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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열왕기상 6강 '금송아지를 만든 여로보암 '(열왕기상 12:1-14:20)2018-11-12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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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상 6강 



금송아지를 만든 여로보암



말씀 열왕기상 12:1-14:20

요절 열왕기상 12:28,29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인생에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길과 완전히 부정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길에도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다윗의 길, 여로보암의 길입니다. 오늘 북이스라엘의 시조였던 여로보암이 어떤 길을 걸었기에 그와 그의 가문과 북이스라엘이 비참하게 되었는 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여로보암의 길을 회개하고 온전히 다윗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르호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중심도시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은 애굽에 망명중인 여로보암을 불러 들여 그를 백성의 대변인으로 삼아 르호보암에게 요청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르호보암의 아버지 솔로몬 왕이 백성들에게 무겁게 멍에를 지웠는데 이제 르호보암은 아버지와 달리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좀 가볍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성있는 호소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왕을 잘 섬기겠다고 다짐했습니다(4).


르호보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참모들과 의논하고자 하였습니다. 먼저, 르호보암은 아버지를 모셨던 나이든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7) 그들은 왕이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서번트 리더십을 제안한 것입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섬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자발적인 충성과 헌신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왕은 군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율법에도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 17:20) 예수님도 만왕의 왕이시지만 종이 되어 제자들을 섬기고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목숨까지 바쳐 섬기심으로 그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주님을 영원히 섬기게 되었습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약해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강한 리더십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결속력 있고 견고한 공동체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조언 보다는 자신들과 함께 자란 젊은 참모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조언했습니까?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10b,11) 그들의 조언은 첫째로 왕의 크고 강함을 과시하고 둘째로는 더 무섭고 강하게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삼 일 후에 여로보암과 백성들이 왔을 때 르호보암은 젊은이들의 자문을 따라 포학하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14)” 그는 겸손히 요청하는 백성들에게 군림하는 정치, 공포정치를 예고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였을 때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이 무슨 말을 하며 르호보암에게서 돌아섰습니까?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16)” 이 말을 하고 그들은 르호보암 섬기기를 그쳤습니다. 부부가 등 돌리면 남남이라고 북쪽 지파들과 다윗 가문은 남남임을 선언했습니다. 왜 이런 선언을 한 것입니까? 다윗왕조를 섬겨봤자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상호적이고 서로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생만 죽도록 하고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판단되니 더 이상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잘 해보고자 결심했습니다. 


이제 다윗이 속한 유다지파만이 르호보암을 따랐습니다. 처음에 르호보암은 북쪽 지파들을 다시 되돌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역군의 감독이었던 아도람을 보냈더니 글쎄 그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르호보암은 그제야 현실을 직시합니다.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은 르호보암이 아닌 여로보암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미련을 못 버린 르호보암은 군사를 일으켜 이스라엘과 싸워 물리력으로 그들을 복종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를 통해 북이스라엘 지파들과 싸우지 말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10지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르호보암의 훌륭한 점이 무엇입니까? ‘내려놓음과 포기’입니다. 누구나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10지파가 가고 자신이 두 지파만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영접하고 두 지파 섬기는 일에 충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순종을 기뻐하시고 후에 북왕조에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남하하여 그를 돕게 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르호보암의 이름의 뜻이 ‘백성을 창대하게 하는 자’, 즉 ‘백성들의 숫자를 많게 하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릇이 작아 많은 백성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그릇이 크다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소리를 넓은 마음으로 경청하는 것입니다. 많은 백성을 섬기는 큰 지도자가 되려면 백성들을 어거지로 순종하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좁은 내면을 키워야 합니다. 저도 속이 좁은 자인데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섬기는 넓은 내면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북왕조의 첫 시조였던 여로보암은 그 나라를 어떻게 경영했습니까?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이 믿고 신뢰하던 부지런한 사람이요 백성들의 마음을 잘 읽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10지파를 떼어 주셨고 그가 다윗의 길을 걷는다면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먼저 여로보암은 나라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과 요단강 동편의 브니엘을 견고하게 건축했습니다. 이 두 도시는 초기에 북이스라엘의 거점 도시들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견고하게 하려던 여로보암에게 무슨 염려가 들어왔습니까?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26) 북왕조에 속한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의 집인 남왕조로 기울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 곳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신 12:5,6)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에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있습니다. 소위 중앙성소사상인데요. 이런 명령을 주신 이유는 여호와 신앙이 각 지파별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위함이었습니다. 이 율법때문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왕조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갈 것입니다. 그곳을 오가다보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남왕조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조요 남왕조의 왕이 진정한 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남왕조로 남하하는 이들이 생기고 심지어 그 옛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인 레갑과 바아나처럼 자신을 죽이고 남왕조로 투항할 사람들도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때 하나님이 선지자 아히야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번성케 하고 견고케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대범하게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 가도록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예컨대, 일 년에 세 차례 성전을 찾을 때 전세버스를 무료로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전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곳곳에 성전을 향한 기도의 집들을 세워줄 수 있었습니다. 성전은 하나지만 율법은 복사해서 얼마든지 나누어줄 수 있기에 중요한 도시에 말씀의 집을 지어 말씀교육에 힘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북왕조를 복주시고 남왕조를 능가하여 남왕조도 품고 섬기는 큰 나라가 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고 대신에 인간적인 계획들을 세웠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그는 남북왕조 사이에 38선을 긋고 북왕조 사람들은 남왕조에 갈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북왕조 땅에도 예배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 됩니다. 그는 두 예배처에 금송아지들을 세우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신 곧 여호와라고 말했습니다. 


