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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마가복음 5강 열둘을 세우셨으니(마가복음 3:7-35)2024-04-1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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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5

 

열둘을 세우셨으니

 

말씀/ 마가복음 3:7-35

요절/ 마가복음 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우리는 지난주에 새 포도주 새 부대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에 새 포도주로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사람들에게 새 기쁨과 참된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할 때 하나님 나라를 누립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 마음이 낡은 부대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율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옥죄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 밑에서 백성들은 고통 받았습니다. 유리방황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런 백성들을 섬기시기 위해 열두 사도를 세우십니다. 그들을 영적 지도자들로 키우십니다. 어려운 시대에 열둘을 세우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이 어려운 시대를 섬기는 지혜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7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께 나온 무리는 갈릴리 지방에서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남부 지방인 유대와 예루살렘, 동부 지방인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 또 북쪽의 이방 나라인 두로와 시돈에서도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절박한 문제를 들고 나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2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만지고자 필사적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옷 끝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픈 사람들의 심정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병자의 마음은 같은 병자가 되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예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질병과 귀신으로 고통하는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이 타락하여 말씀의 권세가 없어지니 귀신들이 날뛰고 백성들을 유린하였습니다. 그러한 시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무거웠을 것입니다. 혼자서 무리들을 다 감당하시기도 어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13절입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예수님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은 조용한 곳이요 하늘과 가까워 신령함을 느끼는 곳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은 이 때 산에 오르셔서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그 시대를 섬길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셨던 것입니다. 많은 기도 후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이미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원하는 자들' 이란 그저 그 때의 감정에 따라 임의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제자로 부름 받아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그들을 평상시에 눈여겨보시며 숙고하시는 가운데 부르기로 정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우리가 원해서, 큰맘 먹고 결단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만세 전에 우리를 택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49:1)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15) 또한 시편 139편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곧 나를 구성하는 세포가 만들어지기 전에 주님이 나를 보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하루가 되기 전에 이미 나의 인생이 다 기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다보면 그저 어쩌다 태어나서 시간 가는대로 살아가는 것 같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한 뜻 가운데 창조하시고 특별한 타이밍에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전혀 우연이 아니요 필연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특별한 뜻을 두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연약함과 내게 주어진 형편과 상황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과 처지,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다 아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택하셨습니다. (15:16) 우리는 다만 이 부르심을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 담대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빚으시며 우리의 역량을 키워 가시며 사용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가 은혜요 축복입니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신 은혜와 축복을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열둘을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4,15절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 보내사 전도도 하며, 셋째,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입니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밤새 기도하신 후 방향을 잡으신 것은 열둘을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세우신 첫째 목적은 뭔가 크고 대단한 것이어야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 첫째 목적이 "자기와 함께 있게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냥 예수님과 함께 지내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게 첫째 목적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항상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배우는 자들이 되기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스피릿을 그대로 덧입은 리틀 지저스 12명을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돌덩어리와 같습니다. 