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제 7 강 그가 누구이기에 말씀 / 마가복음 4:35-5:20 요절 / 마가복음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광풍과 광인을 만납니다. 두 경우 모두 사람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광인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자로 삼으십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광풍 속에서도 평안하신 예수님 35절입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여기서 "그 날"은 바닷가에서 큰 무리를 가르치신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씨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해가 저물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의도를 갖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떠나 예수님만 모시고 바다 저 편으로 가서 쉬게 되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야호! 탄성이 나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신 그 배에 얼른 올라타서 닻을 올렸습니다. 시원한 산바람을 받아 배는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습니다. 뱃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호수 중간 정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쉬익~”하며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심하여졌습니다. 광풍으로 변했습니다. 37절입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여기서 "큰 광풍"은 NIV에 "a furious squall"로 되어 있는데 회오리처럼 몰아닥치는 큰 광풍을 말합니다. 베드로 같은 갈릴리 어부 출신 제자들은 이 바람이 어떠한 것인지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북쪽에 있는 높은 헬몬산에서 요단 계곡을 따라 수면이 낮은 갈릴리 호수로 급하게 불어 닥치는 바람이었습니다. 광풍이 닥치자 배는 회오리바람에 감겨 이리 저리 뒤틀렸습니다. 물결에 부딪치고 바닷물이 배 안에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바가지로 아무리 퍼내어도 들이 닥치는 물이 더 많았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때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38a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예수님은 고물, 곧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광풍이 내리치는데 주무실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반응을 보려고 잠든 체하셨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38절에서 "주무시더니", 또 39절에 ‘예수께서 깨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예수님은 정말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광풍이 예수님의 잠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자장가처럼 들린 것입니다. 사람이 걱정과 불안이 있으면 조그만 소음에도 잠이 잘 깹니다. 그러나 아무런 걱정 근심이 없으면 남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잡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신 예수님은 매우 피곤하셨습니다. 광풍 속에서도 전혀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한두 번 깨기도 하셨겠지만 다시 잠드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38b절입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 나름대로 애를 써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노련한 어부 출신 제자들이 힘을 합쳐 광풍을 이겨보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자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께 눈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절박한 상황에도 잠만 주무시니 섭섭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최소한 배에 들어온 물을 같이 퍼내시거나 아니면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라도 하셔야 되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자신들이 죽게 되었다고 호소합니다. 이제 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광풍 앞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인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광풍 속에서도 마음 편히 자고 깨고 할 수 있는 평안입니다. 빌립보4:6,7절은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로마서14:7절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안과 희락이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누리고 계신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으시다고 원망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과 함께 가도 광풍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때 외적인 상황에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인생에 때때로 광풍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평안을 누립니다. 만유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잠잠히 광풍을 지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평안 가운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봅니다. 결국 선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함으로 늘 평강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2. 그가 누구이기에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당황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 너희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하시며 미안하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잠잠하라’(시오파오)는 ‘입을 다물라’는 뜻입니다. ‘조용히 해’, ‘입 닥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마치 말을 알아듣는 생명체 다루듯이 하셨습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바람이 순식간에 그쳤습니다. 바다가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it was completely calm) 바람은 갑자기 방향이 바뀌어 잠시 조용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난 파도가 넘실거리던 바다 표면이 예수님이 꾸짖으시자 언제 광풍이 있었냐는 듯이 완전히 잔잔해졌습니다. 유리바다처럼 되었습니다. 파동에너지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는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 졌을 때 제자들의 심장도 멎는 듯 했을 것입니다. 40절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광풍과 사투를 벌이며 죽음의 공포를 겪었던 제자들을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서워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광풍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은 광풍 앞에서 믿음을 가져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풍 앞에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41절입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광풍에 대한 두려움(afraid)보다 더 큰 두려움이(terrified) 제자들을 압도하였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예수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은 광풍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광풍 사건은 제자들에게 단지 고생한 경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알게 하는 영적인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환난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환난과 박해는 나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환난도 전능하신 예수님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의 때, 환난 자체보다도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집니다. 나의 삶에 광풍 같은 환난이 들이닥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광풍과 같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들이 성장하도록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광풍 훈련입니다.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제자들의 마음속에 강력한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말씀 한 마디로 광풍과 바다를 즉각 순종시키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Almighty God!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골 1:16) 예수님은 지금도 만유를 붙들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참새 하나도 예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참새보다 귀한 우리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광풍을 잔잔케 하신 주님을 굳게 의지하며 우리에게 닥친 광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는 좋은 기회로 삼기를 기도합니다. 3.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5:1,2절입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 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거라사인의 지방은 20절을 보면 ‘데가볼리’지역을 말합니다. 이곳은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헬라화되고 발달한 10개의 이방 도시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도착하시자마자 더러운 귀신 들린 한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납니다. 3-5절을 보면 저자는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유대의 무덤은 우리처럼 시신을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위틈이나 언덕의 벽을 파서 그 안에 넣고 돌로 문을 막는 구조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신이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덤은 부정한 곳이며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오히려 이런 곳을 더 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곳에서 홀로 사는 것에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둘째,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로 매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엄청난 힘으로 고랑을 깨뜨리고 쇠사슬을 끊고 탈출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길들일 수 없는 야수와 같았습니다. 