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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요한복음 제16 강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한복음 15:1-27)2018-07-0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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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제 16 강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말씀/ 요한복음 15:1-27

요절/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번 여름수양회가 어떠하였습니까? 말씀과 소감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수양회 이후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줍니다. 본문에서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열매’가 8번, ‘거하다’가 10번 나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삶 가운데 잘 적용하여 수양회이후 우리 삶에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요한복음에서 많이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이것을 잘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올바로 알 때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요17:3).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1,5)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나무 세 가지가 있죠.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포도나무입니다. 그 중 나무의 왕은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다른 나무에 비해서 나무가 볼품이 없습니다. 조경수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열매는 풍성합니다. 보통 하나의 포도나무가 50송이를 맺는 데, 한 송이에 70~75개의 포도 알을 갖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계산해 보면, 한 나무는 약 3500개 정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라고 할 수 있겠죠. 참고로 전북 고창군에는 도덕현씨가 키우는 슈퍼포도나무가 있는데 무려 4000송이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포도 알로 치면 약 28만개의 열매를 맺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는 표현했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에게 붙은 사람에게 풍성하고 완전한 생명을 공급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하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거짓 포도나무, 완전하지 않은 들 포도나무들이 많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합니다. 그런 것에 붙을 때에 어떻게 됩니까? 상품가치도 없는 들 포도열매 정도 밖에 맺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참 포도나무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농부이신 하나님이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세상에 보낸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12 제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붙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가지에게 최대의 행운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되었든지 좋은 나무에 붙는 것입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 붙은 가지가 가장 큰 행운을 잡은 것이고 가장 행복한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 그리고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인생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예수님께 붙어있으나 열매 맺지 않는 가지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제거해 버리십니다. 이들은 고집과 회개치 않음으로 끝까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우기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당장에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끝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농부이신 하나님은 열매 맺는 가지가 더 열매 맺게 하려 하여 그 가지를 어떻게 하십니까? 깨끗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깨끗케 하는 것은 전정 작업을 말합니다. 전정 작업이란 포도농사에서 매우 중요한데 양분 낭비를 막기 위해서 겨울철에 두세 개의 순만 남기고 가지를 자르는 작업을 말합니다. 가지입장에서 보면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잘라버릴 때 아쉽고 아픕니다. 가지는 아프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은 매우 아픕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전정 작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망스런 가지들을 사랑하고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전정 작업을 할 힘이 없습니다. 죄의 유혹은 너무나 강하고 우리의 내면은 너무나 약합니다. 과감히 죄의 유혹을 잘라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농부이신 하나님이 친히 가지치기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심으로 가지치기를 합니다. 혹독한 시련을 만나면 죄의 소원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예수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고래 힘줄보다 더 강한 죄의 잔가지들을 과감하게 잘라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의 때에 고통만 생각하기 보다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손길을 보고 감사 찬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그 방향으로 적극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저는 한동안 목자였지만 PC방을 드나든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늦게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쉽게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PC방에서 초등학생이었던 황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JBF교장이었던 저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PC방에 가는 것을 끊게 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시편 119편에 보면 말씀의 유익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119:9절을 보면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으리이까’ 하는 질문에,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다’ 라는 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 전정 작업을 쉽게 하는 도구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말씀은 얼마나 파워풀합니까? 내 의지만으로 죄와 싸우는 것은 마치 맨손으로 적과 싸우는 것처럼 힘들고 효과가 적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붙드는 것은 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요 총을 들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시편 119편 130절을 보면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 고통을 당하고 비참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중국 춘추 전국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장터에서 어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무거운 놋쇠 항아리를 낑낑대며 훔쳐가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잡아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 사람아,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왜 이 무거운 것을 훔쳐가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도둑이 “제 눈에는 이 물건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죄의 욕심에 끌리면 옆에 숨겨진 함정과 덫과 파멸의 결과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붙들면 그런 것이 보이게 되고 과감하게 그것들을 멀리하고 잘라버릴 수 있습니다. 또 말씀은 우리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여 원수의 간계를 이기고 정말 집중할 것에 집중하고 몰두할 것에 몰두하게 만들어 줍니다. 존 파이퍼 박사가 말한 대로 성경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미리미리 불필요한 고난을 피하도록 예방적 역할을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본성과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고생하며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매주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유익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4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이 극심한 흉년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랄에 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흉년은 모든 것을 죽게 하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없는데 흉년이 든 그 곳에 단지 약속의 말씀 하나만을 믿고 거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여리고 깨어지기 쉬운 우리 자신을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단단히 그리고 완전히 붙이는 것을 말합니다. 가지가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물과 양분을 의지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양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입니다. 반면에 ‘거하는 척’ 시늉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차가운 철봉에 붙어있는 것처럼 예수님께 붙어 있습니다. 그는 별로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유혹에 마음이 팔려서 예수님을 놓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좋은 줄 알지만 세상의 더 좋아 보이는 것에 마음이 팔렸습니다.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끝없이 방황하며 떠돌다 일주일에 한번 정신을 차려보지만 역부족입니다.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르죠? 종교생활 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만약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가지의 생명과 열매 맺는 것은 포도나무에 의해 전적으로 의존되며 결정됩니다. 