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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성탄 1강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25)2017-12-1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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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성탄 1강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말씀 이사야  7:1-25

요절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 성탄 1강을 통해서 우리가 임마누엘 주님이 주시는 성탄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아하스입니다. 아하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웃시야 왕의 손자요, 요담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재위 2년 곧 BC 734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람의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유다를 공격해 왔습니다. 당시는 앗수르가 쇠퇴하는 것처럼 보이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앗수르의 속국으로 시달리던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각각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며 동맹하여 반 앗수르 전선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 앗수르 전선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남유다를 치러 왔습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루트로 유다를 쳤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특별히 북이스라엘은 남 유다의 요인들 총리대신, 궁내대신과 왕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12만 명의 용사를 죽이고 10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가 함께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공략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산성이요 요새화되었기 때문에 쉽게 공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때 유다 왕 아하스와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습니다. 마음이 심히 불안해하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만약 중국과 북한이 동맹하여 전쟁을 도발하여 강원도가 함락됐고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하면 서울시민인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심히 불안하고 두려워 안절부절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 하나님은 그의 종 이사야를 보내사 아하스와 백성들을 어떻게 위로해주셨습니까?


첫째로 스알야숩과 함께 가서 아하스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스알야숩은 이사야의 첫째 아들로서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 속에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유다는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로 징계적 환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환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고 소망가운데 키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아하스를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만나게 하십니다. 세탁소는 더러움을 정결하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서 아하스와 유다를 정결케 하십니다. 우리가 징계의 의미를 깨달을 때 아주 망할까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훈련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삼가며 조용히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삼간다는 것은 신중하다는 의미입니다. 곧 아하스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호들갑을 떨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아하스가 어떻게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까? 이사야가 아하스를 만난 곳은 윗못 수도 끝이었습니다. 아하스는 아람, 북이스라엘 동맹군의 2차 공격을 대비하여 기혼 샘의 물을 예루살렘 성으로 끌어들이는 수로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외교적으로 강대국 앗수르를 끌어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지 못하므로 불안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뭔가를 하는 것을 영적인 호들갑이라고 합니다. 이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하스에게 있어서 르신과 베가는 무서운 사자나 호랑이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두려워말며 의기소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아하스의 눈에 벌겋게 타오르는 불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연기를 낸다는 것은 꼭 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으르렁거리지만 한마디로 종이호랑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워하고 낙심하는 것을 원치 않는 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나옵니다. 그 만큼 우리는 매사에 두렵고 조그만 일에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하지만 이유를 알고 순종하면 좋겠지요.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깊이 배우고 담대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현재 아람과 에브라임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은 유다를 쳐서 쓰러뜨리고 아하스 대신에 반 앗수르파인 다브넬의 아들을 새 왕으로 세우고자 합니다. 이것을 이사야가 알고 있는 것을 볼 때 아마도 1차 침공 때 랍사게처럼 공공연하게 그것을 선포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하스는 다윗 왕조가 무너질까봐 노심초사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두려워하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 왕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사람의 어떤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의 도모를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두 왕의 나라가 결코 유다를 이길 수 없음을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고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베가입니다. 여기서 머리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강함이 결정됩니다. 그 나라가 서고 무너짐이 결정됩니다. 왜 르신과 베가가 예루살렘을 결코 정복할 수 없습니까?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머리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예루살렘을 결코 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됩니까? 북이스라엘은 65년 후 재건 불능의 상태가 됩니다. 북이스라엘은 지금으로부터 12년 후에 망하지만 65년이 되면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에 혼혈정책을 시행합니다. 혼혈정책은 민족의 정체성을 없애 버리는 무서운 정책입니다. 이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북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어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이제 하나님은 남 유다 왕국이 견고하게 설 수 있는 중요한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9b를 보십시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이 문장은 이중부정으로 어떤 사실을 강조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나라가 굳게 섭니다. 하나님을 굳게 의지해야 개인과 공동체가 견고하게 섭니다. 현재 아하스 왕은 인간적인 방책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강대국인 앗수르를 의지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변심하고 유다를 공격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할 때 근시안적으로는 잠간 잘되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망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당장에는, 얼마동안에는, 때론 수년 동안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굳게 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날 동안 하나님만을 견고하게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아하스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제의를 하십니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징조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적적 사건입니다. 징조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하나님이 은혜가운데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앞 다투어 징조를 구합니다. 징조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일 수 있기에 사실 징조를 구할 때 조심스럽게 구합니다. 기드온은 조그마한 양털 징조를 구하면서도 겸손히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어떤 징조를 구해도 좋다는 아주 파격적인 제의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마디로 No thank you 였습니다.


그러면 아하스는 왜 징조를 거절했을 까요? 그가 정말 믿음이 좋아서 이었다거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불경건하다고 생각되어 그랬다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며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징조를 구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지독한 불신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철저한 냉소주의 자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사는 자를 비웃고 어리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우상, 보이는 강대국만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수로공사는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 성전을 찾기보다는 앗수르 왕을 만나고자 먼 다메섹까지 발품을 팔아 갔습니다. 그는 명목상 유신론자였지만 실제적 무신론자였습니다.


