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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로마서 제8강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1-39)2018-09-25 09:4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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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강 


넉넉히 이기느니라


말씀 로마서 8:1-39
요절 로마서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연약하고 어려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신앙의 최종승리인 영화에 이를 수 있는 지 그 비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상황의 어려움으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본문을 통해서 큰 힘과 확신을 얻고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확신있게 달려가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도바울은 7장에서 강한 죄로 인해서 죄에게 지고 비참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실존을 다루었습니다. 이런 인생들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 예수님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지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감격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해방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 세계사에서는 링컨대통령의 흑인노예해방,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이 떠오릅니다. 해방이란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말합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복음과 성령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정말 수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함 때문에 율법은 그 요구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습니까? 자기 아들을 죄인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때마다 씻어주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 연약함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이로써 결과적으로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다보면 어느덧 율법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명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 인간 존재의 핵심은 생각입니다. 생각이 우리를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깊은 곳의 생각을 보십니다. 생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어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 생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정욕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사망이라고 하면 육적 사망만 생각하는 데 본질적인 것은 영적 사망입니다. 영적 사망이란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과 친밀하고 화목한 삶을 삽니다. 마음에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성도 속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성령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육신이 아니라 영에 속해있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부활의 영이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십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사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동거인이신 셈이죠! 여러분은 성령님이 자신 안에 사시는 것을 느끼십니다. 시골에서 자랄 때 뒷방 노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90살이나 100살에 가까운 분이 같이 사시는 데 뒷방에 사시는 데 사시는 지 돌아가셨는지 잘 구분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긴 한데 죽은 듯 살아계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역동적으로 살아계시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뭐 그리 중요한가 물을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역동적으로 살아계신 분들은 그 삶에 외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적으로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여러 가지 표징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성품들이 내면에 자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착한 마음.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것입니다.(갈 5:22) 

그러면 이렇게 성령 충만하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거듭난 성도도 여전히 육신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제 육신에 빚진 자가 아니니 그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아선 안 됩니다. 우리는 육신에 빚진 자가 아니라 성령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러니 빚진 자처럼 성령님을 의식하고 성령에 이끌리고 성령의 바람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충만하기위해 구체적으로 죽여야 할 육은 어떤 것들입니까?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갈 5:20)  첫째로 성적인 것입니다. 성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 쓰이거나 남용될 때 그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하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장애물이 됩니다. 다음으로는, 영적 음행입니다. 우상숭배, 제사나 무당의 행위 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입니다. 이것은 한 문장으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영광과 자기 뜻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종교적 열심이 있더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고통의 때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찾는 사람,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보다 다른 즐거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무절제하게 본성대로 사는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장애물입니다. 사도바울은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라는 말로 그 외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함을 암시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역사하는데 걸림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소원이 너무 강하여 그것을 죽이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귀하고,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때 영으로 육신의 일들을 죽이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영으로 강하게 인도함을 받고 있는 사람이 실제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름뿐인 하나님 자녀의 삶은 비참합니다. 우리가 영적 소원을 충만히 덧입고 영으로써 육을 죽이는 삶을 살므로 성령의 인도함을 강하게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무엇을 확신합니까? 15-1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과거 하나님을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친밀해졌습니다. 이런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성령이 주시는 내적확신으로 압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친밀하게 나아가 교제하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언제든지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자녀의 특권은 상속입니다. 대기업의 2세들은 크고 많은 것을 물려받습니다. 성도는 대기업 자녀들보다 더 크고 대단한 것을 물려받습니다. 이 땅의 기업은 언제가 쇠하여지고 사라집니다. 세상을 떠날 때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엄청난 재산이 있어도 노화와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습니다. 