그들은 깎이고 다듬어져야 되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내면과 스피릿을 배워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항상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셔서 예수님이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시든 예수님을 잘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적인 사상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과 기도의 삶,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 하되 점점 자립적이고 영적인 사람들로 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을 예수님의 사역의 계승자들로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1365일 하루 24시간 함께 지내는 것은, 자신들의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결단이 요구되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배우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언제 제일 기쁜가요? 늘 진리의 말씀을 배우며 깨닫고 자신이 진리의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경험할 때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매주 말씀을 더 깊이 깨닫고 아는 기쁨, 내 자신이 예전보다 더욱 겸손하고 성숙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에게 기쁨이 넘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예수님이 1365일 그들과 함께 지내시는 것은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시는 희생이었습니다. 열둘은 같이 하기가 유쾌한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프라이버시가 전혀 없었습니다. 24시간 그들의 온갖 미성숙함을 감당해주셔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거친 돌과 같은 그들이 점점 다듬어져서 성숙한 종들로 성장하는 것을 보시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하시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키워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교육은 지식만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전인교육이었습니다. 삶을 전달하는 것, 스승의 모든 것을 전수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임에서도 지켜가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전인교육. 곧 삶을 전수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목자님들은 가정을 갖고 있기에 양들과 24시간 같이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센터에서 일대일 할 때만이 아니라 시간이 나는 대로 같이 밥도 먹고 심방을 같이 가며 삶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무나 부족해서 양이 나의 모습을 잘 알면 도리어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게 될 것 같아”.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투쟁하는 모습을 보이면 됩니다. 나라는 사람을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우는 나를 배우게 하는 것이요, 나아가 같이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둘을 세우신 두 번째 목적은 그들을 보내사 전도를 하게 하심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끔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우리 인생들의 인간 조건만을 개선해 주시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곧 영원한 생명, 이것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열두 제자들이 전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전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귀신을 내쫓는 권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천국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와의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싸워야 할 세력은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악령의 세력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는 이러한 악령들을 대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귀신을 쫓아내는 영적 권세를 덧입혀 주시고자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역사의식을 갖고 열두 사도를 키우십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시며 하루 24시간 배우도록 하사 그들을 사도들로 빚으십니다. 다음 세대, 그리고 그 이후 오는 장구한 세대를 생각하시고 사도양성을 하신 것입니다. 한 바스켓에 모든 계란을 담지 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두 사도 양성에 자신의 공생애 전부를 투자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플랜 B가 없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목표의식이 분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도를 개선하거나 법을 고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건물을 짓고 조직을 만들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사람을 키우시되 그저 선하고 훌륭한 사람을 키우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치, 사회 지도자들 키우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파 사명을 감당할 일꾼들을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셋째, 이 일의 본질이 영적 싸움인 것을 아시고 사도들로 하여금 영적 권세가 있는 자들이 되도록 키우셨습니다. 권세 있는 말씀의 종들로 키우셨습니다. 나중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겉으로 보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도우셨고, 결국 예수님 승천 후에 이들은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빼어난 말씀의 종이요 영적 권세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역사가 계승되었습니다. 이들과 이들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의 제자들을 통한 복음전파 역사로 온 세계에 복음이 증거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케냐에서 부활절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소식을 보니 참으로 은혜로운 수양회로 성령의 역사가 풍성하였습니다. 지부장인 주마 푸칭코 목자님이 능력 있게 제자양성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윤마크 선교사님 가정이 작년에 케냐에서의 30년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셨습니다. 그들은 귀국하였지만 그들이 세운 목자들은 그곳에서 더욱 열심히 모든 면에서 자립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윤마크 선교사님이 있었던 때보다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 양성의 결과임을 믿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 힘들고 오래 걸리지만 그래도 다른 더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어느 교단에서 아프리카에 교회건물을 세워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물질 지원하여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님은 귀국하였습니다. 물론 그 일도 아주 귀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키우지 않으면 계속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현지에서 선교사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당신이 세운 교회 지붕에 물이 샙니다. 수리하게 돈을 보내주세요