애급의 아피스신과 근동의 바알신의 모습이 황소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신하면 황소의 형상이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사람들이 익숙한 황소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 하나를 만들려면 약 1405억 원의 어치의 금이 든다고 하는 데 이 황금송아지들은 생명없는 우상이지만 가히 사람들의 마음을 끌만 하였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여로보암의 행동에 대해서 열왕기서 저자는 뭐라 코멘트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여로보암의 행위가 왜 죄가 됩니까? 


첫째로 십계명 1,2 계명을 어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 1,2 계명은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제 1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제 2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은 어떤 신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금송아지가 아니라 강하고 자애로운 인간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도 안됩니다. 어떤 아름다운 모양으로 만들어도 결국 무한하신 하나님을 심히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하나님을 만들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든 것은 신앙을 천박하게 만드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둘째로 왕으로서 우상숭배를 조장하여 많은 백성이 그릇된 길로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왕은 백성의 지도자로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선동하고 조장할 때 웬만한 백성들은 다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왕이 두렵기도 하고 왕은 지도자로서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의 악영향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전 국민이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로 하면 백두산 정도에 해당하는 단까지 가서 경배하는 헌신적 우상숭배자들도 나타날 정도였습니다. 먼 곳에 가면 더 신령하고 헌신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전역을 완전히 우상숭배로 물들게 했습니다. 


31절을 보면 여로보암은 많은 산당들을 지었습니다. 제단도 두 개를 만들어 예루살렘을 숫자로 압도하려 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곳곳에 산당들을 지었습니다. 이로 인해 멀리 예루살렘까지 힘들여 가지 않아도 사람들은 엎어지면 코닿는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동방박사들처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참 경배의 대상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편하게 예배드리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록 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 속에 있는 편의주의를 자극하여 하나님중심적인 예배가 아니라 내편한대로 예배를 조장했습니다. 


또 여로보암은 율법이 명한 레위 제사장들 대신에 아무나 제사장이 되게 했습니다. 역대하에 보면 송아지 1마리와 염소 7마리를 내면 제사장직을 살 수 있었습니다.(대하 13:9) 그는 당시 가장 중시되던 장막절 7월 15일 대신에 비슷한 8월 15일 절기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자신이 직접 대제사장처럼 분향도 했습니다.(13:1) 


