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3강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마가복음 2:1-17 요절/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은 ‘유앙겔리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의 왕으로 오셨고,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런예수님이 왕이시지만 종이 되사 우리를 섬기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나게 하는 말씀이 누가복음 2장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 ‘죄사함’ 무엇인지, 예수님이 죄사함을 어떻게 이루는지를 배우고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길 기도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셨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기 위해 몰려왔던 곳으로 오셔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증언을 받았죠. 그 후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려 인적이 없는 광야로 나갑니다. 그러고나서 다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렇게 복음 전파를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습니다. 그 후 다시 사람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서 다시 사람들에게로 나아와 전도하시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나병환자가 예수의 소문을 널리 퍼지게 하자 또 어떻게 합니까? 바깥 한적한 곳으로 나가십니다. 이렇게 1장이 마무리가 되었죠. 이제 다시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오늘 말씀 2장 13절에서도 예수님이 열심히 일하신 후에 다시 바닷가로 나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 그렇다면 왜 이러한 패턴을 보이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죄로 고통받는 인생들을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하여 들어오셨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열심히 종으로 섬기십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지면 사람들을 떠나 나가십니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 옛날 인간을 타락시킨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높아지라고 부추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라고 속삭입니다. 고난의 길을 가지 말고 편한 길을 가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물러나 사탄과 맞서는 곳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자신의 서약을 새롭게 하십니다. 영적 씨름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싸움에서 승리하신 후에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와 열심히 종으로서 섬기십니다. 이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일을 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내가 이 일을 해냈어’하며 높아진 마음이 든다든지, 반대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으나 결과가 신통찮고 오히려 안 좋은 일이 생길 때 ‘괜히 열심히 했네. 시간 낭비했어’ 이런 손해 심정이 들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빨리 한적한 곳, 나의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마귀의 궤계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자, 가버나움에 예수님이 들어가시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나요?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는 헬라어‘로고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말합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말씀’이 바로 ‘로고스’입니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관하여, 자신이 왕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3,4절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 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혹시 유대인들의 가옥구조를 아시나요?(사진 참조) 외부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여기를 통해 중풍병자를 지붕으로 올렸을 것입니다. 지붕은 갈대나 종려나무가지를 덮고 그 위에 진흙을 발랐다고 하는데, 지금 사람들이 그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집이 누구 집이었을까요?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살던 집이거나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집 주인이었다면 지붕에서 먼지가 휘날리고 구멍이 뻥 뚫릴 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어어어.... 저저저... 지금 뭐하는 짓이야?” 화를 내지 않을까요?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고 무엇이라 하십니까? 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 이면에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버릇없고 무례하게 보였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들은 참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중풍병자가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기뻐 받으시고 중풍병자를 적극적으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작은 자야” 영어성경에는 ‘Son’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친아들처럼 ‘아들아~’ 하시며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얼른 생각하면 “중풍병자야, 네 병이 나았느니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중풍병은 뇌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생기는 병으로서, 신체 일부나 전신이 마비됩니다. 비만, 흡연, 과음, 음식조절 실패, 운동부족등을 원인으로 봅니다. 구약에 보면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다윗이 자기를 치러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몸이 돌처럼 굳어지고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니 죽었다고 나옵니다. 이는 뇌졸중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또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을 받은 뒤 그가 편 손이 마비되었다고 나옵니다.(왕상13:4) 그래서 유대인들은 중풍병을 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을 낫게 해 주기 전에 먼저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죄를 사한다고 선포하십니다. ‘죄사함을 준다’ 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때를 따라 일하셨습니다. 이제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죄사함’을 선포할 때라고 보셨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중풍병과 죄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믿음과 죄 사함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우리의 선행이나 고행이나 마음 수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활동으로 되는 것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서기관들을 교훈하시기 위해서입니다. 6,7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이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요? 1장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셨을때 사람들이 놀라며 뭐라고 했습니까?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다”(1:22)했습니다. 서기관들이 하는 일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예수님도 똑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고 자기들에게 오던 사람들이 발길을 돌려 예수님께로 몰려가자,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길래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다 몰려가지?’, ‘예수가 누구지?’ 알아보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서기관들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레벨이 아닌 더 높은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자, 생각해보겠습니다. 성경이 누구에 관한 책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접하고, 가장 많이 연구하고,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치부하는 사람이 바로 서기관들 아닙니까?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앞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열렬히 환영하고 기뻐하며 맞아들여야 할 사람이 그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렇게 심중에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죄를 사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죄를 용서 받을려면 반드시 속죄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자가 죄를 사해 버리니 너무나 충격이고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죄 사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계시는 그리스도도 죄사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서기관들의 문제는 그들 안에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 배후에 마귀가 그들의 영적인 눈을 어둡게 하여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여 오히려 대적하도록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과 충돌이 시작되었고 계속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고소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아니, 왜 예수님은 이런 갈등이 뻔히 야기될 줄 알면서도 그들 앞에서 이렇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을 대면할 때 이를 서약하셨고, 흔들릴 때마다 또 서약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선언에는 이제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내어 놓겠다는 말이요, 새 성전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질문을 하십니다. 9,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습니까? 다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습니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놀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주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성전에서 드리는 속죄 제사는 일시적인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한 속죄 제사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효력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성전에 가서 속죄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활짝 열어주신 주의 은혜를 감사 찬양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사역을 하시고서 또 다시 사람들로부터 떠나갑니다. 구체적으로 바닷가로 나가십니다. 그러나 큰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오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칩니다.
