는 사람은 항상 교만과 우울함, 그리고 비교의식과 시기심, 억울함, 손해의식, 분노에 시달리는 삶을 삽니다. 모든 관계가 어색하고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진리를 깊이 영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도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