혹 우리 중에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일방적인 희생이나 헌신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억압이나 뭘 못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반대입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무한한 자유를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희생과 헌신의 결단을 받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풍성한 생명의 샘물이 한없이 솟아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라” 이 말씀은 부담스러운 명령이 아니라 참으로 은혜롭고 유익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 열매를 많이 맺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보통 포도나무가 3500개의 열매를 맺고 28만개의 열매를 맺는 것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 붙어있어 그 생명을 공급받는 그 사람은 상상이상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도 열매를 많이 맺던데~’하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열매는 농부가 인정하는 것만 열매이듯이 우리가 열매처럼 생각하나 하나님이 보실 때 열매로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이름처럼 세상 사람들 가운데 크게 성공한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는 명예와 권력과 부와 존경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참혹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는 아직 인생을 출발하지도 못한 사람, 즉 태어나지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과 포도나무를 기르는 농부이신 하나님이 보는 눈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번에 한국정치사를 풍미했던 풍운아 김종필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묘비에 몇 문장을 미리 새겨놓았는데 그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90세를 살아보니 89세까지 이룬 것이 없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 33세에 십자가를 지고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예수님과 참으로 대조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생의 진정한 열매,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맺어지는 열매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의 가장 큰 열매는 영생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미래에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소유할 것을 보증하는 수표나 티켓정도도 아닙니다. 지금 소유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가 소유하게 된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큰 거봉같은 열매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잃어도 가장 큰 부자요 가장 부유한 자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열매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22,23절을 보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노력이나 결심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성령께서 나의 내면에 맺게 하시는 내적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들이 잘 맺힌 사람들을 보면 작은 예수를 보는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도의 열매도 생명의 열매로서 값지고 중요합니다. 예수님께 정말로 붙어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새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데 쓰임을 받습니다. 그가 살아있기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가장 값진 외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명예와 부와 권력과 자기만족보다도 훨씬 더 값어치 있고 영원히 남는 열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의 전도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감사를 표할 때 우리는 얼마나 기쁠까요? 영원한 보람과 감동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또한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다 받게 됩니다. 와! 참으로 흥분되게 하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체험한 대표적인 사람이 죠지뮬러입니다. 그는 일생 약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100퍼센트 응답받는 삶을 살게 된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는 항상 먼저 말씀을 읽고 말씀이 주는 약속에 따라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에 기초해서 회개할 것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주는 상상력에 따라 기도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가 상상했던 그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지난 UBF역사에서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도 우리 공동체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농부가 죽도록 애써서 땅을 파고 잡초를 제거한 후 나무를 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시계는 시간을 가르쳐 주라고 만든 것입니다. 자동차는 굴러가라고 만든 것입니다. 바늘이 돌아가지 않는 시계,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냉장고가 냉장고 구실을 못하면 돈까지 지불하고서 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고장 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늙었다거나 가난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니까 혹여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작사자인 제인 크로스비는 생후 6개월 때 의사의 잘못으로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앞을 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와 같은 수 많은 찬양곡을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또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전파하여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초첨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친구 관계라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친구관계로서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동반한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친구인 제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 상호간에도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열매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여 세웠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주권적 택하심을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으사 열매를 맺게 하시고 그 열매가 항상 있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다 받도록 하십니다.  

저는 대학생 때 로버트 멍어가 쓴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이란 소책자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모시고 그리스도인이 된 주인공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 나가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주님과 교제하기로 약속해 놓고는 약속을 잊고서 며칠 동안 빼 먹고 소홀히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급히 집을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응접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벽난로가 지펴져 있었고 예수님이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머리를 긁적이며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죄송한데요. 아침마다 여기에서 저를 기다리셨나요?” 그러자 주님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매일 아침 여기에 왔었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기억해 주면 좋겠구나. 나는 막대한 값을 치르고서 너를 구속하였단다. 나는 너와 교제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를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갈망하십니다. 왜 남녀가 만나 결혼합니까? 대화하고 즐거움을 누리고 사랑의 친밀한 사귐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친밀한 사귐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택한 것입니다. 매일 아침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 분과의 사귐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고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세상이 그들을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박해를 받았기에 그 친구인 제자들도 당연히 박해를 받습니다. 박해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인 것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 때문에 제자들을 박해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도우십니다. 이를 통해 박해자들도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생명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과 풍성함과 기쁨과 온갖 좋은 모든 것들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이러한 것들을 누리고 열매 맺기 위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학생들은 방학기간 말씀 안에 거하기를 힘쓰면 좋겠습니다. 특히 소감은 말씀 안에 거하도록 하는 UBF의 좋은 도구입니다. 이번 수양회에서 소감을 쓸 때 즐거움이 있지 않았나요? 발표된 소감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 매주 깊이 있는 소감을 통해 주님과의 연합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목자님들은 말씀생활, 기도생활, 신앙생활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친밀한 연합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이성적 사고로 묵상하고, 감정을 사용하여 친교를 갖고,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영적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