14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그가 일어나서 따릅니다. 본문은 아주 짧지만 이 안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증오했던 죄인 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죄인이었습니다. 두 종류의 세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가바이’라고 부르는 세리인데, 일반적으로 정해진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토지세, 소득세, 인두세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두 번째는 ‘두아니에’ 또는 ‘모케스’라고 불리우는 세리인데, 이들은 자기에게 할당된 세금만 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 수탈을 일삼았던 세리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주된 혐오 대상이었습니다. 세리 레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들은 다리 통과세, 도로세, 입항세는 기본이고 시장에 들어가는데도 세금을 받고, 심지어 마차 바퀴 하나 하나에다 세금을 붙이고 짐싣는 동물에다도 붙였습니다. 이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조차 어디에다 세금을 붙였는지 모두를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금을 메기기 위해 짐꾸러미를 다 풀어헤치게 하고 개인적인 서신조차 공개하게 했다고 하니~ 그 무례함과 강탈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아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부두에 오면 세리 레위가 그를 불렀을 것입니다. “어이, 베드로~ 물고기 많이 잡았는가? 축하하네. 잡은 물고기 십분의 일은 세금으로 내야지” 그러면 베드로가 속으로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저랑 성경공부하는 어떤 청년은 이런 세리를 ‘양아치’라고 했습니다. 이러니 세리가 유대 사회에서 환영받았겠습니까? 그들은 재판자리에 설 수 없었고, 증인으로도 서지 못하였습니다. 무자비한 이들의 횡포에 합법적인 속임수가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짐승을 끌고 가는데 모케스가 양에 대한 세금을 내라고 하면 “아, 이거 성전에 하나님께 바칠 ‘서원제물’이에요”라고 했고, 데리고 가는 종을 보고 세금내라고 하면 아들이라며 거짓말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우습고 기가 막힙니까? 여기 나오는 세리 레위는 일반 세리도 아닌 가장 악명높은 ‘모케스’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직접 세금 걷기위해 지금 세관에 앉아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디에다 세금을 매길까 예리한 매의 눈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제자로 부르십니다. 진짜 용서받을 수도 없고, 회개가 어려운 그런 계층의 사람을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옆에서 듣고 있던 베드로가 자기 귀를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숨을 쉬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어떤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예수님 안에서 소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레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료 세리들과 죄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식사 교제하면서 큰 위로와 힘을 덧입었을 것입니다. 그 모임은 죄인들의 천국잔치요, 기쁨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본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6절을 보면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참으로 가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세리와 죄인들은 너무나 사악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철저히 격리시키고 정죄해야 마땅한데 식사까지 함께 하다니~ 도저히 납득이 안 갔습니다. 예수가 정상적인 랍비라면 최소한 저들을 회개시킨후에야 맞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영적 의사로 왔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먼저 환자와 함께 하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치료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죄인들을 맞아들이는 방식과 사뭇 다릅니다. 그들의 주장은 죄인들이 먼저 회개하도록 하고 그 다음에 그에게 하나님의 맞아들이심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을 ‘랍비주의’라고 합니다. 반면 그리스도는 먼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맞아들이고, 그 다음에 그를 회개자로 만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원리요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의인의 구주’가 아니라 ‘죄인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회개에로 먼저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자신에게로, 그리고 그 나라로 부르십니다. 여기에서 회개가 시작이 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만약 예수님이 의로운 사람, 죄가 없는 사람, 깨끗한 사람을 뽑으러 오셨다면 우리는 감히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데도 죄가 없는 척, 의로운 척 위선적으로 가식적으로 행동했을 것입니다. 소감을 써도 내가 지난주에 뭘 잘 했나 찾아서 자랑거리만 늘어놓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지적하고 고발하는데만 열을 올릴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이중적인 바리새인과 같은 공동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의인인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거룩한 척, 깨끗한 척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됩니다. 요한일서 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고백하면 됩니다. 우리는 가끔 왜 교회가 이렇게 문제가 많은가? 또한 동역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죄와 허물로 인해 실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원래 교회란 문제 많은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감사한 것은 의사이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교회 문제들을 친히 해결해주십니다. 문제들을 통해 우리를 회개케 하시며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 구주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다루셔서 각자의 죄악된 습관과 인격을 단계별로 치료해 주시고 강건한 사람이 되도록 빚어가십니다. 사람마다 그 치료기간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합니다. 나의 어떤 죄와 허물은 잘 고쳐지지 않아 평생 가지고 가면서 힘들게 씨름해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찬송할 뿐입니다. 우리가 주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다 한 뒤에라도 우리가 할 말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저는 다만 무익할 종일뿐입니다’ 이 고백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참 많이 놀라셨죠? 예수님이 우리를 놀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며 하늘이 아닌 이 땅에서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악명높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죄인들의 무리를 영접하시며 하나님 나라 축제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의사로 이 땅에 오신 죄인들의 구주이십니다. 비천한 우리를 영접하시고 죄 사함 주시고 치료해 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은혜받은 우리는 어떤 죄인이라도 열렬히 환영하고 그들을 섬기되 주님의 마음으로, 종의 자세로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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