 

예수님의 본을 볼 때 우리는 긴 역사의식 가운데 사람을 키우는 것, 특히 소수의 헌신된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임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현실만 바라보면 낙망이 됩니다. 캠퍼스 양들은 영적 소원과 복음의 수용력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시 낡은 부대와 같이 되어버린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죽임의 위협을 받으시고 실제로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병든 사람, 귀신들린 자들은 거리에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사도 양성을 통한 세계 구원의 비전에 불타셨습니다. 확고한 신념을 갖고 이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힘든 시대 환경으로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소수의 제자들을 세우는 분명한 방향을 잡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이 먼저 예수님과 늘 함께 하는 생활,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배우며 영적인 권세를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사도양성!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이 시대 예수님의 사도요 사도양성가들로 세워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우신 열두 사도는 누구였습니까? 16-19절을 보십시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시몬은 베드로 곧 반석이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은 베드로 다음에 오는 수제자들입니다.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서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의 친구였습니다. 바돌로매는 예수님이 첫 이적을 행하신 갈릴리 가나 출신인데 나다나엘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태는 본명이 레위로 세리 출신입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가장 합리적이고 진지하게 알기를 소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가나안인 시몬은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은 회계 실무자였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상을 볼 때 열두 사도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그들 가운데 네 명은 어부였고, 한 명은 세리, 그리고 한 사람은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나머지 여섯 명에 대해서는 그들이 무엇을 하였던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지식이나 경건 훈련 면에서 이미 준비된 가말리엘이나 니고데모 같은 종교 지도자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평범한 사람들, 즉 기성 종교의 틀 속에서 낡은 부대 같이 되어있지 않은, 젊은 사람들을 미래의 영적 지도자들로 부르셨습니다.

 

20,21절을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 집에 들어가시자 무리가 다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들을 돕느라 너무 바빠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왔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2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조사차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적을 보고는 바알세불 곧 사탄에 들렸다 또는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소유가 된 사람을 귀신으로부터 강탈하여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귀신을 결박하고 사람을 자유케 하는 역사는 명백한 성령의 역사이십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역사를 보고 도리어 사탄의 역사다 귀신의 역사다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어도 성령께서 그 마음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 회개하는 자는 사함을 얻습니다.

 

제가 예전에 영국에서 한 자매님을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아주 지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성령을 모독한 적이 있어요. 그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 성령을 대적하고 거역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죄를 현재적으로짓고 있는 자가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과거에 모독했어도 현재 그것을 회개하고 있다면 현재적으로는 성령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16:8절에 보면 성령은 이 땅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책망하십니다. 그 성령의 책망하심을 받아들이는 자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같이 과거의 무슨 죄라도 다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을 계속 대적할 때 그는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하셨지만 가족들로부터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귀신들린 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이 오해와 핍박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도 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부르심 받은 열두 사도에게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반면에 이런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큰 특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혈육의 가족들에게 오해와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특권도 누립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며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중에 열둘을 택하시고 훈련하셨지만 우리는 지금 양을 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12명은 차지하고 한 명의 양도 없을 때도 많은데 어떻게 제자 양성을 할 수 있을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때마다 부흥이 있었습니다. 영적 부흥! 이 부흥은 사람이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그 때는 이사야 64:1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이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때 입니다. 그 때에는 지상에 큰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때가 1730년대였습니다. 미국에서 조나단 에즈워드에 의한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동 시대에 영국에는 존 웨슬레에 의한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근대에 와서는 1907년에 우리나라 평양 대 부흥운동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 교회에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불과 1년 전인 작년에 미국 에즈버리에서 부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부흥은 하나님이 영적으로 큰 파도를 일으키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흥의 역사에는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요즘 세상은 부흥의 중간 기간에 있는 상태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부흥의 때가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고대하고 대망하여 우리를 준비시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빼어난 제자로!

 

이를 고대하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양성의 방향을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겠습니다. , 우리 각자가 먼저 예수님의 빼어난 제자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영적으로 척박한 이때가 도리어 좋은 영적 토양입니다.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며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베드로와 같은, 야고보과 요한, 사도 바울과 같은 수제자로 성장하고자 소원하며 투쟁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보내주신 소수의 사람들을 빼어난 제자들로 양성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권자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이때가 가장 좋은 때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감사하며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빼어난 제자로 성장하며 긴 역사의식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을 세워 나갈 가장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이런 분명한 방향으로 우리 시대를 섬겨 나가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어려운 그 시대를 열두 사도를 양성함으로 섬기셨습니다.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그들을 밀착하여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도양성의 목적은 아주 분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전도하는 자 곧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종이요 영적 권세가 있는 종들로 키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도 사도 양성이라는 분명한 영적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보내주신 소수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로 양성하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