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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14 강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누가복음 8:40-56)2017-05-23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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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14강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 누가복음 8:40-56
요절 누가복음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현대 사회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징후는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보이스 피싱이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정신질환을 다루는 의사나 상담가의 수요가 점점 더 늘어나는 것은 그 증거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두려움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참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 주는 믿음의 세계 안에 들어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회당장은 조선시대같으면 서원의 관리와 책임을 맡은 마을 유지입니다. 그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의 발 아래 앞드려 간구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간곡히 구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막 5:23) 42절을 보면 이는 그에게 열 두 살 된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딸이 없어서 딸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잘 모르는데, 딸 가진 목자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다시 젊은이가 되어 연애를 하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딸이 애교를 부리면 순간적으로 이성이 마비되어 어떤 불합리한 요청이라도 다 들어준다고 합니다. 야이로도 퇴근하여 돌아오면 아빠 하고 반기며 안기고 온갖 애교를 부리는 딸이 너무도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이 어느날 온 몸에 고열이 오르며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용하다는 동네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도록 해 보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딸의 상태는 더욱 중하여져서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마침 그가 살던 동네에 오셨습니다. 그는 한 달음에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의 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 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었습니다. 혈루증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자궁 내막증과 같은 질병으로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병입니다. 이 병이 장기화되면 자궁 내막증이 직장, 요관, 방광 등을 침범하여 만성적인 골반통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여인은 통증이 심한 날은 하루 온 종일 누워 신음만 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삶을 무려 12년을 살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아버지로부터 온갖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던 그 12년 동안 여인은 혈루증으로 인해 지옥과 같은 고통의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어떤 병이라도 손을 대기만 하면 낫게 하시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 취급되어 대중 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예수님 앞에 자기의 병을 말하면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멀리 쫓아낼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포기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엊그제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하루종일 고통 가운데 누워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녀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몰래 예수님 옷에 손만 대어도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녀의 믿음은 미신적인 믿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내가 석달동안만 새벽기도해도 취업을 하리라’ ‘내가 성경을 일독만 해도 승진을 하리라’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매몰차게 내치는 분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랑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형편을 깊이 헤아리시고 그녀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그것에 은혜를 주시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히브리서 11:6절에서 말씀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44절을 보십시오. 여인은 몰래 예수님의 뒤로 왔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습니다. 유대인의 의복에서 옷 가는 만져도 전혀 만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믿음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을 때에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그녀의 온 몸을 감쌌습니다. 그녀의 병이 나아 혈루증이 즉시 그치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또 독창적이고 창의적입니다. 우리도 본문의 여인처럼 각자 처한 상황에서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믿음을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이 너무 많고 바쁜 분들은 하루에 말씀 한 절 암송하기, 하루에 성경 한 장 읽기를 믿음으로 도전해보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할 시간이 부족한 분들은 잠간 잠간 짬이 날 때마다 마음으로 기도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남들은 저 분이 지금 말씀을 암송하고 있는지, 기도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지만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그 믿음의 터치를 통해 놀라운 말씀의 능력,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의 믿음의 터치를 통해 능력이 예수님으로부터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변을 돌아보시며 누가 나에게 손을 댔느냐고 물으시며 찾으셨습니다. 숨길 수 없게 된 것을 깨달은 여자는 떨며 나와 자초지종을 고하였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그녀를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얼마나 자기에게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딸과 같이 사랑하시는 분이신지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구원하였다는 것은 병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병이 나은 것은 예수님이 가진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여인의 삶 가운데 나타난 것은 그녀가 가진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와같이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만드는 통로입니다. 전선을 통해 화력발전소에서 만들어내는 전기가 우리의 집에 들어와 어둠도 밝혀주고 전기밥솥으로 밥도 짓게 하고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도 말리고 노트북 컴퓨터도 작동되게 하는 것처럼, 믿음은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와 평안과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합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님은 그녀의 은혜로운 간증을 다 들으며 또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고 격려하시는데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셨습니다. 전혀 서두르지 않고 그녀를 칭찬하시고 또 제자들과 무리들도 그녀로부터 믿음에 대해 한 수 배우도록 격려하셨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회당장의 집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야이로 선생님,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야이로는 딸이 죽기 전에 얼른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의 팔을 붙들고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혈루증 여인의 등장으로 인해 시간이 한없이 지체되었습니다. 야이로는 은혜로운 간증을 중단시킬 수도 없고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딸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우리 딸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애간장이 녹아나고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흐르고 다리는 후들거렸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음성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은 마치 야이로의 심장을 관통하는 한 탄의 총알과 같았습니다. 
 
일견 그의 말은 야이로를 위하고 또 예수님을 위한 말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을 멸시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 선생이 아무리 대단해도 당신 딸의 죽음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더 이상 그를 의지하거나 그에게 간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당신의 죽어가는 딸 문제, 당신의 절박한 이 현실 문제를 도와주지 못하는 예수님이 당신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야유와도 같았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야이로는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야이로에게 있어 무남독녀 외동딸은 그의 삶의 기쁨이요 보람이요 의미요, 사랑이었습니다. 딸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니 야이로는 그 사실을 현실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 때 아빠 하며 가슴에 안겨 볼을 비벼대던 딸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그 딸이 없는 휑한 집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두렵고 문을 열 때 딸없는 집에서 흘러나오는 그 적막함을 마주대한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벽에 딸이 그려놓은 낙서, 딸이 늘 가지고 놀던 인형을 볼 때마다 느껴질 그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과연 견뎌낼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공황장애에 빠진 사람처럼 야이로의 심장은 터질듯이 쿵쾅거렸고, 머릿속은 백짓장처럼 하얘졌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표정으로 힘차게 걸어다니고 있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대학생들은 과연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할 수 있을지 두려워합니다. 직장인들은 이 직장에서 짤리지 않고 잘 다닐 수 있을지 두려워합니다. 미혼자들은 결혼을 잘 할 수 있을지 두려워하고, 기혼자들은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가정이 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사건사고를 다룬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나나 사랑하는 가족 중 누가 저런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보이스 피싱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겨진 이러한 두려움을 끌어내어 사기를 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에게는 당신의 계좌가 도용되어 당신이 전과자가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둔 주부들에게는 당신의 자녀가 납치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연세드신 분들에게는 평생 모아둔 돈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합니다. 전화기 너머 흘러들어오는 목소리가 내 내면에 감추어졌던 두려움을 터치하는 순간 이성은 마비되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사실로 믿어집니다. 녹음된 아이의 울음 소리가 정말 내 자녀의 음성처럼 들리고 내 개인정보를 전부 입력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이 진실처럼 들립니다. 
 
