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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20 강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누가복음 11:33-54 )2017-06-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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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누가복음 20강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말씀 누가복음 11:33-54 
요절 누가복음 1: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오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또 주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도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곧 영적인 시각 장애우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혹시 나는 그러한 시각 장애우는 아니었는지 깨닫고 마음의 눈을 새롭게 여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서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당시 팔레스타인의 집 구조는 온 집안을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위치에 등경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등불을 두었습니다. 등불을 켜서 움(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어 비바람이나 추위를 막아 겨울에 화초나 채소를 넣어 두는 곳) 속에 감추어두거나 말(곡식, 액체, 가루 따위의 분량을 되는 데 쓰는 그릇) 속에 넣어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같이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면 비록 밖은 캄캄한 밤일지라도 어머니는 뜨개질을, 아버지는 성경읽기를, 자녀들은 공부를 하거나 여러가지 놀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요즘 면접관들은 취업준비생들에게 면접이 천냥이면 자신감은 구백냥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본래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죠. 현재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법에 의하면 청각 장애, 언어 장애, 안면 장애, 신장 장애, 뇌전증(간질)에는 1급이 없습니다. 1급은 그 장애로 인해 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의 경우 2급부터 인정받을 수 있고, 말을 할 수 없는 언어 장애의 경우 3급부터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신장을 이식받은 경우도 2급부터 시작합니다. 이에 비해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시각 장애는 곧바로 1급으로 인정됩니다. 그만큼 눈은 우리 몸의 각 기관 중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눈이 성하여 빛을 잘 받아들이면 다른 몸의 모든 기관들도 다 밝아지고 건강하게 기능을 하게 됩니다. 뇌도 밝아져 뇌의 기능을 100% 발휘할 수 있습니다. 손도 밝아져 콩나물 시루같은 악보에 기록된 작곡가의 아름답고 섬세한 소리를 피아노 건반 위에서 완벽하게 표현해낼 수 있습니다. 현대 로보트학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로보트가 계단을 오르내리도록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 50-80kg의 몸체의 운동속도와 무게중심을 0.1초 단위로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고 계단의 높이가 조금이라도 달라져 계산이 어긋나면 로보트는 앞이나 뒤로 넘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발은 눈만 밝으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고 심지어는 뛰어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어두워지면 발은 계단을 뛰어나니기는커녕 한 치 앞을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손은 자기가 가진 대부분의 능력을 사장당한 채 눈 대신 사물을 하나하나 만져보는 일을 평생 하게 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이 비유의 결론으로 예수님은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하셨습니다. 눈이 어두워지면 온 몸이 다 어두워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이 밝으면 그 마음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밝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도 밝고, 감정도 밝습니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판단력도 정확합니다. 마음이 밝으면 인생이 밝고 행복합니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을 힘써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이 어두워지면 어떻게 됩니까? 가장 먼저는 생각이 어두워지고 부정적이 되고 편협해집니다. 감정도 따라서 어두워집니다. 통제 불능의 분노, 우울감, 절망감이 찾아옵니다.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우울증, 불면증, 분노조절장애 등은 다 그 마음의 빛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마음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워진 것은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떨 때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까? 
 
