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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로마서 제5강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확신과 즐거움'(로마서 5:1-21)2018-09-03 13: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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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로마서 5강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확신과 즐거움


말씀/ 로마서 5장

요절/ 로마서 5:2-4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오늘 말씀은 칭의받은 자의 확신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또 그 확신에서 나오는 즐거움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본문의 ‘그러므로’는 3:21-28절을 받고 있습니다. 곧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과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되심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14-16절은 이 화평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의 화평은 곧 하나님과의 화목(reconciliation)을 의미합니다. (11)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적대적인 감정이 전혀 없고 전적인 호의, 친절, 배려의 마음이 가득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화평은 요즘 북한과 미국의 관계처럼 잠시 좋아졌다가 언제든지 다시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그런 화평이 아닙니다. 이 화평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화평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견고하고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은 마치 대통령의 아들이 대통령을 전혀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집무실에서 일하는 대통령을 향해 ‘아빠’ 하고 뛰어가 안기는 것처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품에 ‘아빠’하고 뛰어가 안길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음으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왜 바울 사도가 “들어간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은혜가 무슨 호텔 방이나 고속 열차같은 것이어서 그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의미일까요? 영어성경을 보면 이 부분을 “은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허가권을 얻었다(NIV: gained access into this grace), 은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소개받았다(NASB: obtained our introduction into this grace)”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이 그를 믿는 신자들에게 은혜 안으로 들어가라고 소개해주셨다, 허가권을 발급해 주셨다 라는 의미입니다.


본래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 호의 등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칭의를 시작으로 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전체적으로 볼 때 “법 아래 있다, 은혜 아래 있다(under law, under grace)”라는 표현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법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법을 지키는 나의 행위와 노력이 필요한 그런 시스템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칭의로부터 시작하여 성화와 구원의 완성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와 계획과 인도하심과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목적지가 분명히 정해진 기차 안에 올라탄 것과 같습니다. 그 기차가 가는 여정은 때로 거칠고 험할 수 있습니다. 알프스 산맥이 가로지르는 거칠고 험한 산을 지날 수도 있고 검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비바람을 동반한 천둥번개가 내리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차에 탄 사람은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장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평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결국에는 소망하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은혜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예수님이 차장되시며 하나님 나라가 목적지인 구원열차에 올라탄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가는 길이 때로는 덜커덩거리기도 하고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장면이 무섭고 떨려보여도 차장되신 예수님 말씀만 잘 듣고 순종하면 구원의 완성인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죄악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차표 필요없어요 주님 차장 되시니 나는 염려없어요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천국에 가는 이 여행길이 너무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식사 시간에 제공되는 도시락이 너무 맛이 없다, 여행이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도대체 언제 끝나느냐 불평합니다. 이들은 잠시 휴식과 쉼을 위해 정차한 곳에서 조금만 쉬었다가 일정한 시간 후 곧 돌아와 한다는 차장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멀리 가버립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구원의 완성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기차를 탄 사람이 목적지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아야 끝까지 기차 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은혜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은혜의 종착지인 구원의 완성,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은 마치 수학여행을 앞둔 학생처럼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가득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은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처럼 자기를 단장하고 아름답게 가꾸며 그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 소망이 있습니까? 이 소망이 가져다 주는 말할 수 없는 설레임과 기대감이 있습니까?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그 날 천군천사가 바라보는 무대의 중앙에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위해 오늘 하루도 나를 아름답게 단장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혹시 그런 마음을 많이 잃어버렸다면 회개하고 새롭게 그러한 소망을 충만히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다음으로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해 본다면 우리가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부산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간에 서울-대전-경주역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역을 통과하면 할수록 여행으로 인한 피곤함이 누적되어 힘든 점도 있겠지만 반대로 이제 목적지가 점점 다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고 오히려 기쁨이 증가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은혜의 열차를 타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최종 목적지로 이르는 과정에서 반드시 환난 역, 인내 역, 연단 역, 소망 역을 차례로 통과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구원 열차는 환난 역을 통과해야 합니다. 원문상 환난은 사방에서 무겁게 눌러내리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치면 oppression입니다. 이 환난은 1차적으로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구원의 완성에 대한 영광스러운 소망과 이 소망에서 나오는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 세상에서는 이 믿음으로 인해 여러가지 어려움이나 사회적 불이익, 동료들의 조롱이나 멸시를 당할 수 있습니다. 요즘 2세들은 사회 수업시간에 동성연애에 대해 기독교적 소신 발언을 했다가 사회 선생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듣고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이 심각한 현실 문제가 되었습니다. 캠퍼스 청년들의 경우 친구들에게 성경적인 순결 개념을 이야기하면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당하기 일쑤입니다. 직장인들의 경우 퇴근 후 퇴폐 향락 문화에 동참하지 않으면 승진을 포기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신앙생활 초기에 이런 환난을 경험하고는 곧바로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Pliable 곧 유약함이었습니다. 구원열차를 타고 가다보면 첫 정류장인 환난 역에 내린 다음 다시 돌아오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환난 역을 지나 인내 역에 이르면 과거 힘들게 느껴지던 것들이 의외로 별로 힘들지 않게 느껴집니다. 처음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운동을 조금 하고 거친 숨을 헐떡이며 죽을 것처럼 힘들지만 계속 꾸준히 운동을 하면 운동근육이 생기고 폐활량이 증가하여 이제는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이제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왕따를 당해도 휘파람으로 찬양을 부르며 다닙니다.