두려움이 무서운 것은 그 두려움이 실제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이끄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의 외도로 가정이 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주부는 때마다 남편을 의심하고 바로 그 의심 때문에 가정이 깨어지게 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실패로 끝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이 가진 모든 진심과 시간, 열정을 쏟아붓지 못합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쏟아부은 진심과 열정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심과 열정을 쏟아붓지 못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이 실패합니다. 학위논문이 실패로 끝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논문을 쓰지 않습니다. 썼다가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대창피를 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에 아예 쓰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쓰지 않은 사실 때문에 실제 학위논문에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나의 신앙생활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에 진심을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태도도 대충대충 건성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건성으로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에 실제 신앙생활이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이러한 두려움의 뿌리에는 사탄의 거짓말이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나님께서 너희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분이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지금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과 대등한 실력을 갖추어놓지 않으면 언젠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해와 고통을 당하고 또 수치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두려움에 굴복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가 그들을 정말로 수치와 고통, 또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두려움은 우리 영혼이 사탄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믿은 결과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8절에서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자들의 리스트가 나오는데 가장 첫 번째 리스트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 다음입니다. 사탄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사탄과 함께 가장 먼저 지옥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져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하얘져가는 야이로의 귀에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본문에서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 선생을 괴롭히지 말라는 사람의 말은 내용상 사탄이 하는 말과 방불합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능력이나 권한이 없으니 더 이상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는 그가 계속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은 딸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그의 삶 가운데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넘어지게 했던 그 음성을 계속하여 들으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돼. 결국은 네가 알아서 해야 돼. 하나님이 너의 인생을 책임져 준다고? 웃기지 마. 인생은 단 한 번 뿐인데 망하고 나서 그 때 가서 도대체 누구를 원망할래? 너의 인생의 주인은 바로 너야. 너 스스로를 믿고 네가 네 인생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이러한 사탄의 음성을 들은 현대인들은 평생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두려움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는 예수님을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혹 주님을 나름대로 믿고 의지했는데 실패하여 낙심한 분이 계십니까?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믿음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물장구를 몇 번 쳐보고 인간이 수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영으로 부산에서 일본까지 간 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해 봤는데 결국 안 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과연 내가 몇 번이나 믿음으로 도전해 보았는가, 내가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믿음의 시도를 해 보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 주님을 믿어 큰 승리를 체험한 분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본문의 야이로처럼 이미 죽은 딸이 살아나는 일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특별히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단회적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 삶의 실제적인 문제에서 죽음을 뛰어넘는 것과 같은 구원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killer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순식간에 믿음이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떨치고 믿기만 하면 죽은 딸을 살리는 구원의 능력이 나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됩니다. 
 
믿기만 하라는 것은 이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위해 가진 전재산을 팔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기 위해 40일간 금식을 하고 컴컴한 동굴에 들어가 수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기 위해 피눈물나는 처절한 투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신을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믿기만 하라는 것은 지금 현재 믿으라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믿거나 기회가 되면 믿거나 언젠가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부터 믿겠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일부터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요구되는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는 결국은 믿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믿기만 하라는 것은 이것이 나의 선택의 문제라는 의미입니다. 두려움이나 믿음은 그냥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탄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을 선택하는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선택하는가 하는 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두려워하면 결국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죽은 딸을 살리시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내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왜 두려움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탄의 말이 주님의 말보다 더 신뢰가 됩니까? 사탄의 인격이 주님의 인격보다 더 믿음직스럽습니까? 두려움을 선택하는 자는 결과적으로 사탄을 믿는 자입니다.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고 신뢰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의심의 여지없이 주님의 인격을 신뢰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탄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왔다면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가짐으로 죽은 딸과 같은 우리 삶의 절망적인 현실을 뛰어넘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야이로는 다시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였습니다. 그의 집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은 12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또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아이의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정적인 중요한 순간에 세 제자들만 데리고 가심으로 그들에게만 죽은 딸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이른 바 key member training으로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 그룹을 양성하심으로 장차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이 아이의 방에 들어가시기 직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하였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바로 눈 앞에 모시고도 울며 통곡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죄와 죽음 권세 아래 눈물흘리며 고통하는 인생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은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라 생각하며 한없이 슬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 볼 때 죽음은 잠시 잠들어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5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마치 자는 아이를 깨우시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 때 아이의 영이 돌아와 벌떡 일어났습니다. 깨어난 아이를 보고 사람들은 기절할 것처럼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이가 곧바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내장기관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아이는 예수님 말씀처럼 잠들었다가 일어난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궁극적인 삶의 결말이요, 인생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죽음은 잠시 쉬어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이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를 때에 우리는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듯,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탄이 심는 영적인 독입니다. 이 독을 해독시켜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남은 봄학기 주님 되신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을 붙들고 모든 두려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