첫째, 지나치게 가까운 것만을 바라볼 때에 어두워지게 됩니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광활한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들을 살피며 그 양 너머의 지평선의 끝자락과 하늘 위의 구름을 바라보는 생활을 합니다. 그 결과 그 시력이 수백미터 떨어진 곳의 작은 참새를 볼 수 있는 수준인 5.0-6.0에 이른다고 합니다. 어떤 한 몽골인이 요즘 눈이 침침하고 잘 안보인다고 해서 시력측정을 해 보았더니 3.0이 나왔다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기 어려운 일화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먼 곳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고층건물들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등장하여 이제는 코앞만 보고 살아갑니다. 스마트폰만 쳐다보다가 하수구에 빠지는 사람, 광고판에 머리를 찍는 사람, 인도에 있는 차량 진입 방지용 돌에 부딪혀 까진 무릎을 부여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현대인들은 마음의 시선을 지극히 가까운 곳에 둡니다. 이번 방학을 어떻게 짜릿하게 놀면서 보낼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졸업 후 어떻게 취업할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한 주간 열심히 일하고 이번 주말 어떻게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그 결과 마음의 눈이 지독한 근시가 됩니다. 자기 삶의 끝자락에 무엇이 있을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이 있는데 앞에 적혀진 경고 표지판을 보지 못하고 용감하게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고급 승용차와 같습니다.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은 이와같이 근시안적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잔칫집(파티장)에 가는 것보다 장례식장에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청년의 때에 내 삶의 끝을 미리 충분하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면 기분 나쁘다고 인상을 찌푸리며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죽기 직전에 생각하는 것은 너무 늦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는데 다른 일을 하다가 시험 시작하기 직전에 어떻게 대비할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험준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 중대한 시험의 출제자가 직접 만든 출제경향과 모범답안집이 있다면 얼마나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할까요? 보물 1호로 여기고 그것을 숙지하고 또 숙지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 모든 청년들, 우리 모든 인생들이 죽음 이후 치루어야 하는 최후의 시험문제에 대해 아주 자세히 예상 출제 문제들과 그 모범답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청년의 때에 이 성경을 늘 숙지하며 읽고 또 읽으면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영적 시력이 마이너스 6디옵터의 지독한 근시에서 1.0 이상의 좋은 시력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저는 지난 주 마태복음 말씀을 정독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 어떤 복음서보다 천국에 대한 비유가 풍성하였습니다. 이 비유들을 읽으면서 저는 정말 천국 입시문제를 치루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문제들에 대해 제 자신이 얼마나 준비가 미흡한가 깊이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준비할 시간이 다소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허비할 틈이 없음을 깊이 인식하고 천국 입시 준비를 전심전력으로 감당하고자 하는 결단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나아온 우리 청년들, 또 목자님들이 성경을 열심히 읽는 가운데 마음의 눈의 시력이 밝아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많은 현대인들이 자기 눈 앞에 펼쳐져 보이는 그 상황만을 바라봄으로 근시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둡고 절망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어둡고 절망적인 그 사건, 그 상황만을 바라보면 내 마음은 너무도 어둡고 절망적이 됩니다. 너무 암울하고 너무 답답하여 죽을 것만 같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마음의 눈을 들어 이 절망적인 상황 너머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에 눌어붙은 마음의 눈을 들어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상황만 바라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을 통해 우리 안에 더 큰 선을 이루시고 마침내는 승리를 주십니다.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결코 현실의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위대한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어려움과 동일한 아니 더 큰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만 바라보지 않고 눈을 들어 문제 너머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고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로 영원히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현재 어려움 가운데 계십니까? 문제 가운데 있습니까? 눈을 들어 그 문제 너머에 살아계시는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무언가가 마음의 눈을 가로막고 있을 때 마음의 빛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사탄의 힘을 덧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얼토당토않는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의 눈이 예수님에 대한 시기심, 또 돈에 대한 사랑, 권력에 대한 욕망 등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의 눈이 막혀 있습니까? 가장 근본적으로는 죄에 눈이 멀어있습니다. 죄는 마음의 눈을 멀게 하는 영적인 백내장입니다. 반복하여 죄를 지을 때 눈의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급기야는 시각 장애우가 되고 맙니다. 
 
많은 청년들이 정욕과 음란의 죄로 인한 영적 백내장에 걸려 눈이 멀어가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삼손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육감적인 외국인 여자 들릴라에게 빠져 하나님의 사명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 힘의 근원이 평생 머리카락에 칼을 대지 않는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에 있다는 사실을 들릴라에게 고백하고 말았고 결국 머리카락이 밀린 그는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힘을 잃은 그를 원수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양 눈알을 뽑고 감옥에서 끝없이 물레를 돌리는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욕을 즐기던 그의 두 눈이 뽑혔을 때 비로소 그의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힘과 재능, 인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뽑힌 그의 두 눈에서 굵은 참회의 눈물, 회개의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머리는 점점 다시 자라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제압한 기념으로 다곤 신전에서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 자리에 삼손을 불러 재롱을 떨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삼손은 다곤 신전을 붙들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진실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고 나의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에게 이 원수를 갚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다곤 신전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삼손은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삼손처럼 많은 청년들이 젊은 시절 정욕과 음란으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실존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참하게 망가지고 나서 주께 돌아오기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이 두 말할 나위없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또한 여러 청년들이 무관심과 게으름으로 인해 눈이 멀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이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가는 세월입니다. 두 번째가 자식입니다. 세 번째가 졸린 눈꺼풀입니다. 이와같이 영적인 무관심과 게으름으로 영혼의 잠을 자고 있는 청년의 경우 그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거의 원더우먼과 같은 초인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과연 누가 이 잠에서 그를 깨울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는 잠든 그를 반드시 깨우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가진 목자가 필요합니다. 또 그의 영혼에 천둥벼락을 치셔서 그를 깨우시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기심도 청년의 눈을 가로막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비유하자면 눈동자가 밖을 향해 있지 않고 안으로 뒤집혀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의 시선은 늘 자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병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밖에서 볼 때 허연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기괴한 일입니까! 이와같이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결코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긴급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회개의 수술, 다시 태어남의 수술을 통해 뒤집힌 눈동자를 돌려놓아야 합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돈을 사랑하는 마음도 눈을 멀게 합니다. 가룟 유다가 30개의 은전에서 퍼져나오는 반짝거리는 그 빛을 보았을 때 그는 더 이상 샤론의 꽃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은은한 아름다움의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혹 우리의 눈은 무언가에 멀어있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마음의 빛이 거의 완전히 꺼져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입니까!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눈이 무언가에 멀어있다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회개하여 돈을 사랑하는 마음, 이기심, 무관심과 게으름, 정욕의 죄를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찬란한 빛, 생명의 빛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이와같이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리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되신 주님을 보게 되면 우리 안에 조금도 어두운 곳이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우리 안에서 밝게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매력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이 예수님의 향기와 빛을 온 세상에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모시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경건한 자세로 손을 씻음으로 외출한 후 집에 올 때 반드시 해야 하는 정결예식을 행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예수님께서도 손을 씻을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식사 자리에 바로 앉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39-4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가정 주부들이 설겆이를 할 때에 잔과 대접의 겉과 속을 씻습니다. 이때 주부들이 더욱 신경을 쓰는 부분은 잔과 대접의 속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름기가 남아있지 않은지, 몸에 해로운 세정제가 남아있지 않는지 손으로 구석구석 만져서 부득부득 소리가 날 때까지 물로 헹구어내고 확인 또 확인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겉을 대충 씻는 것은 아닙니다. 겉을 대충 씻었다가 귀한 손님을 모셨는데 구석에 작은 고춧가루나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 수 있는 눌어붙은 투명한 밥알이 붙어있다면 얼마나 큰 실례이겠습니까! 
 