보통 대기업의 2세들은 아버지 회사에 입사하여 경영자 수업을 받습니다. 아버지가 훌륭한 분일수록 자녀가 낮은 직급부터 시작하여 경영자로서 필요한 것을 익히게 합니다. 재벌 2세들은 이렇게 낮은 직급에 내려갈 때 아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고난을 감당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대기업의 상속자로서 연단 받고 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성도들에게 탄탄대로만 있지 않습니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생자처럼 대우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사라질 세상의 기업을 이어받는 재벌 2세도 그렇게 연단을 받도록 하는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을 영원한 나라를 이어받는 우리야 얼마나 연단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주 혹독한 연단을 받기도 합니다. 욥처럼 연단을 받습니다. 그렇게 연단 받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영원한 그 나라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렇게까지 연단을 받는 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새로운 가치에 눈뜹니다. 사도바울은 이 나라가 얼마나 대단한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현재 피조세계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피조물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로 허무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간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땅의 소산을 겨우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종신토록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흙으로 돌아간다니! 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래서 일찍이 허무주의 철학자들은 그런 허무한 삶을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자살을 권유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썩어짐 때문에 탄식합니다. 썩어짐이란 노화와 질병, 그리고 죽음을 말합니다. 이런 탄식소리가 가장 많은 곳은 병원입니다. 사람들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때마다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습니다. 갈 때마다 피를 뽑아야 하고 위내시경을 합니다. 얼마 전 한 사모님은 위암으로 밝혀져 위 전체를 제거하였습니다. 남편은 이로인해서 탄식했습니다. 허무와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세상에는 참된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피조물들은 무엇을 간절히 바랍니까?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영의 구원을 받았는데 죽을 몸을 덧입고 있기에 탄식합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참 소망은 우리가 죽을 몸을 벗고 영광의 몸을 덧입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우리가 죽을 몸을 벗고 영광의 몸을 입을 것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썩지 아니할 몸을 덧입는 것이 바로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몸의 구속, 영광의 자유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간절히 바라는 참된 소망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의 구원을 받고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이것을 한마디로 영화라고 부릅니다. 이 영화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연약함과 많은 고난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약해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왜 희망이 있습니까? 26,27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기도를 못할 지경에 이릅니다. 기도를 못한다는 것은 영혼의 호흡이 거의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거의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위해 인공호흡을 하듯 대신 기도해주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신자의 삶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들도 일어납니다. 요셉은 같은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고 가장 낮은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충성을 다했는데 억울하게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억울함으로 머리를 박고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이 이 모든 것을 극복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인생을 인도하시는 다는 것을 굳게 믿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삶을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악인의 악마저도, 사람들의 실수마저도 쓰셔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믿음입니다. 요셉이 이런 믿음을 가졌을 때 그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사람을 붙들고 인간갈등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굳게 믿을 때 작은 성공과 실패, 인정과 칭찬과 낮아짐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이루시고자 하는 선한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내적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정말로 예수님 같은 생애를 살았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히 자신에게 악행한 자들을 용서하고 축복하는 예수님의 내면성을 덧입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구원의 여정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인도하심을 믿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구원의 여정을 예지 - 예정 - 소명 – 칭의 – 영화 네 단계로 축약해서 말했습니다. 구원의 여정이 더 긴데 여기는 주로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을 열거한 것 같습니다. 특히 영화가 미래적인 것인데 과거형으로 표현된 것은 우리가 반드시 영화롭게 될 것을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에 최종승리가 확실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예지와 예정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연약한 자라는 것을 알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결코 구원의 여정과 그 승리에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연약함을 공격하는 사탄의 소리, 정죄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를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또 주 예수님이 하나님 가장 가까이 서 우리를 가장 유능하게 변호하고 계시기에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한마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신 사랑, 최고의 사랑, 검증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앞에서 감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반문하거나 의심을 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여러 가지 환난, 곤고, 박해, 경제적 어려움과 헐벗음, 심지어 생명의 위협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죽음도 생명도, 하늘의 천사도, 마귀들도, 현재일 뿐 아니라 장래에 일어날 그 어떤 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영적 승리를 이렇게 외칩니다. 3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러나”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련이 아무리 커도 그보다 훨씬 더 큰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시련을 이깁니다. 우리가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비교가 안 된다고 하면 1대 1조 정도면 비교가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시련이 너무나 커 보입니다. 1조 정도로 보입니다. 크기로 하면 태산처럼 커 보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허덕이며 헉헉댑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그것을 겨자씨처럼 작게 만들어 보입니다. 문제가 태산이면 하나님의 사랑은 지구전체의 산보다 더 큽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은 we are more than conquerors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면 우리가 가진 문제는 이처럼 작아집니다. 우리가 수영을 못하면 25미터를 건너가는 것도 너무 힘듭니다. 헉헉댑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영실력이 늘어나면 한강도 넉넉히 건널 수 있습니다. 조오련씨같은 경우는 대한해협도 건너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문제만 바라보면 우리는 그것에 기가 질리고 그것에 깔려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면 우리는 그것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 보니 두 자녀가 죽어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시련입니까? 생각만 해도 힘든 시련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련보다 더 큰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었습니다. 이때 평안과 감사의 찬송을 지어 불렀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찬 470장)   

롤러코스트를 타는 사람은 롤러코스터의 안전장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급한 경사도와 굴곡을 즐깁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우리의 승리는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십니다.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이 작품을 만들고 계심을 믿기에 우리는 그것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지난 아시안 게임 축구 결승전을 보지 못하고 말씀준비를 했습니다. 그 경기가 우리를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했나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끼는 손흥민 선수의 군대문제가 걸려있었기 때문에 온 국민이 내 일처럼 여기고 그 경기결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목자님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말씀준비에 전념하였고 도중에 살짝 한국이 이겼다는 결과만 접하였습니다. 그는 메시지를 잘 전한다음에 그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요? 아주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승리한다는 결과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최종승리는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에 있어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안해하거나 조마조마하지 않고 담대하고 평안하고 우리 앞에 당한 문제를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도 다양한 훈련들을 받았고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반석위에 굳게 서서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내는 승리자, 정복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