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6강 (4차) 하나님 나라의 비밀 말씀/ 마가복음 4:1-34 요절/ 11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지고 오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하리라’ 하였는데, 과연 예수님이 이 소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신 후 12명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제자 양성을 통한 세계선교’ 이 비전을 붙드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며 모함합니다. 대적합니다. 죽이고자 합니다. 친족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서 ‘집으로 가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을 과연 이룰 수 있을지?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나 팍스 아메리카나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알렉산더대왕은 헬라문화를 퍼뜨림으로 세계를 제패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소수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이루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으로 ‘된다’고 하십니다. 세 가지 비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파종과 성장, 추수에 관한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영적 비밀과 원리를 배우고 깨달아, 확신가운데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예수님 주위로 큰 무리들이 몰려왔습니다. 거기에는 병을 낫고자 하는 사람, 귀신들려 치료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그러하였듯이 먼저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가 무엇입니까? ‘옆에 던져 놓다’로, 비슷한 사물이나 상황을 나란히 놓아서 알기 쉽게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비유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감추인 진리를 드러내고 나타냅니다. 반면 관심이 없거나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알지 못하게,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겠습니다.(3-9절)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습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우기가 시작하는 10, 11월에 비가 온 뒤에 씨를 뿌립니다. 두 종류의 파종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손으로 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축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자의 경우 낱알이 가득 든, 구멍 뚫린 푸대를 가축의 등에 올려놓습니다. 그 동물이 걸어가면서 씨가 많이 촘촘하게 뿌려집니다. 그렇게 하여 씨앗은 단단하게 다져진 길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흙이 얇게 덮힌 돌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가시떨기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좋은 밭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자, 이 비유가 유대인 청중들에게 어떤 의미로 전달되었을까요?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유사할 수 있는가? 그 씨는 무엇이며, 씨 뿌리는 자는 누구이며, 각기 다른 상황의 밭에서 열매가 없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으로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그들이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와 전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풍요로운 추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는 심오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들으라’ 하셨고, 비유 말미에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을 배우는데는 2년이면 충분했지만 듣는 것을 배우는데에는 60년이 걸렸다’ 사람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잘 듣지 않는다는 말이겠죠. ‘들으라’ 이 말은 구약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할 때 사용되었던 ‘쉐마’입니다. 마음 속 깊이 새겨들으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중요하니 잘 들으라고 하십니다. 또한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 그 이상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밀이 담겨져 있으니 반복하여 생각하고 알려고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더 어려운 또 다른 비유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잘 이해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종교지도자들이, 친족들이, 가족들이 왜 그렇게 반응하였지도 알게 됩니다. 또한 이후에 전개되는 사건들도 이 비유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서기관)도 비유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분석한 것을 보면, 랍비들의 비유는 다분히 유대교적이며, 민족적이며, 율법적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의 적용은 항상 열심히 토라(율법)를 공부해야 한다거나 인간의 공로와 의를 촉구하는데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비유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온 세상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사랑, 은총에 초첨을 맞추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둘 사이의 차이는 유대 랍비는 땅의 빛을 하늘을 향해 비추었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써 하늘의 빛을 땅에 비추사 하늘의 것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놀라움을 표현하는 것이며,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10절을 우리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1,12절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비밀’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라기보다는 숨겨진 기밀 정보, 즉 ‘시크릿’(secret)에 가깝습니다. 비밀은 숨겨진 채로 있으면 알기 어렵지만, 일단 공개되면 어렵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공개하시지 않으면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지식입니다. 비밀은 아무하고나 공유하지 않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만 공유합니다. 가족에게는 비밀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라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조직 내부에서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는 공유합니다. 올해 2월 14일에 한국과 쿠바가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선언하기 전까지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미칠 파급력이 컸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비밀에 부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처럼 파급력이 큰 천국 비밀을 함께 있는 그들에게 왜 지금 공개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은 자신과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함께 할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 하나님 나라 비밀을 알게 하시고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반면에 ‘외인’,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여전히 ‘비유’, 수수께끼로 남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그 이유는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시대에 살던 이스라엘은 어떠하였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그토록 목소리 높여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심판받는다. 망한다.’ 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망했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남은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셔서 회복시키겠다는 소망을 주셨습니다(사6:10). 하나님의 약속대로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그들이 돌이켜 죄사함을 받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내인(內人)이 될 것인가? 듣지 않는 외인(外人)이 될 것인가? 그 엄중한 결과에 대해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여러 행사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을 ‘인싸’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잘 어울리지 못하고 왕따처럼 지내는 사람을 ‘앗싸’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어울리는 ‘인싸’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인싸’로 살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영적인 모임에서 겉도는 ‘앗싸’로 산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14-20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14절을 읽습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씨를 뿌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 예수님입니다. 씨는 말씀입니다. 밭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첫 번째로 ‘길가 밭’입니다. 너무나 딱딱하여 말씀을 받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마음 밭을 말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이런 마음 밭이었습니다. 그들은 완악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고 유대교의 율법적인 전통만을 고수하였고 예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님을 박해했던 때에 이런 마음 밭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였을 때 여러 명의 목격자들이 수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어!’ 