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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요한계시록 2강 `처음 행위를 가지라`(요한계시록 2:1-29)2019-10-14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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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 요한계시록 2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말씀 요한계시록 2:1-29

요절 요한계시록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 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시록의 1차 수신자는 소아시아에 있었던 7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들 7교회가 주는 상징성이 있기에 비단 그들뿐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 전 모든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 입니다. 본문은 에베소교회와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4교회에 해당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소아시아 모태교회였던 에베소교회에 주셨던 메시지를 통해서 그들의 신앙이 왜 식어졌는 지 깨닫고 우리 자신도 돌아보며 우리의 처음 행위도 회복하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맨 먼저 에베소교회에 편지하신 것은 에베소교회가 소아시아 7교회의 어머니교회로서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사자는 누구입니까? 전승에 의하면 바울순교이후에 디모데가 AD 67~90년까지 사역했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사역자는 누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시는 예수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며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오른 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영적 지도자를 별로 표현한 것은 그 신분이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일곱 금 촛대는 소아시아 7교회를 뜻합니다. 그들은 금촛대입니다. 이는 교회가 어두운 세상에 빛을 주며 매우 소중하고 영광스런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는 바울이 순교한 후, 사도요한이 주로 순회하며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한이 체포되어 왔습니다. 요한은 7교회를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을 통해서 주님이 친히 돌보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칭찬과 책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칭찬입니다. 2,3,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그들은 수고하고 인내하고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들이 칭찬받을 점은 악한 자들, 거짓 사도들, 구체적으로 니골라 당을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9, 20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를 개척할 때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2년을 매일 같이 했습니다. 공중앞에서도 가르치고 각 집을 방문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도왔습니다. 이런 영향력때문인지 에베소 교인들은 말씀을 체계적으로 잘 알았고, 바울을 닮아서 부지런하고 열심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떠나면서 외부에서 사나운 이리같은 자들이 침투하고 내부에서는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들을 하는 이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 말대로 에베소교회에 자칭 사도라 하며 이단사상을 가르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말씀훈련을 잘 받아서인지 그들을 잘 분별하고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심장근처에서 피흘리지 않고 살 1근만 떼어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고 긴 인내의 싸움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에베소 교인들은 참고 진리의 싸움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렇게 교회내부에 침투한 이단들과 싸우면서 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고 히니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교회를 지킨 에베소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어떤 점을 아쉬워하고 책망하셨습니까? 4,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 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은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시며 처음 행위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처음 사랑, 처음 행위는 어떠했습니까? 사도행전 19, 20장을 통해 다시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날마다 말씀을 배웠습니다. 사도바울이 날마다 말씀을 가르쳐서도 그랬겠지만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자하는 소원과 열심 이 있었습니다. 배워도 배워도 말씀배우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배우러 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빨랐고 가슴은 뛰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말씀을 배우지만 않고 행함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에베소에는 마술을 행하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 마술은 헛된 거짓 신들을 의지하는 행위로 하나님앞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행위였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배우고 이런 것을 조장하는 마술책들을 다 불태웠습니다. 이들에게 주의 말씀은 힘있게 역사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의 말씀은 그들을 통해 소아시아 여러 도시로 힘차게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또한 에베소교회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있었고 성도들은 영적 지도자를 귀히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헤어질 때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다 크게 울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를 신뢰하고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왜 모든 면에서 차가워진 것입니까? 첫째로, 자연적인 원인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40년이 넘었습니다. 결혼한 지 40년이 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의리로 살기로 결의했다는 부부 광고 카피가 생각납니다. 3-4년만 지나도 권태기라는 말이 있는 데, 무려 30-4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두 번째로 교회생활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칭 사도이지만 사도가 아닌 사람들을 겪으면서 교회지도자에 대한 회의가 들어왔습니다. 네 파, 내 파 싸우면서 사람들이 싫어서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들은 차가운 마음으로 마지못해 교회를 왔다갔다 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고 마치 불꺼진 난로처럼 교회생활의 폼만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향은 옆으로 아래로 알게 모르게 퍼졌고 당연히 에베소교회는 전처럼 어머니 교회의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동안 고생했고 사정이 그랬으니 충분이 이해한다. 그 상태로 주욱 나가라고 하셨습니까? 4,5절을 다시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 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그들을 책망하시고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불이 꺼진 것에 대해서 책임을 다른 데서 찾지 말고 각자가 회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인을 항상 다른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의 경우, 지도자에게나 교회의 시스템이나 분위기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맞는 분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영적 지도자가 훌륭하고, 교회시스템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데 신앙적으로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 지를 생각하라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나의 신앙의 불이 꺼진 이유앞에 서야 합니다. 많은 이유들 속에서도 정직하게 내게 해당되는 이유는 없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점을 가슴아프게 회개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회개하고 처음 주님께 대한 사랑, 처음 주님께 대한 행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의 불을 태울 수 있습니다. 두 아들을 잃고도 신앙의 불이 꺼지지 않았던 손양원 목사님, 엘리 제사장 밑에서도 잘 자란 사무엘, 최악의 조건에도 뜨거운 심령으로 주님을 섬기는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신앙이 교회분위기나 교회지도자나 신앙스타일이 다른 형제자매때문이라면, 내 신앙이 그 정도에 갇히고 그 정도에 눌리고 그정도밖에 안되는 종류였단 말입니까? 악천후를 뚫고 이륙하는 비행기는 그 비행기의 성능과 조종사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추위에도 난로의 불은 타오를 수 있으며 추위가 심할수록 그 가치를 발합니다.