인내 역을 지나면 연단 역에 도달합니다. 연단이란 원문상 금광석에서 불순물을 제거한 후 정금을 만들어내는 제련의 과정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 제련은 수천도의 온도로 불순물을 전부 다 녹여내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와같은 연단은 순수하고 참된 신앙만 남고 불순물은 전부 녹아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연단의 과정은 주의 일을 할 때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 상처를 주고 받는 일, 처절한 실패의 경험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연단을 받을 때면 정말 뜨거운 불 속에서 내 자아가 다 녹아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 녹아 없어지는 것은 참된 내 자아가 아니라,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숨겨져 있던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마음,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의지하는 마음 등 여러가지 불순물들입니다. 연단의 과정은 고통스러우나 그러한 연단을 받고 나면 순수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보석처럼 아름답게 남게 됩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이러한 연단을 proven character(NABS), 곧 증명된 인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의 과정을 거친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증해주시고 증명된 믿음과 인격이 있습니다. 14K 금에는 585, 18K 금에는 750, 24K 금에는 999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24K 경우 금의 함량이 99.9%인 순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주시는 연단의 과정을 거친 사람에게 하나님은 14K, 18K, 24K라고 보증마크를 새겨주십니다. 지금 현재 나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보증마크는 무엇입니까? 혹 아직 불순물이 99.9%이고 금은 0.01%에 불과한, 그래서 전문가가 돋보기를 가지고 들여보기 전에는 판정하기 힘든 금광석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을 잘 받아 최소한 14K, 더 나아가 24K에 이르기까지 정금과 같은 믿음과 인격으로 빚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연단 역을 지나면 소망 역에 이르게 됩니다. 소망 역에 이른 사람은 이 세상을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나그네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여러 환난을 통해 연단받은 사람보다 더 거룩한 성도는 이 세상의 모든 명예도, 영광도 오늘 피었다 내일 시드는 꽃과 같고 풀과 같이 덧없는 것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오직 십자가에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구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 주님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함께 거하게 될 하나님 나라 산소망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붙들린 사람은 구원의 여정에 이와같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그에게 큰 유익이 되고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여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끝까지 참고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단지 참고 견디어낼 뿐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살면 그런 어려움이 올 것이고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신앙이 연단될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면서, 아 그렇다면 성경이 약속한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도 반드시 일어나겠구나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도의 구원의 완성에 대한 확신은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마음 가운데 부어 주십니다. 부어주신다는 표현은 영어성경을 보면 “God’s love has been poured out(NIV)”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찔끔찔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케스로 확 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본문에서 연약하다는 것은 선을 행해야 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빈약하다는 것으로 뼛속까지 악한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경건하지 않은 자란 ungodly로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 하나님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멸시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의인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선인이라 함은 자기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는 용감히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을 행할 의지 자체가 없는 악인을 위해서, 하나님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위해서, 죄짓기를 밥먹듯하며 살아가는 죄인을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 위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본문은 “이제 ... 하였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 하리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것은 바울의 논증법입니다. 바울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차분하게 생각해보라고 권면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의 고귀한 피를 십자가 위에서 흘리도록 하셨습니다. 주님 편에서 볼 때 자기자신을 내어주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의롭다고 하신 우리를 멸망당하도록 내어 버려두실까요? 아닙니다. 그 아들의 고귀한 피가 단 한 방울도 헛되이 되지 않도록,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의롭다 하신 우리를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시고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밥먹듯이 지으며 주님을 멸시하고 대적하며 원수같이 행하던 그 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찬송가 저자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저 바다를 먹물삼는다 할지라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으리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그와 같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된 우리를 도대체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실까요. 과거 청교도들 가운데서는 본문에 기록된 이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다가 그 사랑의 크기가 너무 커서 견디지 못하고 그만 정신을 잃고 졸도한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정말 진지한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 파도와 같이 쓰나미와 같이 밀려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현실의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고 모든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의심과 회의과 먹구름처럼 밀려들게 됩니다. 이때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고 마음이 회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위로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고난 가운데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자기 아들을 과거 원수처럼 행하던 나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원수였던 나를 저렇게 뜨겁게 사랑하셨다면 지금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된 나를 그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실까? 하나님이 나를 고난의 매로 이렇게 때리시는 것이 과연 내가 미워서일까? 아니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일까? 그 때 고난의 매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뜨거운 사랑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때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승리할 힘을 얻게 됩니다. 혹 우리 가운데 고난 중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고난 가운데 울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감당하여 아름다운 생명의 열매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2-21절에서 바울은 칭의받은 사람이 어떻게 반드시 구원의 완성인 영생에 이를 것을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 대조하여 말씀합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또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아담은 첫 사람으로서 인류의 대표가 되어 하나님과 선약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아담은 그 언약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아담은 장차 인류의 새로운 대표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15-19절을 보십시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순종을 통해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고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 내용에 대해서는 7장에서 자세히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율법이 들어옴으로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한 깨달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력하게 그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아담의 한 범죄로 인해 죄가 사망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고행과 수도와 노력으로도 이 사망의 왕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철인도, 그 어떤 위대한 영웅도 다 이 사망의 왕노릇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사망의 힘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얼마나 강력합니까. 사망의 무시무시한 힘에 사로잡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과 절망가운데 울부짖는 온 세상 영혼들의 저 절규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런데 은혜의 힘이 이와같이 강력합니다. 아니 사망의 힘보다 더욱 강력합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강력한 은혜의 왕노릇을 통해 반드시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결론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값없이 의롭다 하시고 친히 인도하사 성화시키시고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는 은혜의 세계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의 세계 안에서 최후의 승리, 구원의 완성을 확신하며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굳게 붙들고 하루하루 자신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가을학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