이런 증언을 듣고도 믿지 않았던 제자들의 마음 상태도 여기에 해당됩니다(16:14). 오늘날에는 딤후3장에 나오는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을 일삼는’ 그런 마음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 마음에는 말씀을 들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단 마귀가 얼씨구나 하고 채어가 버립니다. 두 번째로 ‘돌밭’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곧 넘어집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좇아온 무리가운데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기적을 구하고 빵을 구했습니다.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될 때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선하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들을 때 기뻐합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 때 뿐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또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예수님을 원망하며 떠나버립니다. 세 번째로 ‘가시떨기 밭’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잘 받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서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예수님 때문에 버렸던 것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가버나움의 누구 어부는 지금 고기를 많이 잡아 때돈을 벌었다는데~ 나는 예수님만을 좇다가 이거 쫑나는 것 아냐’ 염려할 수도 있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께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을 때 ‘아니~ 저 아까운 것을 왜 저렇게 낭비하지’하면서 그들은 예수님보다 재물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가룟유다는 돈 욕심 때문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이 왕권을 잡으면 그 후에 핵심 권력을 차지하고자 ‘누가 크냐’며 서로 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를 대속할 것을 가르치시자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오히려 예수님을 책망하며 대속의 길을 훼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지근 거리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결실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다 도망갔습니다. 네 번째로 좋은 마음 밭입니다. 20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마음 밭은 말씀을 듣고 받아 풍성히 결실합니다. 자! 여기서 좋은 밭은 누구일까요? 사람들은 ‘내가 좋은 마음 밭이야’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단언하건대 이 세상에는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있다면, 그분은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 분 만이 좋은 마음 밭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뿐만 아니라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결실하지 못하는 길가밭, 돌밭, 가시떨기 밭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좋은 마음 밭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5,6) 또 에스겔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6,27) 요6:63은 말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 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이 좋은 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신입생 때 UBF목자를 만나 성경공부에 초청받아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하면 그를 돕는 목자는 답변을 항상 성경으로 했습니다. 그는 ‘와, 기독교인이 이렇게 답답하고 막혀있다니!’ 생각하며 미쳐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성경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군대문제, 삶의 여러 문제들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7년이란 시간을 보낸 후 그 UBF목자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만나니 UBF의 하이라이트 ‘성경 조금만 다시 볼까요’ 하는 목자의 말에 ‘그래 이정도는 감사표시로 응해 주어야지’하며 성경을 함께 보던 중 예전과 다른 감정을 느꼈고, 결정적으로 송명의 목자님을 통해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이로다’ 말씀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거듭나게 하는 과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분은 지금 종로2부 청년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과거 길가 밭과 같았던 그의 마음을 성령께서 역사하여 말씀을 받는 좋은 마음 밭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심기어진 하나님 나라가 지금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그 마음에 말씀이 심겨짐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 사람을 점령합니다. 이 소망가운데 예수님은 열심히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우리 인생은 거룩한 열매를 맺기에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영적 열매를 맺는 힘을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열매를 맺고 항상 그 열매가 있게 하려함이라”(요15:16)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여 우리로 열매 맺게 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거듭났음에도 왜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하지? 하는 의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듭난 성도는 그 마음에 거룩한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동시에 아직 대속받지 못한 죄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욕심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어느 쪽의 소욕을 따르냐에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의 몫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성령의 소욕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으로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때론 우리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곱 번 넘어져도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평생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위에 있는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갔습니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을 닮아갈 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실 것입니다. 반드시 열매 맺게 하십니다. 21-25절은 참된 듣기에 관한 권면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이유는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드러내고 나타내어 방 안을 밝게 하고자 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더 심오한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당장은 제자들이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들이 겸손히 말씀을 배우고 계속하여 주를 따른다면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믿음과 소망으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6-29절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의 비유입니다. 씨가 뿌려지면 일정한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필연적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알았기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 주었으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현재 고난받고 박해받고 마귀에 의해 방해받지만 뿌려진 씨는 반드시 성장하고 결실을 이룹니다. 정해진 수순입니다. 추수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렸으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잠을 푹 자야 합니다. 또한 추수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알곡은 하늘 창고에 들여지지만, 쭉정이와 가라지는 불에 태워질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반드시 옵니다. 각 자 인생의 마지막이 언젠가 오고, 세상 마지막이 반드시 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30-32절은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작은 씨를 상징합니다. 겨자씨 한 알은 새의 한 끼 식사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라서 완성이 되면 모든 풀보다 가장 크게 됩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듭니다. 이처럼 이 땅에 심겨진 하나님 나라가 처음에는 가장 작고 미약하지만 성장하여 세상 어느 나라보다 가장 큰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열방이 그 안에서 쉼을 누리게 됩니다. 현재 고난받는 로마 성도들의 눈에는 교회가 로마 황제의 먹잇감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침내 성장하여 로마를 정복할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때 모든 나라가 놀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전을 붙들고 믿음을 잃지 말고 궁국적 승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파종과 성장과 추수에 관한 비유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확장, 완성되어 가는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말씀 역사가 우리 마음속과 열방가운데 필연적으로 확장되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듣고 받아 결실하길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품고 한 영혼에게 말씀을 심는 일을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