 

현재 나는 어떤 상태인가요?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까? 말씀을 공부해도 공부해도 또 하고 싶습니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성경공부에 임하고 형광펜으로 밑줄도 쫘악 긋고 싶습니까? 말씀을 공부하면 한 가지 걸리는 죄와 실제적으로 결별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담감과 열정으로 열매에 관계없이 전도를 하고 있습니까? 영적 지도자에 대해서도 문제점도 알지만, 그 수고를 알아 고마움과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이 변질되기도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주님을 섬깁니다. 챨스스터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은 해가 갈수록 더욱 뜨거워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죠지물러는 9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변함없이 새벽을 깨워 성경을 읽고 기도했고 죠지 휫트필드는 세상을 떠나는 그날에도 변함없이 청중들에게 전도설교를 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가 있듯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지도자와 성도들을 더욱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b를 볼 때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촛대를 옮기시겠다 경고하셨습니다. 더 이상 교회기능을 못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면 7절을 보십시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신앙의 차가움과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십니다. 이것은 꼭 죽음 이후에 낙원에 들어가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삶속에서 낙원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3:22).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회복한 사람은 오늘의 삶이 낙원이 되며 하루하루가 영생을 맛보는 삶을 삽니다.

 

8절을 보십시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서머나 교회에 편지하시는 주님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하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악에게 지지 않고 승리하심을 뜻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현재 환난과 궁핍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무리가 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로마에 반역하는 무리들이라고 비방하며 고발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로마당국으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하고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은 결과 그들은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럴 때 그들은 믿음의 삶에 대해 회의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부자들이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하지만 영적으로 거지인 사람들도 있고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부요한 이들도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믿음으로 살고 주님께 충성한 것은 그들의 영원한 자산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후에도 가치가 지속되는 재산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의 환난이 끝났으니 상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귀가 장차 그들가운데 몇 사람을 투옥시킬 것이랍니다. 왜 서머나 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서 그렇게 충성하고 헌신하는 데 고난을 또, 더 받는 것입니까? 고난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아닙니까? 이는 그들의 믿음을 더욱 연단하여 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금은동 수준이 아니라 다이아몬드급 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10b를 보십시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인데 이는 신앙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죽음은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최대의 환란입니다. 우리가 만약 죽기를 각오한다면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습니다. 고난을 너끈히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편지하시는 주님은 진리의 검을 가지신 분입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삽니다. 이는 버가모가 로마와 함께 황제숭배의 2대 본산지였기 때문입니다. 버가모에는 매일 황제숭배의식이 있었습니다. 1년에 한번은 모두가 참여하는 대대적인 황제숭배의식이 있고 이것을 한 사람에게는 증명서가 발급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주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의 주기철 목사님같은 분이었습니다. 이런 버가모 교회에도 책망받을 점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발람이란 거짓 선지자는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타락시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행음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대로 미디안의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꾀어 우상숭배하고 행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런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하루동안에 24천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버가모에는 우상숭배를 참여하고 행음을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초대교회 집사였다 타락한 니골라가 이끄는 니골라당이었습니다. 니골라는 이원론에 빠져서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니 육체로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가르쳤습니다.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는 니골라 당에 대해서 그들은 부정한 자들이었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니골라 당은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니골라는 헬라어로 백성을 이긴 자란 뜻인데 이름대로 니골라 당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속에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는 데 나름 인정받던 니골라 집사가 고상한 이론으로 죄악된 삶을 합리화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니골라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타락한 삶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은 그들에게 가서 진리의 검으로 그들의 그럴듯한 합리화 속에 감추어진 죄에 대한 사랑과 위선을 드러내시고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버가모 교회에서 이기는 사람들은 니골라 당의 미혹에 빠지지 않고 죄와 싸우며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십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주셨던 양식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후 더 이상 내리지 않았습니다. 견본으로 언약궤 속에 있었던 것 마저 어느 때에 소실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죄와 싸우며 자신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그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날마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신령한 양식을 먹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그 양식은 하늘의 기쁨과 만족과 힘을 줍니다. 그 만나는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압니다. 그리고 새 이름이 기록된 흰돌을 주십니다. 흰돌은 로마의 경기장에서 승리자에게 주었던 승리자의 증표였으며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입장권이기도 했습니다.