셋째, 그는 밤낮 무덤과 산을 오가며 늘 소리를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보통 너무 답답할 때 소리를 지릅니다. 아무도 그를 통제하지 않는데도 그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혼자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몸을 끔찍하게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오히려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습니다.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돌로 자기 몸을 치며 "너 같은 자는 필요 없어, 죽어라!"하였습니다. 저자 마가가 귀신 들린 사람의 형편을 왜 이렇게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이는 귀신이 지배할 때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사람의 비참한 현실의 배후에 사탄이 있음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시고 실현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극과 극입니다. 이런 귀신의 세력은 그 누구도 혹은 어떤 물리적인 수단으로도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없습니다. 그의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요즘 시대 사람들도 간섭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매이지 않고 혼자 살면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기존의 전통이나 관습을 해체하면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람처럼 환경의 변화가 자유를 주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그가 자유롭지 못한 이유, 자기를 존중하지 못하는 이유가 환경 때문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자유롭지 못한 원인을 외적인 환경과 조건 탓으로 보게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8절입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그 사람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자기 영역을 침범한 자들을 해치고자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예수님은 자기가 해칠만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예수님께 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반가워하거나 환영하지 않습니다.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미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강한 자 귀신은 그 사람을 자기 집처럼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강한 자 예수님이 오시자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이 나가라고 하시니 순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귀신 때문임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과 ‘그 사람’을 분리해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신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거라사 지방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이름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중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그냥 없어져야할 자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귀신에게 "나오라"고 하시는 데서 끝나지 않고 왜 그 사람의 이름을 물으셨을까요? 이는 귀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동시에 그 사람이 본래의 자아를 되찾게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은 귀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자아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실상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자기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귀신에 의해 상실된 그의 본래의 자아를 찾아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온전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알 때만이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같이 21세기의 과학 문명시대에 이런 귀신 얘기를 하면 웬 전설의 고향 같은 얘기를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귀신이 존재하고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보이지 않는 귀신의 세력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귀신에 세력에 사로잡혀 무덤과 같이 음침한 곳에 거하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괴성을 지르기도하고, 자기 몸을 스스로 해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욕 귀신이나 혈기 귀신이 숨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정상이다가 어떤 순간이 되거나 특정한 환경에 처하면 그러한 세력에 잡힙니다. 그 외에도 아무리 겸손하려 해도 잘 되지 못하게 하는 교만 귀신, 물질주의 귀신, 지독한 이기심 귀신, 거머리 같이 떨어지지 않는 열등감 귀신, 운명주의 귀신, 패배주의 귀신들이 안 보이는 세력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통제합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그러한 귀신의 통제를 받아 원치 않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세력을 이기고 아름답고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된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설 때 주님께서 친히 모든 귀신들을 쫒아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선하고 참으로 자유로운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이름이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군대(레귀온)’는 대략 6,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급 부대를 의미합니다. 귀신은 당시 최강의 로마 군대의 명칭을 빌어서 자기 이름을 말했습니다. 자기들이 강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사탄을 ‘강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3:27) 군대와 같은 사탄에게는 고랑을 깨뜨리고 쇠사슬을 끊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물어보심으로 그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됐을 때, 귀신은 더 이상 그 사람 속에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귀신은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에게 대적하던 데서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지방은 이방 지역이요 군사 도시들이었기에 귀신들이 있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귀신들은 그 지방을 떠나기 싫어하였습니다. 귀신들은 사람 속에 있을 수 없게 되자, 비록 사람보다 못한 피조물이지만 돼지 속으로라도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처음부터 살인자인 사탄은 사람보다 열등한 피조물이라도 죽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의 청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돼지들이 산 곁에서 한가히 먹고 있다가 갑자기 귀신들이 들어오자 밥맛을 잃었습니다. 살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살맛을 잃어버린 돼지들은 호수를 향하여 비탈길을 내리달았습니다. 바다를 향하여 다이빙을 하였습니다. 모두 몰사하였습니다.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배를 하늘로 향해 드러내고 바다에 둥둥 떴습니다. 참으로 쇼킹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귀신들의 청을 들어주셨을까요? 이는 귀신들을 위함이 아니요 사람들을 위함이셨습니다. 먼저 그 귀신들렸던 사람이 몰살한 돼지 떼를 보고 참으로 자기에게서 귀신이 나간 것을 알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자신이 정말 군대 귀신들려 비참하였다는 것과, 이제 귀신들이 자기에게서 확실히 나간 것을 알게 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를 보고 실로 사람을 파괴하는 귀신의 존재를 확실히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사탄의 파괴적인 속성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돼지 2,000 마리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돼지 이천 마리가 몰사한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돼지 치던 자들이 놀라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가서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와 보니, 귀신 들렸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예수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 거라사 광인 외에 그 지역에 그런 사람 몇몇이 더 있을 텐데, 자기들의 양돈 산업이 모두 망할 것 같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이 낫는 것이 아니라 돼지 산업에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배에 오르십니다. 그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를 불쌍히 여기사 큰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큰일은 KJV에 보면 "how great things the Lord hath done for thee"입니다. 귀신들린 한 사람을 회복시키신 것은 작은 일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돼지 한 마리 가치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상 그 한 사람을 돕기 위해 광풍을 뚫고 그 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를 위해 돼지 2천 마리를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그가 회복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큰일입니다. 우리가 한 명의 양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큰 역사를 이루어 명성을 날리는 것이 큰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 큰일이요 위대한 일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갔습니다. 자기 집 뿐만 아니라 데가볼리에 예수님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파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쓸모없었던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자 데가볼리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광풍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 저편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한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람과 바다도 잠잠케 하시고, 강력한 군대 귀신도 제압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자아를 상실한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전능하신 주님을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영혼을 살리는 큰일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