이와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먼저 중요한 부분은 속입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든지 탐욕과 악독으로 더러워집니다. 이 탐욕과 악독을 제거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나에게 있는 재물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구제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내 마음에 흐르고 또 내 마음 벽에 눌어붙어있던 세상 욕심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 탐욕도 한꺼번에 쓸려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속이 중요하다고 해서 겉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겉은 신앙생활의 눈에 보이는 부분들, 곧 십일조 드리는 것,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넓게는 공동체적으로 약속된 모임 등에 신실하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내 마음과 삶을 다 주께 드렸으니 십일조나 예배, 공동체적으로 약속된 모임 등을 들쭉날쭉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받으시는 만찬은 정성스럽게 준비된 음식과 동시에 깨끗한 그릇입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을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지만 동시에 그 마음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주께 드려야 합니다. 
 
4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한 선교지의 지부장 사모님이 한국인들과 달리 현지인 리더들이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분은 너무 힘들어 용감하게 현지인 리더들에게 왜 나를 존중하지 않는지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 돌아온 답이 “Esther, you have to earn your respect.”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 답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미국인들이 정말 존경할만한 선교사가 되기에 합당한 내면적 투쟁을 하고자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리더가 되면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존중과 더 나아가 존경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리에 있다고 자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존경 자체를 목적으로 일할 때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삶의 열매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리더로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이 청년 대학생들의 존경입니다. 청년 대학생들은 비판적이고 이상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사회 생활을 어느 정도 경험한 양들은 리더가 좀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사람이 완벽할 수 없지 하면서 이해해 줍니다. 그러나 청년 대학생들은 날카롭고 예리합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이러한 청년 대학생들을 섬기는 사명을 맡은 우리 목자님들은 그러므로 더욱 깨어서 영적인 투쟁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했을 때 진실한 마음을 담아 잘못했다고 하면 됩니다. 청년 대학생들이 또 그럴 때는 쿨합니다. 겉으로는 목자님을 비판해도 속으로는 그런 목자님을 존경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청년 대학생들의 진정한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영적 투쟁을 하나님 앞에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평토장한 무덤 위를 지나가는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밟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실상은 그 아래에 시체가 썩고 있으며 온갖 벌레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의 겉모습만 보고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깊은 내면을 다 보시는 하나님은 바리새인들 안에 시기심과 탐욕 등의 죄가 마치 흉악한 모습을 한 벌레들처럼 우글거리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신랄하고도 준엄한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들은 한 율법 교사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이에 예수님의 준엄한 말씀이 이번에는 율법교사를 향하였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율법교사들은 수없이 많은 법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그것을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수없이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외국인을 시켜 일을 하도록 하는 등 교묘하게 빠져나갔습니다.
 
47-48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그들은 과거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다가 죽은 첫 순교자입니다. 사가랴는 당시 유대인들이 보던 구약성경의 배열상 맨 마지막 책인 역대하에 나오는 순교자입니다. 사가랴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제 율법사들은 그때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만약 과거 살아있었다면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 23:30) 그러나 그들은 지금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죄를 준엄하게 지적하시는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내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더라면 빌라도처럼 재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는 무리 중에 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이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에 내몬 빌라도입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친 간악한 무리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 죄로 인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번 수양회 통해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인 것을 깊이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만나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넘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0-5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이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선지자를 죽인 그 죄값을 그 세대에 받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선지자를 돌로 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무서운 죄값을 다 받게 됩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율법 교사는 말씀을 맡은 자로서 천국에 들어가는 지식의 열쇠를 가진 자입니다. 그들은 그 자신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회개와 죄사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의 열쇠를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이 우리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우리 속의 빛이 어두워져 있을 수 있습니다. 혹 그렇게 되어있지 않은지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샤론의 꽃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주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깊은 마음의 감동, 혹은 떨림, 경건한 두려움이 없다면 경각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주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아 회개하고 또한 회개한 심령에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아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빛을 충만하게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