동맹군의 1차 침입이라는 큰 환란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대한 그의 불신은 더욱 굳어갔습니다. 그는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자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1차 동맹군의 침입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환란이요 징계였습니다. 지독한 우상숭배자였던 아하스와 그의 영향을 받은 유다왕국를 새롭게 하시려는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곡해하여 불신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 있으면 환란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더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불신의 이유로 삼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것을 통해서도, 저런 것을 통해서도 믿음을 배우지만 불신의 사람은 반대입니다. 우리가 축복뿐 아니라 징계를 통해서도, 성공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도 믿음을 배우고 모든 것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는 사람입니다. 성공해도 믿음으로, 망해도 믿음으로 망합니다. 왜 이처럼 믿음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 없이 현실적인 대책을 잘 세워 성공합니다. 그러나 스펄젼은 “믿음 없이 성공하면 그것은 저주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사람이 어찌하든지 믿음으로 살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도 아하스처럼 손에 쥐는 것에는 열심이고 집착하지만 믿음의 일에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아주 쿨합니다.


믿음 없는 아하스에 대한 선지자의 한탄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아하스는 학정으로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괴롭히다’ 는 말은 ‘인내심을 시험하다’는 뜻입니다. 아하스는 믿음이 좋았던 다윗 왕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이 1도 없습니다. 지독한 불신의 사람입니다. 믿음 온도로 하면 – 200도입니다. 이런 그는 하나님을 탄식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믿음이 없는 것을 최대한 참고 돕는 데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호의마저 내팽개쳐 버립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은 믿음의 삶에 대해서 코웃음 치는 아하스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예라 너 같은 놈은 더 이상 못 돕겠다. 네 맘대로 살다가 죽어라”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랭이를 입안에 넣고 꿀꺽 삼키듯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징조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하스에 대한 놀라운, 초월적인 인내입니다. 한계가 없는 사랑입니다. 끝없는 은혜입니다. 판단과 정죄를 뛰어넘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아하스같은 죄인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징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14). 이 예언은 중첩예언으로 이사야 시대에 이루어졌고 나중에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당시 한 아이의 탄생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아하스와 유다왕국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징조가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인류역사에 수많은 하나님의 징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징조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동정녀를 통해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 시대에 태어난 징조의 아이가 선악을 분별하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 유다백성은 버터와 꿀을 먹습니다. 또 그 때쯤 두 왕의 땅이 황폐해집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나이는 2-3살이라 보기 하고 12-13살로 보기도 합니다. 하여간 이 아이가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유다의 상황은 전시상황입니다. 하지만 그 무렵에 유다를 괴롭힌 두 왕의 나라가 황폐해 집니다. 이 예언대로 아람은 2년 후에 완전히 망하고 북이스라엘은 3년 후에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황폐해지고 12년 후에 망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보다 끝까지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는 길을 갑니다. 이렇게 끝내 믿음보다 불신에 기초해서 살았을 때 그들은 현실적으로 잘 되었습니까? 그들은 남북유다가 나누어진 이래 가장 큰 고통, 수치, 황폐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이 선택한 앗수르가 도와주는 척하다가 변심합니다. 앗수르가 디글랏 빌레셀 때, 산헤립때 유다를 침공하여 국토를 유린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럽든지 벌에 쏘이는 것 같습니다. 많은 물질을 투자하여 앗수르를 의지하였건만 결과는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믿음 없이 선택한 결과가 최후에는 얼마나 고통스런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지를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된 평강을 얻는 비결입니다. 사람이 평화를 얻기 위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여러 현실적인 대책을 세웁니다. 그러나 그래도 근본적인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두려움문제가 있습니다. 북한이 언제 핵전쟁을 도발할지 모릅니다. 미국까지 날아가는 미사일을 개발한 마당에 한국은 수분 안에 초토화될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은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고 선언함으로서 모든 중동나라들을 격동시켰습니다. 평화는 깨지고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문을 열었다는 무시무시한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지, 취업할 수 있을지, 결혼은 할 수 있을지, 가정은 잘 먹여 살릴 수 있을지 염려됩니다. 직장에서 잘리지 않을 까 염려합니다. 자녀들이 지금은 잘 자라지만 사춘기에 삐뚤어지고 탈선할까 걱정됩니다. 병에 걸리지 않을까,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낚싯배를 탔다가 익사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이런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이 뭘까요? 바로 임마누엘의 징조를 붙드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진정한 완성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평안을 얻습니다. 심지어 죽음도 이 평안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불안한 상황은 계속됩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납니다. 우리 인생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항상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삶을 반복하여 살 수 밖에 없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근본적인 평화가 깃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소유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며 일희일비하고 있습니까? 이제 임마누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을 누리기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임마누엘의 은혜는 어떤 죄인도 참고 섬기시는 사랑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를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참으시고 그에게 임마누엘의 징조를 일방적으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평생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기에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참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항상 참아주셨습니다. 그를 성마태의 소망가운데 키우셨습니다. 레위는 후에 이런 자신을 감당해 주신 분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더욱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성탄을 한마디로 “임마누엘”이란 단어로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도 충성스럽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제자 중에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여자 종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낙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사명을 등졌을 때도 그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따뜻한 숯불 사랑으로 섬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인, 연약한 자도 참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사야의 주님이 아니라 아하스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임마누엘의 사랑이 우리를 이끄시기에 연약하고 허물진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하스처럼 수없이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이고 정욕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참지 못하고 판단 정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삶에 회의를 품고 두려워하고 낙심하며 현실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참아 주셨습니다. 무한인내로 임마누엘 해주셨습니다. 한해도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감당해주시고 임마누엘 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임마누엘의 은혜로 주위의 동역자들을 감당하고 양들을 감당하고 자녀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