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4년 마가복음 제 2 강 권위 있는 새 교훈 (마가복음 1:16-45)2024-03-17 20:23
작성자

2024년 마가복음 제 2 강 


권위 있는 새 교훈


말씀 / 마가복음 1:16-45

요절 / 마가복음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우리는 지난 1강에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제적으로 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함으로 그 동안 사람들의 심령을 통치한 사탄과 거짓 우상들이 물러갑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심령에 이루어지기 위해 구체적으로 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1. 첫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16,17절입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시작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실상 우주적인 변혁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엄청난 변화가 있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이 어떠합니까? 예루살렘도 아닌, 사람들이 별로 관심도 두지 않는 갈릴리 해변에서 몇몇 평범한 어부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하십니다. 너무 조용하다 못해 초라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땅에 심길 때에는 모든 씨보다 작지만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이 심으시는 씨가 무엇일까요? 사람입니다.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시거나, 제도를 만드시거나, 단체를 조직하는 일을 먼저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이다." 주님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실현할 사람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을 키우는 데는 많은 힘을 써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그 성과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사람을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18-20절을 보면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후에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이상의 네 제자가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 중에 수제자 그룹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는 신적인 부르심, 정확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시며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를 따라오라” 이는 지휘관이 부하들을 소집하여 전쟁터로 이끌고 나가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삿3:28;6:34) 예수님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소집해서 사탄과의 영적 전쟁터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사탄의 통치를 몰아내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는 일에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따라오라"고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무슨 뜻일까요? 이는 멸망의 바다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건져내는 영적인 어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람을 부르고, 회복시키고, 온전하게 하고 살리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어부인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단지 예수님을 따르면 됩니다. 16절부터 20절까지의 주어가 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고’, ‘부르시고’, ‘만드십니다’. 부름 받은 제자들의 연약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배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 예수님이 책임져주십니다.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은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들을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는 일꾼들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그의 주권에 따라 평범한 인생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들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단12:3) 이를 볼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두신 예수님의 소망과 비전은 크고 위대합니다. 부르심 받은 우리가 이 예수님의 소망과 비전을 붙들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잘 배우는 가운데 제자로 성장하며 또한 그러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부르심 받은 어부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자기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는 명령은 대단한 도전입니다. 그런데도 어부들은 과감한 결단을 합니다.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일에 성실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이나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과 다를 때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당장 나의 현실에 필요하고 내게 익숙하고 편안한 방식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방식과 다르면 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물론 그들이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버렸다고 해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가족과의 모든 관계도 끊어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이나 가족 관계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새롭게 재정립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우선적으로 하여 동참하고 헌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실현과 확장을 위해 예수님은 맨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먼저 사람을 키우고자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우리도 이런 가치관을 가져야겠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고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어도 사람을 키우는 일에 집중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고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권위 있는 교훈

21,22절입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 문장은 "그들이"로 시작합니다. 예수님 혼자서 하시던 일에서 제자들을 동참시키십니다. 가버나움은 네 제자의 고향입니다. 그곳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심으로 예수님의 복음 역사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신비한 기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가르침’(teaching)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무엇보다 가르침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습니다. 여기서 "놀랐다"는 말은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 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는 뜻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그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정신이 멍하게 할 정도의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엑수시아)란 그 어떤 방해나 장애가 전혀 없이 어떤 행위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용어는 하나님이나 왕들에게 사용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그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권위가 없었을까요? 예수님은 마가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막7:7,8)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자체를 가르치기보다 사람의 말이나 유전, 전통을 가르쳤습니다. 학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권위가 없었습니다. 귀신의 힘 앞에 무력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신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셨기 때문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지 배웠습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한 가운데 말씀을 전했고 성도들은 그의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그들 가운데 크게 역사하였습니다. (살전2:13) 우리가 공부하고 전하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권위 있게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 충만한 가운데 가르쳐 말씀의 권위가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마침 거기에 한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말은, 귀신에게 완전히 잡혀서, 귀신이 그 사람의 전인격을 통제하는 상태가 된 것을 말합니다. 회당은 기도하는 곳이고 말씀이 선포되는 곳인데도 귀신은 그 회당에서 그 사람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 회당에서 수 없이 말씀을 가르쳤을 텐데, 그들의 가르침은 사탄의 통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그 어떤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도 귀신의 세력에 무력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화려한 과학 기술 문명은 무엇이든지 빠르고 효과적으로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술이나 과학은 중립적입니다. 그 자체는 귀신의 힘 앞에 무력합니다. 도리어 과학이나 기술이 귀신이 지배하는 도구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가르치시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옵니다. 귀신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귀신과 그 사람의 인격이 분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 소리는 죽음의 비명소리입니다. ‘경련을 일으킨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찢는다’(스파라쏘)입니다.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귀신의 폭력성을 보여줍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지만 끝까지 그 사람을 찢으면서 격렬히 저항한 것입니다. 