여기서 우리는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갑니다. 여로보암은 종교적인 열정을 발휘하여 금송아지와 많은 산당들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불신에 비롯된 것이고 자기 왕권이 흔들리지 않고 자기왕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정치적 종교행위였습니다. 그러니 그 금송아지 신앙의 정체는 사실상 여로보암 숭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묘한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으나 사실은 자기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을 이용할 뿐이고 최종목적은 자기입니다. 그의 꿍꿍이 속은 항상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잘되는 것입니다. 즉 여로보암 종교를 섬기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나의 기분, 나의 편의, 나의 영광에 맞춥니다. 그의 종교적 열정은 자기를 위함이고 자기가 드러나지 않으면 푹 꺼져버립니다. 내가 신앙의 목적입니까? 하나님이 목적입니까? 우리가 여로보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을 회개하고 참된 여호와 신앙을 가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로부터 벧엘 제단에 도착했습니다. 벧엘 제단은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 만나 서원기도한 후 나중에 단을 쌓은 순수하고 유서 깊은 신앙제단입니다. 이런 벧엘 제단이 금송아지 제단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 제단에 도착했을 때 마침 여로보암이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 제단을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것은 다윗왕조에서 요시야라는 인물이 태어나 벧엘 산당 제사장들을 죽이고 불사를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 예언은 300년 후 그대로 성취됩니다. 우리는 혼합주의 제단, 자기숭배의 제단은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 말씀이 이루어질 징조로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것을 증거로 들었습니다. 이런 심판의 메시지를 들은 여로보암은 분노하며 손을 펴서 “저 자를 잡으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에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손이 다시 회복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자 여로보암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은 그 하나님의 사람을 회유하며 자기 집에 가서 쉬며 선물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8,9) 먹고 마시는 것은 교제하며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근묵자흑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교제할 때 그에 물들게 됩니다. 그는 혼합주의 땅에서 누구와도 교제하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그는 용감했고 비타협적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어떻게 변질되어 심판을 받기에 까지 이르게 되었나요?


알쏭달쏭한 한 늙은 선지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벧엘에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혼합주의, 사이비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들들로부터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듣고 그를 따라가 자신의 집에 초대했습니다. 그럴 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전처럼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무슨 말에 무너집니까?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이 말입니다. 그는 천사가 자신에게 새로운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했다고 거짓말했습니다(18) 


우리도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나도 같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도 집사입니다.” “장로입니다.” “저도 신앙생활할만큼 다 해봤어요” “저도 목자생활 오래했어요. 충고하는 데, 곧이 곧대로 믿지 마세요. 너무 철저하게 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당신만 손해납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의 말에 넘어가 허겁지겁 먹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그 늙은 선지자의 입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지 않았기에 조상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엄정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는 결국 가는 길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유다에서 한 사람을 보내사 그의 자기숭배, 혼합주의, 편의주의 신앙에 대해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유다에서 간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강렬한 하나님의 뜻을 여로보암과 벧엘 제단과 북이스라엘 전체에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충성스럽게 섬기다가 미혹된 사람도 그런 엄정한 심판을 받는데 고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는 그가 받을 심판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여로보암은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에게 세 차례 경고하신 것처럼 여로보암에게도 하나님은 여러 차례 기회를 주셨으나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4장은 여로보암의 죄와 영향력으로 그 집안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말합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한 아들 아비야가 죽는가 여부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죽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아이는 하나님께 선한 뜻을 품었기에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그의 나쁜 영향력으로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약속의 땅을 잃고 이방 땅으로 흩어집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혼합주의 금송아지 신앙이 얼마나 악한 영향력을 끼쳤는가를 배웁니다. 혼합주의 편의주의 자기숭배의 신앙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후손과 공동체를 망하게 합니다. 여로보암은 다윗과 다르게 인간적인 생각과 잔꾀로 혼합주의, 편의주의 길을 갔습니다. 이런 그의 왕조는 2대 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악영향을 받은 북이스라엘 왕조는 왕조가 9번 바뀌고 7명 의 왕이 살해되고 1명은 자살했습니다. 그 나라도 길지 못하였고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원튼 원치 않튼 어떤 영향력을 끼칩니다. 우리가 여로보암의 악한 영향력이 아니라 다윗 왕과 같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과거 순수라는 신앙명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잘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저는 열정이 있었으나 사실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우상숭배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말씀대로 자기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헌신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물위를 걷는 것처럼 모험적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전심으로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 후손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