 

흰 돌을 누구에게 주신다고 했습니까? 영적 승리자들입니다. 그 흰 돌에는 그의 새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강한 인간성을 깨어지고 하나님앞에 엎드려 영적 씨름을 하자 그에게 새 이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의 새 이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즉 영적 승리자란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영적 씨름을 하고 있는지 다 아시며 다 보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주님은 나의 영적 씨름에 걸맞는 영적 승리자의 이름을 승리자의 흰 돌에 새겨주실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하시는 주님은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같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는 엄정한 심판장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은 이 주님을 속일 수 없고 주님의 심판이 두아디라 교회에 임할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열심히 주님을 위한 사업을 했고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 행위가 처음행위보다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두아디라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이세벨은 실명이 아니라 그녀가 구약에서 아합과 북이스라엘을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 이세벨 같은 역할을 했기에 붙인 상징적 이름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종들을 가르쳐 그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두아디라는 빌립보 교회 개척의 동역자 루디아가 고향에 가서 세운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도 빌립보교회처럼 여성들의 파워가 셌고 그 중에 한 여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칭 선지자라 했으니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확신이 강했습니다.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권면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세벨로 불리우는 이 여자는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논리로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문제가 없다고하며 권장했을 까요? 두아디라는 사업조합 길드로 유명한 곳입니다. 특히 섬유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곳에 사는 평신도들은 모두 길드에 속해 있었고 길드에 소속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길드행사에는 우상숭배가 있었습니다. 이곳의 평신도들에게는 길드에서의 우상숭배 문제는 고민거리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이들에게 크게 고민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회생활도 잘해야 하니 우상숭배에 참여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상숭배의식에 참여해 여사제들과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다 괜찮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생활만 잘하면 안되고 사회생활도 잘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이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는 이 이세벨이란 여자에게 경고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확신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은 그녀를 병상에 던지고 그녀의 뒤를 따르는 자들도 환난가운데 던집니다. 특히 그 환난은 자녀들에게 임합니다. 이로서 주님은 모든 교회가 주님이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을 알게 하십니다. 주님은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끝까지 순수한 신앙을 붙잡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의 깊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사탄이 매우 고단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탄은 그럴 듯한 말, 이상적인 말들로 성도들을 속이고 타협적인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니 성도는 사탄의 고단수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사탄의 역사인가 아닌가는 성도들의 삶이 결과적으로 영적 전투력을 잃고 어떻게 변질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세상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또한 새벽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새벽별은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별로서 성경선생으로서 역할과 영광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결론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시키고 변질시키고자 합니다. 거기에는 고단수의 공작이 있습니다. 그럴 듯한 이유와 사상과 가르침으로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를 무력화시킵니다. 그래서 금촛대의 불을 꺼뜨리고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교회가 되도록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탄의 고단수를 알고 순전한 복음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다른 모든 핑계를 접고 처음 사랑, 처음 행위로 소아시아교회의 모체가 되었던 에베소교회의 그 신앙적 열정과 순수성을 회복하여 금촛대로 다시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