이 일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서 서로 말합니다. 27절입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원어나 영어 성경을 보면 27절의 두 문장 사이에 ‘심지어’(even)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의 권위에 놀랐는데, 이번에는 그 가르침의 권위가 심지어 귀신의 권위를 압도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과 귀신 모두에게 압도적인 권위로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귀신에 들린 자를 회복시켜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캐나다 오타와에 계신 한 선교사님은 과거 귀신들린 삶을 살았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를 배회하였습니다. 무덤 옆에 누워 잠을 자고는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모임에 나와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 그의 내면의 모든 더러운 세력들이 나갔습니다. 고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전자 기업체에 취업하였습니다.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캐나다에 선교사로 나가 그곳 캠퍼스 양들을 제자 삼는 역사를 섬기고 계십니다. 또한 관악3부의 한 목자님은 과거에 이기심으로 깊이 병들었습니다. 자기 도시락 반찬을 먹는 급우를 쬐려보았습니다. 멸치가 친구의 입에 들어갈 때까지 쬐려보았습니다. 이런 그가 일대일 목자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사랑이 많은 섬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 이런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봄 학기에 캠퍼스에 들어오는 많은 양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 건강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통치하지 않으시는 그 내면은 사탄의 통치, 귀신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함으로 그 심령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요 사랑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교훈도 사람으로 하여금 사탄의 세력에서 자유하게 하고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권위 있는 교훈이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성령 충만하게 전하여 사람들의 내면을 통치하고 있는 악한 사상들,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을 회복시키는 새 역사를 능력 있게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3.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29-31절입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사역의 장소가 회당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사적인 장소인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옮겨집니다. 가서 보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중한 열병’(a high fever)이라고 되어 있는데 습한 기후의 갈릴리 호수 지역에서 흔히 발생하는 풍토병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병이 떠났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사탄과 질병의 통치를 받다가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32-34절입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그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저물어 해 질 때가 되자 사람들은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다음날 새벽이었습니다. 35절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은 전날 밤 늦게까지 많은 일을 섬기셨지만 새벽에 일어나셨습니다. 아직도 밝기 전이니 우리 시간으로 새벽 4~5시 경일 것입니다. 육신의 피곤을 무릎 쓰고 기도에 힘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위해, 또한 큰 역사 후에 영적인 방향을 잡기 위해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늦게 일어난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따라갔다’(카타디오코)다는 말은 단순히 뒤따르는 정도가 아니라 사냥꾼이 ‘추격하다’, ‘수색하다’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찾았을 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사람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 매우 고무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고 성공 지향적인 제자들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38절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지만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자기를 찾는 그 무리들에게가 아니라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전도였습니다. 어딜 가나, 어떤 상황에서도,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는 본래의 목적을 잃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이 방향을 따라오기 원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곧 전도하러 왔노라" 예수님은 자신의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심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을 잘 이해하고 동참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이를 볼 때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봅니다. 지난 봄맞이 수양회 때 배운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 4:1,2) 우리가 어딜 가나, 어떤 상황에서나,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4. 내가 원하노니

40절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레프로스)로, ‘비늘 모양의’, ‘비늘과 같은 딱지로 덮인’을 뜻합니다. 당시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죽은 자처럼 여겨졌으며, 이들과의 신체적 접촉은 금지되었습니다. (민12:12). 나병에 걸리면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레13:45,46)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치면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되는데 어떻게 그가 예수님께 왔을까요? 여하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었습니다. 부정하게 된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이 믿음이 있었기에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나병환자와 같은 나의 문제를 주님 앞에 들고 나가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 나의 고질적인 내면의 문제를 들고 나가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소원과 믿음이 있으면 우리 내면의 어떤 문제라도 예수님께 들고 가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고 나아온 그를 물리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41,42절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나병환자의 믿음도 놀랍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더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I am willing! 율법은 나병환자를 접촉하지 못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을 넘어서서 그를 터치하셨습니다. 말씀만으로도 치료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 왜 굳이 나병환자를 만지셨을까요? 이는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십니다. 무엇보다 그를 만지신 예수님은 그를 참으로 불쌍히 여기신 분입니다. 오랫동안 그를 만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과 애정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신의 질병과 함께 깊은 고독에 시달렸습니다. 사람의 손길이 그리웠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의 터치는 그야말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모두 나병 환자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한 영적 불치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 주님은 우리를 물리칠 수 있으셨습니다. “I am not willing.”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를 고쳐 주셔야할 의무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원하노니" 해주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긍휼의 손길을 내 밀어주시고 죄의 병으로부터 고쳐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전도 사역에 힘쓰시지만 그 동기가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복음 역사는 사업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 병든 자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 주듯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 복음 역사입니다. 우리가 봄 학기 캠퍼스 역사를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섬기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사람을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파괴되고 무너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역사할 때 치유되고 회복되고 온전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번 봄 학기에 성령 충만하여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힘써 가르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