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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유다서특강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다서 1:1-25)2024-03-05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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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유다서 특강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말씀 / 유다서 1:1-25

요절 / 유다서 1: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우리가 유다서를 처음 공부하는데 잠시 신약성경의 개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구약 성경은 39권, 신약 성경은 2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약 27권은 4복음서와 사도행전, 13권의 바울서신, 7권의 공동서신, 그리고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입니다. 공동서신이라 함은 수신인이 특정되지 않고 여러 교회에 공동으로 교훈하는 목적으로 쓴 서신입니다. 공동서신에는 야고보서, 베드로 전, 후서, 요한 1, 2, 3서 그리고 유다서가 있습니다. 유다서는 단 한 장으로 된 아주 짧은 편지입니다. 모든 서신서 중 가장 뒤에,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입니다. 마태복음 13:55에 보면 예수님의 동생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입니다. 유다서는 주후 65-8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 복음이 전파된 헬라지역의 상황은 그리스 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가 결합된 영지주의 사상이 기독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영지(Gnosticism, 靈知)주의의 영지는 '영적 지식'을 말하는 데, 영지주의의 정의와 범위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공통점을 요약하면 다음의 2가지입니다. 첫째, 세상의 물질은 악한 신이 창조한 것으로써 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악하며 우리 영혼은 더러운 육신 안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비한 영적 지식을 얻어서 우리의 영혼을 육신으로부터 탈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실재하지 않았다. 예수의 영이 어느 청년이 세례를 받을 때 그에게 임하였다가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떠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부인합니다. 


당시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을 믿는 외에 다른 교리들이 아직 명확히 정립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영지주의 사상은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건전한 기독교 세력보다 더 교세가 강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되었지 육신으로는 어떻게 살든 상관이 없다하며 방탕과 방종을 부추겼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부인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을 불신에 빠뜨리고 멸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유다는 본문에서 이런 영지주의자들을 정죄하며 신자들이 믿음의 도에 굳게 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유다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하면 더 권위가 설 것 같은데 그는 겸손하게 자신이 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요7:5) 부활하신 이후에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아래 동생이자 유다의 형인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 공회 의장으로 초대교회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동생 유다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유다가 누구에게 편지를 보냅니까?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다는 수신자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신자는 자기가 결단하여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에클레시아)입니다. 


우리나라에선 교회(Christian Church)를 한자어로, 가르칠 교자를 써서 '敎會'라고 쓰는데, 이는 복음이 전래된 조선시대에 교회에서 주로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교회라는 말보다 부를 '소'를 사용하여 '소회'(召會)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는 의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심성은 심히 타락하여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무궁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과 크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3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는 우리 신자들이 일반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일반으로 받은 구원"은 영어성경 KJV 는 "the common salvation", NIV 는 "the salvation we share"라고 번역합니다. 이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동일한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받는 구원은 보통 사람들의 구원과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구원이 다르고, 평신도들의 구원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예수 믿는 자들이 똑같이, 곧 일반으로 받는 구원입니다. 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은 모두 평등합니다. 아무도 더 나은 구원을 얻었다고 우월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믿는 모두에게 최고의 선물,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유다는 이러한 보편적인 구원의 진리, 곧 구원론에 대해 그들에게 편지를 쓰려던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쓰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급하게 이 유다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어왔다는 것은 "옆에서 들어왔다", "은밀히 들어왔다"는 뜻으로 영지주의 이단들이 교회에 슬그머니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들어왔음을 성도들에게 깨우치고 그들의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아주 전투적인 어투로 급히 이 유다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가 이 편지를 통해 권하는 요점이 무엇입니까? 3절 하반절입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라는 것은 "to contend for the faith that was once for all entrusted to the saints." 즉, 성도들에게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주신, 그 믿음을 위해 싸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는 'Saving faith' 는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단 번에 주신 것이요 영원히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의 초청을 받아 목자님과 성경 공부를 하고 나서 복음이 납득이 되어 내가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했고 그 결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가 결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결단한 것은 사실 복음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은 믿어지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 믿어지는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순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도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며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 가운데 어느 순간에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게 됩니다. 내가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입니다. 그 때가 구원 받는 순간입니다. 그 때는 나의 삶 가운데 어느 실제적인 시점으로 존재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때를 정확히 기억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시면서 성령이 언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는 모르나 그 결과는 알 수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성령에 의해 난 사람,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내면의 성향과 소원에서 두드러진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진리는 우리에게는 익숙하나 당시 세계에서나, 지금도 현대 종교 세계에는 가히 혁명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제외한 모든 종교의 신념은 이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라 그러면 구원의 찬스가 높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말합니다. "아니다, 네가 선한 행위를 열심히 하려는 것과 상관이 없다. 오직 복음 앞에서 회개하고 믿으라.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당시 영지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한 지식을 추구하도록 하였습니다. 금욕과 고행, 신비한 체험을 통한 신과의 합일, 황홀경 체험, 입신, 환상 같은 것을 우월한 것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율법주의는 믿음에 더하여 선한 행위를 요구하였습니다. 지금도 가톨릭에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음 뿐 아니라 공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바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단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보다, 그래도 우리가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공덕을 쌓고 도덕적으로 선한 일도 많이 하여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더 설득력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단들은 그러한 합리적인 말로 유혹하여 사람들을 믿음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의 복음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전투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싸우라"는 말은 현재형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지속적으로 싸워야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이렇게 힘써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4절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저자 유다는 4절부터 19절까지 이 이단들이 어떤 자들이며 그들이 어떤 심판을 받게 될지를 말합니다. 


첫째, 그들은 방탕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신은 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육은 어차피 악한 본성으로 충만한 것이며 결국 소멸될 것이다, 그러니 육을 더럽혀도 상관없다, 육의 본성대로 살아도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방탕을 부추기고 자살을 미화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둘째, 그들은 옛적부터 심판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저자는 성경에 미리 나타난 세 가지 사건, 즉, 하나님을 불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스러진 일, 자기 지위를 떠난 천사들이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힌 일,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불 심판을 받은 것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비방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영적 질서를 업신여겼습니다. 천사와 같은 영광을 비방하였습니다. 천사장 미가엘 일지라도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 마귀를 비방하지 않고 하나님께 심판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비방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적으로 말하고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무지하여 가인과, 발람과 고라와 같이 패역한 길을 가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넷째, 그들은 성도들의 사랑의 식탁인 애찬을 깨뜨리는 암초 같은 자요,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요, 구름의 모양은 있으나 물이 없는 것 같이 실제적인 내용이 없는 자들이요, 뿌리까지 뽑혀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소망도 없는 가을 나무와 같은 자들입니다. 바닥의 더러운 것들은 솟구치게 하는 거친 물결 같은 자요,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영원한 흑암으로 돌아가는 별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정욕대로 행하는 자요, 조롱하는 자요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심판주로 임하실 때 이들을 정죄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영지주의자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 시대가 지나면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영향력은 역사상 반복하여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에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첫째, 가인의 길을 가는 사람들. 가인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 없이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1:4절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믿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시니까 시기심으로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행했습니다. 이런 가인은 오늘날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을 보시는 믿음이 없습니다.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보심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가인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둘째, 발람의 길을 가는 사람들. 발람은 뇌물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척 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재물에 있었습니다. 돈을 받고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릴 묘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우상숭배에 참여하고 음행에 빠지게 하여 이만 사천 명이나 전염병으로 죽게 하였습니다. (민 25:9). 요즘 어느 집회에 가면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병든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영적 지도자들이지만 영혼 자체를 사랑하고 돕기보다 물질을 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척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돈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은 발람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셋째, 고라의 패역을 가는 사람들. 고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 모세의 권위에 대적한 자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단들은 교회에 몰래 들어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적하고 성도들을 거짓으로 미혹합니다. 신천지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 내에서 합리주의, 인본주의로 포장하며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교만하며 불평과 불만을 교회 공동체 가운데 퍼뜨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방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고라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이런 시대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 20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입니다. 이는 믿음이 순수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거룩하심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날마다 우리 안에 뿌리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자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듣고 배움으로 우리 자신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믿음이 견고한 사람,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영적인 거목으로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인도해주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함께 기도해주십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토로하고 주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풍성한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 21a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세상의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준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자기 말을 들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유혹과 시험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시련과 역경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시와 때를 따라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악을 선으로 갚게 하며 원수도 사랑하는 비범한 삶을 살게 합니다.


셋째,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23a입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NIV 는 "snatch others from the fire"로 되어 있습니다. 'snatch' 라는 말은 아주 신속히 낚아채는 것입니다. 지금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소방대원이 불구덩이 속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 어린 아이를 구출해냅니다. 이와 같이 불구덩이에 떨어지고 있는 사람을 손을 내밀어 낚아채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아무 것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의 몸을 던져서라도 구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봄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점점 햇볕이 따듯해지고 날씨고 밝아지지만 영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손을 내밀어 낚아채야 합니다. 우리가 봄 학기 캠퍼스 역사를 이러한 영적 긴박성을 가지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24,25절입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는 가인, 발람, 고라의 길을 가지 말고,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불 속에 떨어지는 자들을 끌어내어 구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십니다. 여기서 거침이 없게 하신다는 것은 'keep you from falling'으로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사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할 분이십니다.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견고하게 하시는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능히 이 마지막 시대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사도들이 말한 대로 온갖 이단들이 난무하는 시대요, 사사시대와 같이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단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거룩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세우며 불 속에 떨어지는 자들을 구원하는 거룩한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유다서#믿음의도#영지주의#거짓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